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송광사 성보박물관

2022. 12. 1. 04:45바롱이의 쪽지/전라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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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송광사 성보박물관"


[옛 송광사 사진]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후 2대 국사인 진각국사와 조선 왕조가 성립된 직후의 16대 고봉국사에 의해 각각 크게 중창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절이 크게 불타고 승려들이 쫓겨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인적이 끊겨 폐사 지경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 전후에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룰 만큼 법명이 높았던 부휴대사(浮休大師, 1543~1615)가 들어와 송광사의 명맥을 다시 이었다. 이후 송광사는 헌종 8년(1842)에 큰 불을 만났으며 그 이듬해부터 철종 7년(1856)까지 다시 크게 중창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파손되었다가 조금씩 복구·중창되었으며, 근래에는 대웅보전을 새로 짓는 등 대규모 불사가 있었다.

현재 송광사는 건물 50여 동의 사찰로 작지 않은 규모이지만, 이미 고려 명종 때부터 건물 80여 동을 갖춘 대가람이었고,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그 규모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건물이 많았기에 송광사에는, 비가 오는 날에도 비를 맞지 않고 자유롭게 경내를 오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순천 송광사 고려고문서 (順天 松廣寺 高麗古文書) Documents of the Goryeo Dynasty in Songgwangsa Temple, Suncheon]

순천 송광사 고려고문서(順天 松廣寺 高麗古文書)는 모두 고려시대의 유물로 절에 관한 중요자료이다.

지정된 유물을 보면 첫째,수선사의 창건연혁과 관련된 형지기 1점, 둘째, 수선사에 소속되어 있는 노비를 기록한 노비문서 1점으로 총 2점이 있다. 

고려시대에 묵으로 쓴 글씨가 남아있는 것은 매우 희귀한 예로, 오늘날까지 원래 모습대로 보존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문서의 양식과 필법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순천 송광사 경패 (順天 松廣寺 經牌) Sutra Plaques of Songgwangsa Temple, Suncheon]

경패는 원래 불경을 넣은 나무상자에 경전의 이름을 기록하여 달아서 사용하던 것이다. 송광사에 전해 내려오는 경패는 총 43개로 상아패 10점과 목제패 33점이다.

표면에 액(額)을 만들어 불경의 명칭과 번호를 새겼다. 가장자리에는 덩굴무늬, 학무늬 등 여러가지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뒷면에는 방형의 구획 안에 보살, 나한, 신장상 등을 돋음새김하였는데, 상의 위쪽에는 장막,격자창 등을 조각하기도 하였으며, 아래에는 연화대좌, 난간 등을 표현하였다.

여러 상들의 표현된 방형 구획 아래에는 정(貞), 주(周), 진(晉), 하(何) 등의 함호(函號)가 연꽃, 집 등의 모양 안에 새겨져있다.

측면(약 1㎝두께)에는 둥근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세 개는 뚫어새긴 것이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되며, 조각의 정교함이나 그 수법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대방광불화엄경소 목판 (大方廣佛華嚴經疏 木板) Printing Woodblocks of Commentary on the Avatamsaka Sutra (The Flower Garland Sutra)]

송광사에 소장된 ‘『대방광불화엄경소』 목판’은 송나라의 정원(淨源, 1011∼1088)이 기존의 『대방광불화엄경』 주석서를 적절하게 편차하여 120권으로 엮은 것이다. 이 불서는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요청으로 수입한 2,900여장의 판본이 국내에서 유통된 이후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에 왕실 주도로 판각하였고, 이어 명종 연간인 1557∼1564년에는 황해도 귀진사, 1629∼1631년에는 경기도 삭령의 용복사에서 간행한 사실이 있다. 송광사에서는 1634∼1635년에 전질을 간행하였는데, 현재 귀진사와 용복사의 간본은 목판이 전하지 않을뿐더러 인본 역시 아주 일부분만 전한다. ‘『대방광불화엄경소』 목판’은 현재 100매 가량 일실(逸失)되었으나 보존된 2,347매는 큰 손상 없이 송광사의 화엄전에 수장되어 있다. 권21 등의 권말에 남아 있는 간행 기록에 의하면, 각성(覺性, 1575∼1660), 계훈(戒薰), 태능(太能, 1562∼1649), 태호(太湖), 희옥(熙玉), 응묵(應默) 등이 주도하여 숭정 7년(1634) 2월부터 숭정 8년(1635) 5월까지 1년 4개월에 걸쳐 완성되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간행장소는 “順天松廣寺開板”과 같이 송광사이다. 송광사 소장의 ‘『대방광불화엄경소』 목판’은 대장경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불서 목판 중에서 가장 방대하며 유일하다. 국가의 지원 없이 한 사찰에서 비교적 단기간에 120권이나 되는 분량을 많은 전문 인력들을 동원하여 간행된 사실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 목판은 간행 당시의 경판 조성과 관련된 역사상은 물론 불교사적 사실 등 다양한 역사․문화적 실체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보물로 지정하여 원천자료를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 문화재청)

