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전라도 유일의 왜성, 순천왜성&충무사

2022. 11. 30. 05:04바롱이의 쪽지/전라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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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왜성]

이 성은 전라도 지방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왜성으로, 1597년 9월 중순 부터 11월 말에 이르기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쌓았다. 1597년(정유년) 9월에 왜군은 경기도 부근 전쟁에서 패한 뒤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남하하였는데 이때 각 지역의 요충지를 찾아 새로운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성을 축조하였던 것은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2개월간에 걸쳐 이곳에서 펼쳐진 싸움이 왜교성 전투이며 이는 조·명 연합군과 왜의 장수인 고니시 유끼나가 사이에 벌어진 최대의 격전지였으며,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였다. 당시 전쟁의 모습은 「정왜기공도권」에 그려져 있다. 성곽의 구조는 본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성에는 별도의 내성이 있다. 내성과 본성의 성벽은 각각 2겹으로 축조되어 있고, 외성은 1겹으로 축조되어 있다. 성곽내에는 천수기단, 문지, 해자 등의 주요 건물지가 남아 있어 성곽 축조 당시의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성곽내 주요 건물지에 관한 내용은 전쟁의 모습이 그려진 정왜기공도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598년 전쟁의 모습을 그린 「정왜기공도권」


[순천왜성 해자]

성곽의 본성과 외성 사이에 방어를 위해 인위적으로 넓은 해자를 설치하였다. 해자는 바닷물을 유입함으로써 본성을 섬처럼 요새화 하였고, 다리를 만들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1598년 전쟁의 모습을 그린 「정왜기공도권」 을 통해 해자,천수각 등 주변지형 및 건물의 현황을 알 수 있다. 주변지역이 공업단지 및 농경지화 되면서 바닷물이 유입되지 않고, 지형이 변해 해자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해자의 모습은 2007년 순천왜성 보수사업으로 일부 지역에 대해 복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순천왜성 문지1]

이 문지는 본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주출입문이다. 문지 옆으로는 해자를 만들고, 바다 물을 끌어들여 섬처럼 만들어 방어에 치중 하였던 건물지로 여겨진다. 만조때 멀리서 이곳 출입로가 다리처럼 보인다 하여 왜교 또는 예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문지 공사는 2007년 이루어 졌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일본성 축조방식을 자문받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문지를 쌓는 방식은 비교적 큰 돌을 이용하여 불규칙하게 쌓았다.


[순천왜성 문지2]

이 문지는 천수에 이르는 주출입문이다. 일직선으로 진입 하지 않고 “ㄱ"자 형태로 꺾어 진입하는 구조이다. 문지의 바깥쪽은 남쪽으로 길게 연결된다. 성벽의 서쪽으로는 해자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석축 쌓기 방식은 자연석을 불규칙하게 쌓는 방식이며, 문지의 상단부를 큰 돌로 쌓아 적에게 위압감을 주는 심리전에 이용하였다. 정애기공도권에 문루와 성벽위에 여장 등이 그려진 그림과 성호집, 예교진병일록에 "성위에 여장을 쌓아 포 구멍을 벌집같이 냈다" 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전라남도 기념물 순천왜성 (順天倭城)]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낮은 구릉지대에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 만든 성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장 소서행이 일본군의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하여 쌓은 왜성이다.

순천왜성은 왜교 또는 예교(曳橋)라 하며 일본사람들은 순천성이라 부르고 있고, 1997년 1월 1일 국가 사적 제49호에서 해제되기 전까지는 ‘승주 신성리성’으로 불려왔다.

