광주 괘고정수&필문이선제부조묘

2022. 10. 26. 06:49바롱이의 쪽지/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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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고정수 가는 길, 효천역 방향 전경"


"산림청 지정 보호수 100선 괘고정수"


[광주광역시 기념물 괘고정수 (掛鼓亭樹)]

높이가 약 15m인 이 왕버들은 필문(畢門) 이선제(李先齊,1389~1454)가 심었으며,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쇠락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후에 이선제의 후손이 과거에 급제하면 이 나무에 북을 걸어 놓고 축하연을 열었기 때문에 괘고정(掛鼓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589년(선조22)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라 불리는 정여립모반사건(鄭汝立謨叛事件)때, 이선제의 5대손 이발(李潑)과 그의 일족이 죽음을 당하면서 나무도 말라죽었다. 그러나 이후 이발의 억울함이 밝혀지자 다시 새 잎이 돋아 가문의 중흥을 예고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괘고정수와 이안재 정원"


"보호수 수령 600년 광주 원산동 왕버들"

필문이선제조부묘 앞 왕버들


 "연못, 필문이선제조부묘, 왕버들"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필문이선제부조묘 (畢門李先齊不祧廟)]

조선초의 이선제(李先齊,1389~1454)를 모신 사당이다. 부조묘(不祖廟)는 나라에 특별한 공훈을 세운 사람을 기려 그 신주(神主)를 영원히 모시도록 건립한 사당을 말한다. 원래 포충사 뒤쪽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선제는 권근(權近)에게 학문을 익혀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태종실록(太宗實錄)」과「고려사(高麗史)」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고향에 돌아와 후진 양성과 함께 향약(鄕約)을 시행하여 향촌풍속을 순화하였다. 뒷산 언덕에 필문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마을입구 도로변에 그의 신도비(神道碑)가있다. 마을 앞에는 필문이 심었다고 하는 600년쯤된 왕버들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부조묘, 창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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