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시다, 전주 경기전

2023. 1. 13. 06:26바롱이의 쪽지/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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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다"

[사적 전주 경기전 (全州 慶基殿) Gyeonggijeon Shrine, Jeonju]]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태종은 1410년 전주·경주·평양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고쳐 지었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헌·익랑 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둘렀다.

[영문 설명]

It is a place for enshrining a portrait of the first king, King Taejo or Yi Seong-gye of the Joseon Dynasty.

King Taejong named as Eoyongjeon the place for enshrining a portrait of the first King in Jeonju, Gyeongju, and Pyeongyang in 1410 (AD). Later named Taejojinjeon in the 12th year (AD 1412) of the reign of King Taejong, each place was renamed again in the 24th year (AD 1442) of the reign of King Sejong: Jeonju as Gyeonggijeon, Gyeongju as Jipgyeongjeon, and Pyeongyang as Yeongsoonggjeon. Gyeonggijeon was burnt dow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but was repaired and rebuilt in the 6th year (AD 1614) of the reign of King Gwanghaegun.

The structure of the building consists of Bonjeon (main hall), Heon (administration office), Ingnang (rooms on both sides of the main gate), etc. It is surrounded by Naesammun and Oesammun gates.

출처:문화재청


보호수 수령 250년 전주 경기전 은행나무 옆으로 한복 입은 관광객들이 보인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전주 경기전 하마비 (全州 慶基殿 下馬碑)]

경기전 하마비(慶基殿 下馬碑)는 임진왜란 후 경기전이 중건되던 1614년(광해군 6)에 처음 세워졌으며, 1856년(철종 7)에 중각(重刻)되었다.

비석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경기전 하마비는 여느 하마비와는 다르게 판석위에 비를 올리고 그 판석을 두 마리의 사자(혹은 해태)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로, 단지 하마(下馬)의 의미로서만이 아닌 경기전 수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비석의 형태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형태여서 조형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경기전이 어떤 곳인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출처:문화재청


"경기전 정전 홍살문, 외삼문"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예종대왕태실및비 (睿宗大王胎室및碑)]

이곳은 조선 예종대왕의 태(胎)를 묻은 석실이다.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묻었는데, 이를 태실이라 한다. 원래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 마을 뒷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이 태실은 팔각형 돌 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돌을 얹은 다음 지붕돌로 덮었다. 비석은 태실과 함께 옮긴 것으로,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과 비석의 건립연대를 앞 뒷면에 각각 새겼는데, 건립연대는 선조 11년(1578)이다. 잘 보존된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뿔 없는 용의 모습을 새긴 머리 돌이 돋보이는 비석이다. 이 태실과 비는 왕실에서 태를 처리한 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매화나무와 실록각"


[전주사고.실록각]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봉안하여 왔었다.

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태종9)부터 1413년(매종13)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세종13) 태종실록 38권을 편찬한 후 태조 ·정종· 태종의 3조실록 각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과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2부는 실룩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27)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분장하였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때 춘추관· 충주· 성주의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병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손홍목, 안의 등이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이안. 사수하였기 때문이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514책 47계, 기타 전적이 64종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때 실록각은 소실되었는데 1991년 이를 복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조경묘 (肇慶廟)]

이 사당은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과 그 부인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이한은 신라 때 「사공(司公)」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고, 그 부인은 경주 김씨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한으로부터 21대 후손이다. 조경묘는 조선 영조 47년(1771)에 세워, 영조가 세손(정조)으로 하여금 쓰도록 한 시조 내외의 위패를 봉안했다. 철종 5년(1854)에 경기전과 함께 보수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조경묘는 경기전과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출처:문화재청


"어진박물관"


[태조어진(준원전), 태조어진(홍룡포) 권오창 모사]

태조어진은 1410년(태종 10) 전주 경기전에 봉안되었다. 현존하는 태조어진은 1872년(고종 9) 조중묵을 비롯한 10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한 영정이다. 건국자의 권위와 위엄이 돋보이는 어진으로 용안의 정면을 그린 전신상이다. 머리에 익선관을 쓰고 청룡포를 입었으며, 허리에 각대를 차고 흑화를 신은 평상시 집무복을 입은 모습이다. 눈과 입은 작고 귀는 크며, 오른쪽 눈썹 위에 사마귀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반듯하며, 풍채가 좋다고 하였다.


"조선 태조상, 황산대첩"


"모사본 어진"


"태조어진 봉안 행렬"


[가교]

1872년 태조 어진을 봉안할 때, 또는 1771년 조경묘에 위패를 봉안할 때 사용했던 가교로 추정된다. 가마 안에 의자를 설치하였으며 몸체 널판에 금색으로 연화문을 그렸다. 전후좌우에 구슬을 단 발을 설치하고, 가마채의 끝 부분 및 몸체와 접한 부분에 각각 용머리를 장식하였다. 가교는 임금이 타는 가마이다. 경기전에 임금이 온 적이 없는데 가교가 있다는 것은 임금을 상징하는 의식구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한다.