성벽은 외성 3첩과 내성 3첩으로 쌓았는데 내성만 그 흔적이 분명하고 외성은 분명치 않으며, 성 주위에는 연못을 둘러 판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성은 1598년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군 사이에 최대의 결전이 벌어진 곳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소서행장을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둔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출처:문화재청


[순천왜성]

신성리 왜성은 선조 30년(1597) 9월 2일에 쌓기 시작하여 12월 2일에 완성하였다. 왜군은 바다에 접해 있는 산을 의지해 성을 쌓았는데, 육지에 면한 서쪽에 해자를 파서 육지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고 필요할 때만 개폐식의 다리를 놓았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왜교(倭僑) 또는 예교(曳僑)라 불렀다. 당시 외성 3겹, 내성 3겹, 본진 3겹 등 9겹으로 성벽을 쌓았으나, 지금은 본진이 있었던 곳에 성가퀴(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 일부와 산마루에 큼직한 자연석을 쌓아올려 만든 높직한 사령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왜성의 축성은 기본적으로 조선식 성의 축성과 다른 점이 많다. 조선식 성이 평지성이나 산성임에 견주어 왜성은 두 가지를 겸한 평산성이다. 또한 왜성은 반드시 선박을 댈 수 있는 해안가의 얕은 산 위에 지어졌다. 조선식 성곽이 단곽이며 수직이라면, 왜성은 지휘대를 중심으로 3중의 동심원형으로 만든 복곽이며 70도 각도로 경사져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식은 많은 양의 돌로 기초공사를 하고서 그 위에 장방형의 돌로 성벽을 쌓아올리는데, 왜성은 기초공사 없이 큰 자연석을 포개 올리고 그 사이를 작은 돌로 메워 성벽을 고정했다. 성벽 또한 조선식은 보통 30㎝로 얇은데, 왜성은 보통 2~4m로 두텁다. 성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면 조선식의 경우 성안이 훤히 다 보이는데, 왜성은 ㄱ자형의 돌담 사이를 통과해 들어가도 10~20m 앞에 또 다른 돌담이 있어 침입자를 활 또는 조총으로 격퇴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조선식은 총지휘소를 두는 데 일정한 원칙이 없지만, 왜성에는 성내 가장 높은 자리에 보통 3층짜리 건물을 지어 총지휘소로 삼았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순천왜성 사령대]

정유재란 때 왜군이 쌓은 성인 신성리 왜성은 외성, 내성 본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진에서 장수가 지휘하던 사령대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천수기단]

천수 건물이 세워졌던 단으로 천수기단 앞에는 부속된 낮은 단이 있다. 천수는 성을 대표하는 권위와 상징의 건물이다. 「정왜기공도권」 에는 3층 팔작지붕의 천수대가 그려져 있으나, 천수각 1층 아래에 오층망해루라고 쓰여져 있어, 오층 건물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천수기단은 오랜 세월 동안에 석축이 흐트러지고 일부가 무너져 2007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축쌓기 방식은 자연석을 불규칙하게 쌓는 방식이다. 모서리 돌은 쐐기질하여 쪼갠 돌을 사용하였고, 쐐기질 흔적이 잘 남아 있으며 위아래를 교차되게 쌓았다. 천수기단의 상부는 남아 있던 초석은 그대로 보존하고 기존 초석위에 새로운 초석을 놓아 건물의 규모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천수기단에서 바라본 광양만"


"천수기단에서 바라본 신성마을"


"순천왜성 옛 성벽"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충무사 (忠武祠)]

임진왜란 때 공이 컸던 충무공 이순신과 정운, 송희립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조선 선조 12년(1579)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강포·한산도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정유재란 때 명량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노량진에서 순절하였다.

충장 정운(1543∼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선조 3년(1570)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옥포·당포·한산도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송희립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운 장군의 군관으로서 영남지역에 원병파견을 주장하였고,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숙종 16년(1690)에 주민들이 사당을 짓고 충무공의 위패를 모셨으나 1944년 일본인들이 불태워 순천향교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지었다. 이순신 장군의 탄생일과 귀천일에 제향을 모시고 있다.

건물은 모두 4동으로 중심 건물인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출처:문화재청


"충무사 내삼문에서 바라본 순천왜성"


"충무사"


"충무사 내부 모습"

이순신 장군 영정, 위패, 정운, 송희립 장군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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