[보물 인천안목 목판 (人天眼目 木板) Printing Woodblocks of Incheon anmok (Vision of Five Supreme Patriarchs)]

송광사에 소장된 ‘『인천안목 목판』’은 전체 42매로 일부 손상된 부분이 확인되나 결판이 없이 완전하게 전하고 있다. 『인천안목』은 1357년 고려 수경선사본이 간행되었고, 이후 1395년 양주 회암사본, 1529년 순천 송광사본, 1530년 진산 서대사본과 1771년 청량산 문수전 중수본이 판각되었던 적이 있으나, 모본이 되는 목판이 전해지는 것은 이 목판이 유일하다. 이 책은 크게 상․중․하의 3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권하에 「종문잡록(宗門雜錄)」과 물초 대관(物初大觀, 1201∼1268)의 중수후서(重修後序) 및 이색(李穡, 1328∼1396)의 발문 그리고 송광사 개판기 등이 수록되었다. 간행 기록을 통하여 중종 24년(1529) 여름에 간행되어 송광사에 소장된 사실을 알 수 있다. 판각은 송광사나 인근에서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목판은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으로서 보물로 지정하여 원천자료를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순천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 복장유물 (順天 松廣寺 塑造 四天王像 腹藏遺物) Excavated Relics from the Clay Four Guardian Kings of Songgwangsa Temple, Suncheon]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의 전체적인 해체보수 과정에서 불복장 유물을 수습하였는데 그 결과 복장전적 12종 14책, 인본다라니 383장, 후령통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복장유물 중에서도 사천왕상 출토 복장전적은 고려시대 교장(敎藏)의 성격을 밝히는 새로운 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복장전적은 대부분 교장(敎藏)의 중수본(重修本)에 해당되는데 그중 일부는 재조본 대장경과 사찰본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주관하여 당시 교장도감(敎藏都監)에서 간행된 <교장(敎藏)>은 1000여종 가운데 국내외를 합쳐 모두 3종에 불과한 실정이며, 그 후 조선 세조가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중수한 책이 지금까지 송광사를 비롯하여 개인소장 등 대략 10종정도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송광사 사천왕상에서 발견된 교장 중수본은 무려 10종에 달하고 있어, 현재까지 알려진 종수와 동일한 수량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새로 발견된 중수본은 교장도감에서의 간행실태를 추정해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성격을 지닌 판본들이다.

① 흥왕사 교장도감 이전에 이미 금산사 광교원에서 간행된 판본이 실재 존재하였다는 사실.

② 교장도감에서는 거란에서 입수한 목판본은 그대로 복각 간행하였다는 사실.

③ 사본으로 전해 오던 것을 조선 간경도감에서 정서본을 따로 마련하여 간행하였다는 사실.

 이처럼 사천왕상 복장전적은 그 동안 학계에서 간헐적으로 논의되었던 내용들을 입증할 만한 새로운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등 불교문화사 · 서지학 · 인쇄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사천왕상 복장전적과 함께 출토된 인다라니경과 후령통 등도 불복장의 내용과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수자를 새긴 육각형 은판]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물을 의미하는 '수(水)'자를 새긴 부적용 은판이다. 육각형 은판에 새긴 '수(水)’의 세변을 맞추면 물이 한없이 넓어 아득함을 나타내는 뜻의 묘(森)자가 된다. 이 은판은 경내 관음전(구 성수전)에서 발견된 것으로 동일한 은판이 경복궁 근정전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대한제국, 1903년)


[보물 송광사 영산전 후불탱·팔상탱 (松廣寺 靈山殿 後佛幀.八相幀)]

송광사 영산전(보물)에 모셔져 있는 불화들로, 조선 영조 원년(1725)에 그려졌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영산회상을 그린 후불탱과, 석가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팔상탱이다.

