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의 국왕

2023. 2. 17. 06:13바롱이의 쪽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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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500년, 그 삶과 마주하다"

[국립고궁박물관]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5년 8월 15일 경복궁 내에 있는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조선왕실의 보물을 한데 모아 전시해 놓은 국립고궁박물관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개관했다. 

문화재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고, 일제에 의해 헐린 경복궁 전각들을 복원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1992년에는 4대궁궐과 종묘, 능원 등에 흩어져 있던 궁중문화재를 모아 덕수궁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덕수궁 내 석조전은 전시공간과 수장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규모조차 너무 작아 왕실문화를 홍보하고 연구 보존하는데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쳤고 이에 문화재청은 1993년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왕궁박물관을 개관하기로 결정하고 철저한 준비 끝에, 이번에 화려하게 개관을 하게 됐다. 

이처럼 10년간의 긴 덕수궁 시대를 마치게 된 국립고궁박물관의 새 보금자리는 덕수궁 시대보다 전시공간은 3배, 수장 공간은 30배가 넓은 초대형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이에 따라 4만여 점에 달하는 왕실문화재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보존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서울문화포털


[2층 전시안내]

2층에는 조선 왕조의 상징물과 기록물 위주로 전시된 ‘조선의 국왕’실과 조선 5대 궁궐의 역사와 왕실 가족들의 생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조선의 궁궐’, ‘왕실의 생활’실이 있습니다. 

[조선의 국왕]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에서 국왕은 ‘하늘의 명[天命]을 받은 초월적 존재’로 정의되었다. 국왕은 즉위부터 사후에 이르기까지 각종 상징물 속에 둘러싸여 의례를 행하면서 지존의 권위와 위엄을 표현하였으며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국왕이 행정과 각종 의례를 위해 사용한 어보御寶 및 왕이 자리한 곳에 항상 펼쳐진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는 국왕을 상징한 대표적 기물이다. 

조선은 국왕을 정점으로 집권화된 왕조 국가로 왕은 입법·사법·행정 등을 망라하여 한 나라를 통치하는 무한한 책임과 권한을 지녔으며, 국왕의 삶은 바로 왕조의 역사와 직결되었다. 이에 따라 국왕의 공식 일정과 행사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에 세세하게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조선 왕조는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국왕을 도와 유교적 문치주의 국가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집현전集賢殿, 규장각奎章閣 등의 학술 연구기관을 운영하였고, 과거시험을 시행하여 관료를 선발하였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임금 의자 御座]

어좌는 궁궐의 정전과 편전 가운데에 위치하여 왕이 앉아 백관의 하례를 받고 조회를 행하며 집무를 하는 좌석을 말하며 옥좌玉座 또는 보좌寶座라고도 한다.

[일월오봉도 日月五峯圖]

국왕의 덕을 상징하는 산봉우리, 해, 달, 물, 소나무를 그린 병풍이다. 궁궐 중심 건물인 정전의 어좌 뒤나 국왕 초상인 어진 주변 등 국왕이 자리한 곳 어디에나 펼쳐 왕권을 나타내고, 왕실 번영을 기원했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어보·인장]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인장은 의례용 어보, 행정목적의 국새, 개인적 인장 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보는 국왕, 왕비 등 왕실 주인공의 공덕을 찬양하거나, 국왕 통치를 재평가하는 의미를 담은 이름을 새긴 도장으로, 주인공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담은 어책(御册)과 함께 제작하였습니다. 의례용 어보는 주인공 사후 종묘에 모셔 왕조의 영속성을 의미하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국새는 통치에 사용한 실무용 인장입니다. 그 모양이나 형식은 의례용 어보와 동일하나 용도별로 다양하게 제작되는데, 종묘에 모셔 철저히 관리한 어보와는 달리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개인용 인장은 왕이나 왕비 등 왕실 인물들이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한 도장으로 왕실 내·외부 간에 오가는 문서나 예술과 시 등의 취미와 연관된 활동에 사용되었습니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정조 효손 은인과 유세손서(正祖孝孫銀印 · 諭世孫書)]

1776년(영조 52) 영조가 왕세손이던 정조에게 내린 은인(銀印)과 유세손서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승정원일기》의 기사 삭제를 요청하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정조의 효심에 영조가 감동하여 그의 나이 83세에 이 은인을 내렸다. 정조는 조회나 거둥 때면 늘 이 은인과 <유세손서>를 앞세웠다고 한다. 

인면에는 영조가 친필로 쓴 ‘효손 팔십삼서(孝孫八十三書)’가 새겨져 있다. 어필을 새긴 어보로서는 유일하다. 

