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의 궁궐

2023. 2. 18. 04:02바롱이의 쪽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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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500년, 그 삶과 마주하다"

[국립고궁박물관]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5년 8월 15일 경복궁 내에 있는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조선왕실의 보물을 한데 모아 전시해 놓은 국립고궁박물관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개관했다. 

문화재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고, 일제에 의해 헐린 경복궁 전각들을 복원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1992년에는 4대궁궐과 종묘, 능원 등에 흩어져 있던 궁중문화재를 모아 덕수궁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덕수궁 내 석조전은 전시공간과 수장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규모조차 너무 작아 왕실문화를 홍보하고 연구 보존하는데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쳤고 이에 문화재청은 1993년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왕궁박물관을 개관하기로 결정하고 철저한 준비 끝에, 이번에 화려하게 개관을 하게 됐다. 

이처럼 10년간의 긴 덕수궁 시대를 마치게 된 국립고궁박물관의 새 보금자리는 덕수궁 시대보다 전시공간은 3배, 수장 공간은 30배가 넓은 초대형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이에 따라 4만여 점에 달하는 왕실문화재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보존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서울문화포털


[2층 전시안내]

2층에는 조선 왕조의 상징물과 기록물 위주로 전시된 ‘조선의 국왕’실과 조선 5대 궁궐의 역사와 왕실 가족들의 생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조선의 궁궐’, ‘왕실의 생활’실이 있습니다.

[조선의 궁궐]

조선 왕조는 고려의 구세력 제거와 나라의 번영을 도모하기 위하여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수도를 옮기고 새로운 터에 궁궐을 건립하였다. 북쪽 백악산을 주산主山으로 목멱산(남산, 남쪽) · 타락산(낙산, 동쪽) · 인왕산(서쪽)으로 둘러싸인 한양을 수도로 정하고, 백악산을 뒤로하여 법궁法宮인 경복궁景福宮을 세웠으며, 좌우로는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였다. 

궁궐은 중심에 국가 행사를 거행하고 국정을 논의하는 정전과 편전을 두고, 그 주변에 조정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을 배치하였다. 뒤쪽으로는 왕과 왕비의 취침 공간인 침전, 동쪽에는 세자가 기거하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건축물은 목조 구조에 기와를 얹었으며, 실내의 바닥은 정전과 편전의 경우 전돌 또는 마루를 깔고 취침 공간의 경우에는 온돌 시설을 갖추었다. 건물 외부는 왕의 권위와 존엄을 드러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색상과 길상吉祥문양을 이용한 단청으로 장식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 1395년(태조 4)에 세워진 경복궁은 가장 중심인 정궁(또는 법궁)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1868년(고종 5)에 재건되었다. 이외에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1484년(성종 15)에 창경궁, 1622년(광해군 14)에 경덕궁(지금의 경희궁), 1897년(고종 34)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등이 있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궁궐 영건 역사와 사용 기간"


"조선 5대 궁궐 지도"


[북궐도형 北闕圖形]

대한제국, 1907년 전후 

북궐도는 경복궁의 모습을 배치평면도의 형태로 나타낸 건축그림이다. 

도형 내에 접혔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화첩으로 제작되어 있던 것을 펼쳐 배접한 후 두루마리 형태로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북궐후원도형」도 함께 제작되어 연결해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연결 부위에 좌우로 각각 '북(北)'과 '궐(闕)'을 써넣었다.

경복궁 궁내를 1/200 축척의 방안 위에 10~11mm 간격의 붉은 실선으로 구획하고, 그 위에 경복궁 내의 모든 건물을 평면도 형식으로 그린 뒤, 각 건물의 명칭과 평면, 구성, 각 실의 용도를 표기하였다. 제작 시기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5년에서 1908년 사이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되기 직전의 경복궁 내 전각의 배치와 모습을 알 수 있어 경복궁 복원의 근거자료가 되고 있다. 『북궐도형』은 『동궐도형』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전모를 모눈종이 위에 평면도로 그려낸 배치도로서, 조선시대 제작된 도형 가운데 최대 걸작이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동궐도 東闕圖]

조선朝鮮, 1828~1830년, 고려대학교박물관 | 복제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궁궐 그림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해 '동궐東闕'이라 했다. 궁궐 각 전각의 외형은 물론 다양한 설치물과 조경을 자세하게 묘사해 당시 궁궐의 모습을 잘 담고 있다. 1828년에 무너진 금루각漏은 터만 그려져 있지만 1830년 화재로 타버린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 양화당養和堂, 경춘전景春殿 등의 건물은 모두 원래 모습대로 그려져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1828년에서 1830년 사이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잡상 雜像]

조선朝鮮

잡상이란 기와지붕위 추녀마루에 흙으로 빚어 올린 작은 장식기와이다. 궁궐의 재앙을 막아주기를 기원하며 만든 것으로 주로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와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과 토신들을 형상화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액운을 막아주는 신으로 알려져 있다.