"태조 어진 받침대와 용두, 향낭"


[위봉사기실 현판 복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여 경기전 태조어진과 조경묘의 위판을 위봉산성으로 이안하였을 때 위봉사 경산 스님이 법당에 모시고 지켰으며, 영정을 모시고 온 관리들의 식사까지 맡아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전라감사가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으나 어수선한 틈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에 김성규라는 사람이 '세상에 상을 주려다 마는 법이 어디 있느냐.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았다. 고금천하에 공 있는 자가 누락 되어 묻혀버리는 일이 허다하니 몇 마디 적어 절간 벽에 걸어둔다' 라는 내용의 현판을 써서 위봉사에 걸어 두었다.


[조경단 지석]

조경단 조성과정에서 출토되어, 건지산이 시조의 묘역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준 석물이다.「조경단의궤」에 돌의 상면과 왼쪽 면에 51자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해독이 안되는 글귀로 비결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물의 출토는 신이한 일로 여겨지고 길조의 증거로 생각되어 묘역 조성의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나무뿌리를 뽑던 중 발견되었는데, 석물을 찾은 자들에게 각각 40원의 상금이 주어졌다. 석물이 찾아진 곳에는 봉분을 쌓았다. 조경단 도형의 '의묘소'가 이곳이다.


[명견루 현판]

명견루는 풍남문 이전의 전주부성 남문 편액이다. 1734년(영조 10)에 전라감사 조현명이 전주부성을 개축하고 남문을 '명견루'라고 이름하였다. 전주성을 새로 쌓을 때 반대가 심했는데, 영조의 명견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하여 '명견루'라고 이름하였다. 이 명견루 편액은 풍남문 안에 걸려 있던 것을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다.


"경기전 정전 외삼문"


"외삼문에서 바라본 홍살문"


"경기전 내삼문"


"드므와 내삼문"


[보물 전주 경기전 정전 (全州 慶基殿 正殿) Main Hall of Gyeonggijeon Shrine, Jeonju]

사적 전주 경기전은 조선 왕조를 개국시킨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이다. 태조 어진을 모신 곳을 어용전, 태조진전 등으로 명명하던 것을 1442년(세종24년)에 경기전이라고 명명하였다. 1410년에 창건된 경기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1614년에 중건했다. 1872년 태조 어진을 새롭게 모사하여 봉안하면서(태조영정, 보물) 경기전의 전반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정전은 다포계 양식으로 외3출목, 내3출목이고, 5량 구조의 맞배, 겹처마 지붕이다. 살미의 쇠서가 발달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초각 처리되어 안정된 조선 중기의 형식이 반영되어 있다. 배례청은 이익공을 가진 익공계 양식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배례청의 박공면은 정전의 정면 모습이 된다. 정전과 배례청은 화강암 원형 초석 위에 민흘림의 원기둥을 세웠다. 내부의 5.8m나 되는 2개의 고주는 종보를 직접 받고 있으며, 양측면의 기둥도 대들보를 받는 고주로 되어 측부재 구조가 간결하고 견고하게 짜여있다. 포작의 내부 살미 조각과 보아지 및 종도리를 받는 파련 대공의 섬세한 조각과 우물천정 단청 등의 의장이 화려한 편으로 다른 유교 건축과 차별화된 권위성을 볼 수 있다. 구조 부재들의 이음과 맞춤이 정확하며 견고하고 조선 중기의 전통 건축 기법이 잘 전수된 안정된 구조와 부재의 조형 비례는 건축적 품위를 돋보여준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어진이 봉안된 정전 기능과 품위에 기준한 내신문 내의 신로 및 향로의 엄격한 격식, 그리고 정전과 배례청 평면 조합 및 어방구조 등이 보물로서의 문화재 가치가 인정된다.

[영문 설명]

Gyeonggijeon Shrine houses a portrait of King Taejo (1335-1408, r. 1392-1398), the founding ruler of the Joseon Dynasty. Erected in 1410, the shrine was initially called Eoyongjeon (“Royal Visage Shrine”) or Taejojinjeon (“True Visage Shrine of King Taejo”), but was renamed Gyeonggijeon (“Shrine of Felicitous Foundation”) in 1442, the 24th year of King Sejong’s reign. It was burned down in 1597, during the second Japanese Invasion, and was rebuilt in 1614. It went through overall repairs in 1872, when a new reproduction of King Taejo’s Portrait was made and enshrined there. This Portrait of King Taejo is Treasure No. 931.