은인을 보관하는 붉은색 함은 위쪽에 거북과 양쪽 측면에 손잡이를 붙인 점에서는 보통의 인록과는 차이가 없다. 다만 전면에 '어필(御筆)', '은인(銀印)'이라는 글자가 있어 다른 인록과는 구분된다. 

유세손서는 영조가 정조에게 은인을 내릴때 함께 내린 유서로서 정조의 효성이 만세에 전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후계자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다. 이를 보관하는 원통형의 함의 외부에도 '어제유서(御製諭書)'라는 글자가 있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국왕의 즉위, 면복"


[왕의 초상, 어진]

왕의 초상화인 어진은 선대왕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그들의 보살핌을 받아 왕실이 번창하고 나라 전체가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렸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대부터 순종 대까지 꾸준히 어진을 제작하여 진전眞殿에 봉안하였다. 어진은 국왕이 살아계실 때 그 모습을 직접 그리거나[도사圖寫], 국왕이 돌아가신 뒤에 그리기도 [추사追寫] 했다. 또한 어진이 낡아 훼손되거나 새로 지은 진전에 어진을 모실 때에는 이미 있던 원본을 따라 그리기도[모사模寫] 했다. 

당대 최고의 궁중화원들이 그린 어진은 임금을 직접 모시듯 최고의 예를 갖추어 진전에 봉안하였으며, 배경에는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을 두었다.

태조어진(복제)/순종어진(복원모사)


[임금님의 글씨, 어필각석(御筆刻石)]

각석은 문자나 그림을 돌에 새긴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왕, 문장가, 명필가의 글과 글씨를 각석으로 만들어 길이 전해지도록 했다. 특히 왕의 글과 글씨는 후대에 전할 본보기로서 귀하게 여겨졌고, 나무 판이나 돌에 모각하여 종이에 찍어내거나 탁본하여 보관하기도 하였다. 

임금의 글씨를 새긴어필각석御筆刻石은 시와 편지글, 훈제의 글, 유명한 문구 등 왕실의 문예를 보여주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원본을 보존하여 왕의 글과 글씨가 영원히 전하길 바라는마음을 담고 있다.


[태조대왕 어필각석(太祖大王 御筆刻石)]

태조가 딸인 숙신옹주(淑愼翁主) 위해서 집을 지어주고, 소유권을 확정하기 위해서 만든 문서를 돌에 새긴 어필각석이다. 정확한 명칭은 숙신옹주가대사급성문(淑愼翁主家垈賜給成文)이다

이 각석에는 1401년(태종 1) 태조의 나이 67세에 태어난 딸에게 집을 지어주며 자손 대대로 거주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건축과정, 규모 등이 적혀있다. 

태조의 자필인 이 각석의 원본(原本)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영조 어필각석"

爲善(위선, 착한 일을 하라)


[보물 조선왕조의궤(2016-7), (2016-8) (朝鮮王朝儀軌 (2016-7), (2016-8)) Joseon wangjo uigwe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지정사유

의궤(儀軌)란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이라는 뜻으로 ‘국가전례의 따라야할 기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조선왕조의궤(朝鮮王朝儀軌)〉는 조선왕실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 내용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대표적인 국가기록물이다. 또한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조선만의 독특한 전통으로서 예법을 중시하고 기록을 철저히 보존하려는 조선시대의 우수한 기록문화 중 하나로서 국가지정문화재의 가치가 충분하다. 

*내용(연혁,유래,전설)

〈조선왕조의궤〉는 태조 때 최초로 편찬하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나 조선전기 의궤들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한 것이다.

〈조선왕조의궤〉는 제작 방식에 따라 필사본과 활자본으로 구분할 수 있고, 열람자에 따라 어람용(御覽用)과 분상용(分上用)으로 나누어진다. 

〈조선왕조의궤〉에 기록된 주요 행사는 왕실의 혼인을 비롯하여 왕과 왕세자의 책봉, 왕실의 장례, 제사, 궁중 잔치, 활쏘기, 태(胎)의 봉안, 국왕의 행차, 궁궐 건축, 친농(親農)⋅친잠(親蠶) 행사, 사신의 영접 등 국가나 왕실 행사 전반에 관한 것으로 행사의 과정을 날짜에 따라 기록한 각종 공문서를 비롯하여 업무의 분담, 담당자의 명단, 동원된 인원, 소요된 물품, 경비의 지출, 유공자 포상 등에 관한 것들이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행사의 가장 중요한 행렬은 반차도(班次圖)를 통해 표현했다. 

출처:문화재청


[국조보감(國朝寶鑑)]

종묘의 각 신실에 봉안하기 위하여 1909년(순종3)에 제작한 국조보감이다. 

