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포충사

2022. 10. 27. 05:03바롱이의 쪽지/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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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기념물 포충사 (褒忠祠)]

포충사는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을 이끌고 금산(錦山)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1533~1592) · 종후(從厚,1554~1593) · 인후(因厚,1561~1592)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1554~1592) · 안영(安瑛,1564~1592)을 모신 곳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헐리지 않았던 전남지역 2대 서원 중 하나이다.

이 건물은 왜란 후 호남유생들이 충의로운 인물을 기리고자 세웠는데 1603년 고경명의 후손과 제자인 박지효(朴之孝)등이 임금에게 청하여 ‘포충(褒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980년에 새로운 사당과 유물전시관(正氣館) · 내외삼문 · 정화비 및 관리사무소 등을 세웠고 이때 옛 사당을 보수하면서 충효당(忠孝堂) · 청사영당(晴沙影堂) · 전사청(典祀廳) · 고직사(庫直舍)등을 철거하였다. 그러나 옛 사당과 동 ·서재는 본래의 위치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다. 포충사에 소장되어 있는 문적(文籍) 4종9점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21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출처:문화재청


"포충사 표석"


"외삼문.충효뮨"


"포충사"


"정화비"


"전시관"


[세독충정(世篤忠貞)]

고경명 선생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나라에 충성하고 항시 올바른 마음을 굳계 지녀야 한다고 평소 후손에게 가르치던 좌우명이다.

세독충정, 충렬공 제봉 고경명선생 동상


"창의거병도, 구국출병도, 금산구국혈전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봉문집목판 (霽峰文集木版)]

『제봉문집』은 제봉 고경명(1533∼1592)의 유고문집으로, 고경명의 막내아들인 고명후가 남원부사로 있을 때 그 지역의 부자들에게 기부를 받아 간행한 것이다.

고경명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수석으로 급제하였고, 같은 해 다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곳에서 도망쳐온 관군을 모아 왜적과 싸웠으며, 다시 의병을 일으켜 6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항전하였다. 

이 목판에는 고경명의 시문집인『제봉문집』5권과 빠진 부분을 보충한『속집』1권,『유집』1권 1책이 있다. 또한 여러 사람과 서석산(지금의 무등산)에 다녀온 기행문인『유서석록』, 임진왜란 때 고경명과 맏아들, 둘째아들 삼부자의 활약상을 적은『정기록』, 고씨 문중의 갖가지 내용을 정리한『제하휘록』등 여러 문적들을 합쳐 간행한 것이다. 재질은 모두 박달나무로 양면에 새긴 것이다. 

17세기 개인문집 목판으로 목판인쇄의 기술사 연구자료 등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금산전적지, 고경명선생신도비, 고경명선생묘, 고경명선생순절비각"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포충사소장고경명문적 (褒忠祠所藏高敬命文籍)]

이 문서는 제봉 고경명(1533∼1592)의 아들 인후, 종후 그리고 포충사와 관련된 문적으로 사우 관리를 위한 후손들의 노력과 나라에서 충신과 효자를 예우하기 위한 문서이다.

고경명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수석으로 급제하였고, 같은 해 다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곳에서 도망쳐온 관군을 모아 왜적과 싸웠으며, 다시 의병을 일으켜 6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항전하였다. 

명문 2점, 입안문 1점, 교지 4점, 유묵 2점으로 되어 있다. 명문은 1601년 나라에서 고경명 부자를 위해 포충사를 지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사액까지 내리니 고경명의 아들들이 감격하여 자신들의 논밭과 노비를 영원히 포충사에 헌납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입안문은 보통 논밭이나 노비를 사고팔 때 관청에서 인가하는 문서인데 이 문적에 포함된 입안문은 나라에서 충신인 고경명 가문에게 5결의 논밭을 내리는 것을 관청에서 인가한다는 증명서이다. 교지는 고경명이 문과에 급제했을 때 받은 교지, ‘충렬공’이라는 시호를 받을 때의 교지, 고인후와 고종후가 증직될 때의 교지이다. 유묵은 고경명이 직접 쓴 격문과 ‘세독충정(世篤忠貞)’이라는 휘호의 2점이다.

충과 효를 다한 가문에 대한 국가의 예우, 선조들의 정신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내삼문"


"포충사"

포충사, 현판, 포충사 내부 영정과 위패


"내삼문에서 바라본 포충사"


"홍살문과 구 포충사"


"옛 포충사 가는 길 홍살문"


[충노비]

봉이와 귀인은 고경명 선생의 가노(집안하인)로서 금산전투에 의병으로 참전함. 고경명 선생과 차남 인후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사 지냈고, 이듬해 다시 고경명 선생의 장남 종후를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 왜적과 싸우다가 주인과 함께 순절 하였는데 국난을 당해 신분을 초월한 자기희회생을 기리기 위해 자연석에 새긴 비이다.


"구 포충사"


"포충사묘정비"


"구 포충사 동.서재, 내삼문"


"구 포충사"


"내삼문에서 바라본 포충사"


"소나무와 홍살문"


"구 포충사에서 바라본 포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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