The Main Hall, or Jeongjeon in Korean, is a five-beam structure covered with a gabled roof, featuring double eaves and elaborate triple-bracket sets in the mid-Joseon style. An open ceremonial pavilion forms the facade of the Main Hall, its roof gables constituting the front of the roof. Both buildings have plain round columns and stand on granite foundations. Inside the Main Hall, two tall pillars 5.8 meters high support the horizontal beams, and the side columns are also tall enough to support the main crossbeams. The neat, solid roof structure, built of carefully proportioned and skillfully carved members, demonstrates precise joining and fitting techniques as well as adroit carving skills. The gorgeous coffered ceiling enhances the dignified ambience of the royal portrait hall, distinguishing it from other Confucian buildings.

The solemn atmosphere is further emphasized by the spirit road stretching from the inner spirit gate to the Main Hall, the incense burners and the colonnaded corridors flanking the elegant complex of the Main Hall, and an open ceremonial pavilion.

출처:문화재청


[국보 조선태조어진 (朝鮮太祖御眞) Portrait of King Taejo of Joseon, 복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 세로 218㎝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

이 초상화는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용상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바닥에 깔린 것은 숙종 때까지 왕의 초상화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히 높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오래된 화법임을 알려준다. 의자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익선관은 골진 부분에 색을 발하게 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고,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음영법을 사용하여 얼굴을 표현하였다.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 낸 작품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문화재청


[국보 조선태조어진]

경기전의 본전 안에 보물 제931호로 지정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다. 조선왕조 전 시대를 통해 역대 왕들의 어진은 상당수 제작되었으며 그 제작 과정이나 봉안체제에 관한 세부적인 기록은 온전히 전해지지만, 막상 현존하는 유품은 아주 드물어 겨우 네 폭에 지나지 않는다. 영조·철종·익종 그리고 여기 경기전의 태조 어진이 그것이다.

애초에 경기전에 안치되었던 어진이 지금까지 전해지지는 않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에 보존하고 있던 어진은 선조가 피난하던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옮겨져 병화를 면했다. 그것이 그 뒤 얼마나 오랫동안 전해졌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고종 9년(1872) 당시 경기전에서 받들던 어진이 오래되어 낡고 해짐에 따라 새로 제작하면서 초상화에서는 당대 가장 뛰어났던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으로 하여금 영희전(永禧殿)에 있던 태조 어진을 범본(範本)으로 하여 모사케 한 것이 지금의 어진이다. 어진 제작 방법에는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模寫)의 3가지가 있다. 도사는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직접 어전에서 사생하여 완성하는 방법이다. 추사란 왕이 살아 있을 때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 생전 모습을 추상하여 제작하는 것을 말하며, 모사는 이미 완성되어 있던 어진을 모본으로 하여 옮겨 그리는 경우를 일컫는다. 경기전의 어진은 따라서 모사의 방법으로 이룩된 이모본(移模本)이다.

이렇게 하여 경기전에 갈무리된 태조 어진은 불과 십수년 뒤 한 차례 곤욕을 치른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피신’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판관 민영승은 태조 어진을 이안(移安)한다는 핑계로 어진을 가지고 성을 넘어 도망하여 위봉산성에 몸을 숨겼다. 구차한 피난이었다. 하여간 그 덕택에 어진은 무사할 수 있었다.

어진은 양 어깨와 앞가슴에 황룡을 수놓은 청포(靑袍) 차림에 익선관(翼蟬冠)을 쓰고 용상에 정좌한 정면교의좌상(正面交椅坐像)이다. 곤룡포의 너른 품새에 비해 얼굴이 작은 편이다. 입과 눈 또한 작고 수염도 성글지만 눈동자는 또렷하고 입매무새가 단단하여 매우 야무진 인상이긴 하나 우리가 흔히 머릿속에 그리는 난세를 헤쳐간 풍운아나 호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청포의 짙은 남색과 용무늬의 금빛, 그리고 옷자락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붉은빛이 화려하고 고귀한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엄숙하고 위엄에 찬 분위기를 자아낸다.

양식적으로는 관모와 얼굴 부위에서 가볍게나마 음영법이 보이는 등 이모 당시의 화풍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더 많은 부분에서 조선 초기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특히 선묘 위주로 처리된 옷주름과 각이 진 윤곽선, 옷자락의 양쪽 틈새로 보이는 안감의 표현기법을 비롯하여 무릎 위로 높게 깔린 무늬 있는 돗자리라든가 용상의 형태 묘사 등이 원본에 충실한 이모 상태를 말해준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이 태조 어진은 비록 이모본이기는 하지만, 몇 점 남아 있지 않은 조선시대 어진의 하나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함께 조선 초기 초상화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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