[경회루 연못 출토 청동용 靑銅龍]

조선朝鮮 1865년

1997년 경회루 연못 준설 작업 도중에 출토된 청동용이다. 발굴 당시 큰 돌에 눌린 채 직사각형 석판 위에 놓여 있었다. 

용은 발톱 5개가 달린 오조룡(五爪龍)은 밀랍으로 좌우를 따로 주조한 뒤 결합하여 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주도된 경복궁 중건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에 의하면, 이 청동용은 1865년 1쌍을 제작하여 화재로부터 궁궐을 보호해달라는 기원을 담아 1867년 연못에 가라앉혔다. 제작자는 별간역(別看役, 나라의 큰일이 있을 때 감독을 담당하던 임시벼슬) 김재수(金在洙)이다. 발견 당시에는 한 쌍 중 한 개의 용만 발견되었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청기와 용머리 장식"

창덕궁 선정전 수습


[세자와 세자빈의 공간, 동궁]

동궁은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으로 궁궐내동쪽에 별도로 위치한다. 동궁은 단순한 생활공간뿐만 아니라 세자가 제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공간으로 왕의 덕목을 갖추기 위해 교육을 받던 세자시강원[춘방], 서연 장소, 경호를 담당하는 세자익위사[계방] 등을 포함하고 있다. 

동궁은 세자가 책봉되어 즉위할 때까지만 사용하던 공간으로 세자가 책봉되지 않은 경우에는 왕의 정치공간인 편전으로 사용되는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장조 왕세자책봉 옥인과 죽책]

조선 1736년(영조 12)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영조가 사도세자(장조)를 왕세자로 책봉하면서 내린 옥인과 죽책이다. 장조는 생후 백일 만에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의 저승진으로 옮겨 머물렀으며, 책봉식은 두 살이 되던 해에 거행되었다.


[서시춘방관 현판 2]

조선 1747년(영조 23)

영조가 세자시강원춘방의 관원들에게 전하기 위해 쓴 시를 새긴 현판이다. 사도세자에 대한 각별한 마음과 왕세자를 바르게 보필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궁궐의 호위체계]

궁궐은 국왕과 왕실가족들의 생활공간이자 국정을 운영하는 곳이었던 만큼 경비가 삼엄했고,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궁궐 호위는 궁궐담장 내부와 외부, 궁궐문의 3중으로 이루어졌으며 국왕이 주로 계시는 정전과 편전일대는 별도의 군관들이 삼엄하게 경호하였다.

궁궐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표식이 필요했다. 궁궐에 드나드는 일꾼들과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관서의 관계자들에게는 신부와 한부를 배포하였다. 9품 이상의 관원들은 별도의 표식 없이도 궁궐 출입이 가능했으나, 특별히 왕의 부름에 응할 때는 승정원에서 명패를 받아가야 하는 등 관원들의 지위와 사안에 따라서 여러 가지 출입하는 방식과 절차가 규정되어 있었다.


[칠언시 <증점>을 새긴 현판]

조선朝鲜

창덕궁 후원 청정에 걸었던 현판이다. 송나라 학자 주희가 지은 칠언시 <증점>을 쓴 선조의 어필을 옮겨 새겼다.

봄옷이 처음 이루어지고 고운 해는 더디 가니
春服初成麗景遲

흐르는 냇물 따라 거닐며 맑은 물결 구경하네
步隨流水玩晴漪


[상원냉절제종신서시 현판]

조선 1727년(영조 3)

창덕궁 후원 영화당에서 영조가 종신 63명과 접견해 시를 짓고 이어서 서평군 이요가 글을 썼다.

상원냉절제종신서시 영조가 쓴 글

정월 대보름 좋은날 종친들 모임
좋은 분위기 화락한데 햇빛도 밝구나
그대들이여 술 마시고 취함에 사양하지 말지어다
한잔 술도 모두가 정성에서 비롯되네

성상즉조삼년(1727) 정미 정월 대보름에 임금께서 영화당에 오시어 여러 종신을 불러서 가인례로 접견하시고, 선온(임금이 신하에게 궁중에서 빚은 술을 내리던 일)을 명하시고, 직접 시를 한수 짓고서 화답하셨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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