후불탱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일반적으로 석가후불화에서 보이는 불·보살과 제자 등의 교화성중 및 사천왕·팔부중 등 호법신들에 추가하여, 국왕과 대신같은 많은 청문성중을 비롯한 부처님께 법을 청하는 사리불(舍利佛)까지 등장시켜 놓았다.

팔상탱의 여덟 장면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 설산(雪山)에서 신선들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색 바탕에 붉은색과 녹색을 많이 사용하고, 영산회도와 마찬가지로 전반에 걸쳐 칙칙한 갈색 분위기의 무거운 느낌을 준다.

후불탱은 영산전의 주불인 석가모니불의 후불화이면서도 다른 영산회도 및 기타 전각의 석가후불도와는 다르게 그림 하단부에 설법을 듣는 청중들과 사리불까지 배치시킴으로써 법화경 내용에 매우 충실한 대표적인 영산회도라는데 의의가 있다. 팔상도 또한 구성이 복잡하지 않고 간단한 초기 팔상도의 경향을 띠고 있으며,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나무 표현기법과 여유로운 경물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어 당시 또는 앞선 시기 일반회화와의 관계까지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고봉국사주자원불 (高峰國師廚子願佛)]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공간을 불감(佛龕)이라 한다. 불감은 그 안에 모셔진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송광사의 16번째 국사인 고봉화상이 소지했던 원불(願佛)이라 전하고 있다. 이 불감은 문을 열면 바로 양편 문 내벽에 문짝이 있고, 내부벽에 불·보살 등을 양각으로 조각하였다. 

중앙에 있는 주존불(主尊佛)은 대일여래불로 손모양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전통적인 비로자나불이 보통 취하는 손모양이 아닌 금강권인을 하고 있다. 좌우 부처는 모두 여래상으로서 왼쪽에 보신불인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오른쪽에 화신불인 석가여래가 각각 협시불로 배치되었는데, 이러한 삼존불의 배치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사찰의 대적광전(大寂光殿)에서 볼 수 있는 통례라 하겠다. 또 아랫부분에는 부처님의 두 제자가 서 있고 그 양편에는 보살상이 앉아 있는 상으로 배치되었다.

광배(光背)는 여래상이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나타냈는데 비해 보살상과 제자상은 머리광배만을 조각하였다. 이들 불상에서 중앙 벽면의 두 제자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연꽃무늬 대좌(臺座)를 갖추고 있다.

특히 이 불감에서 주목되고 있는 것은 문비상인데, 일반적으로 문비에는 인왕상이 배치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들 문에는 오른쪽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과 왼쪽에 보관(寶冠)을 쓴 관음보살이 배치되었다.

이 불감에서 보여주는 불상들의 인상은 모두 정상적이지 않으며 찌들거나 뒤틀어져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물론 작은 공간에 섬세한 표정을 조각하는데 어려움이 뒤따랐을 것이나 어딘가 우리나라 불상에서 나타나는 얼굴 표정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같다.

출처:문화재청


[죽비]

석두 스님이 직접 깍아 사용한 죽비로 석정 스님이 새긴 석두선사작 명문이 있다.(일제강점기)


"조계총림 현판"


[태극기]

1945년 해방이후 1974년 까지 사용한 태극기로 송광사 도성당 앞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왼쪽에는 송광사를 먹으로 찍어 놓았다.


[완용펌프]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차로 불리는 완용펌프이다. 「송광사지』에 따르면 이 완용펌프는 1930년 여름 이창조의 설득으로 곡성읍에 사는 학고 정진태가 200원을 시주해 소방기 1대를 시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송광사에 배치된 소방기는 1898년 대한제국 왕궁소방대 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완용 펌프로서 화재 진압을 위해 6~9명의 인력으로 가동 하는 수동식 장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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