국조보감은 조선시대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모범이 될 만한 일을 모아 해당 왕별로 편찬한 책이다.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역대 왕의 공적을 기술하는데 목적이 있어 후대 왕이 이 책을 보고 훌륭한 정치를 펴는데 참고하도록 하였다. 

국조보감은 후대 왕에게 전하여 선대왕의 업적을 통해 배우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역사서로서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임금의 서문, 편찬 신하의 글과 발문 등을 체계적으로 갖추고, 실제 임금께 진상하고 관청에 보관하면서 읽도록 하였다. 

국조보감은 세조대에 처음 편찬되었고 정조대에 이르러 비로소 그 체제가 확고해졌는데, 이를 종묘에 봉안하는 제도는 정조대에 시작되었다. 종묘에 올리는 국조보감은 일반적인 국조보감과는 그 체제는 같으나 형태가 다르다. 

종묘 봉안용 국조보감은 일반적인 국조보감이 종이 표지로 장황한 것과는 다르게 비단으로 표지를 장황하고 편철을 갖추었다. 또한 의례에 따라 격식을 갖추어 책을 싸서 함에 봉안한 뒤, 가마로 옮겨져 종묘의 각 왕대 별 신주를 모신 신실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1909년 순종은 헌종·철종 두 임금의 국조보감을 새로 만들 것을 명하고, 황제로 추존하면서 기존의 내용을 수정하여 태조부터 철종까지 국조보감을 완성하여 종묘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선원록(璿源錄)]

1681년에 편찬된 왕실 족보로 왕의 친인척에 관한 인적사항을 조사하여 기록한 책이다. 

태종 이전의 조선 왕실 족보에는 조선왕실의 시조 이한(李翰)을 비롯하여 이원계(李元桂), 이화(李和) 등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제들도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종은 자신의 사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왕위계승 분쟁을 우려하여 1412년에 왕실 족보를 『선원록(璿源錄)』, 『종친록(宗親錄)』, 『유부록(類附錄)』의 세 가지로 분할하여 작성할 것을 명하였다.

 『선원록』에는 시조인 이한부터 태종 자신까지의 직계만을 수록하고, 『종친록』에는 왕의 아들 중에서도 적자를 대상으로 하여 태조 이성계와 자신의 아들만을, 『유부록』에는 딸과 서얼을 수록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개국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제들은 왕위계승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태종의 후손만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기틀을 마련하여 조선왕실의 정착과 안정을 꾀하였다. 

이 선원록은 남색능화무늬비단으로 표지를 장책(粧冊)하고 붉은색 끈으로 장정하였으며, 붉은색 테두리의 흰색 비단으로 제첨(題簽)하였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국보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朝鮮王朝實錄 五臺山史庫本)]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일어난 순서대로 기록한 책이다. 이 중 오대산사고본(五臺山史庫本)은 1606년(선조 39)경 설치된 오대산사고에 보관된 실록이다.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나머지 실록들이 모두 소실되자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4부를 재간행했다. 그리고 강화·태백산·묘향산·오대산 등지에 사고를 새로 건축하여 서울의 춘추관사고와 함께 5곳의 사고에 실록을 보관하였다.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경에 일제에 의해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는 방식으로 반출되었고,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화를 면한 오대산사고본 실록 74책 중 27책은 1932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을 거쳐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나머지 일본에 남아있던 47책도 2006년에 환수되어 서울대학교를 거쳐 27책과 함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후 추가로 효종실록 1책이 환수(2018)되면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총 75책의 오대산사고본이 소장되어 있다. 이들은 성종, 중종, 성조, 효종연간의 실록이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국보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朝鮮王朝實錄 五臺山史庫本) Joseon wangjo sillok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조선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 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로 기록한 책이다.

오대산사고는 1606년(선조 39) 경에 설치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나머지 실록들이 모두 소실되자 조선정부는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4부를 재간행했다. 그리고 강화·태백산·묘향산·오대산 등지에 사고를 새로 건축하여 서울의 춘추관사고와 함께 5곳의 사고에 실록을 보관하였다. 당시 실록을 재간행할 때 4부 중 3부는 정본(正本)으로 인쇄했지만, 전란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나머지 1부는 정본 인쇄를 하지 못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최종 교정쇄본을 장정(裝幀)하여 정본을 대신하도록 했는데, 이 교정쇄본이 오대산사고에 보관되었다. 따라서 오대산사고본 실록 중 태조~명종실록은 교정쇄본이고 이후에 소장된 선조~철종실록은 정본이다.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경에 일제에 의해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는 방식으로 반출되었고,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화를 면한 오대산사고본 실록 중 27책이 1932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오대산사고본실록 27책이 1973년 국보로 지정된 후 일본에 남아있던 오대산사고본실록 47책(2007. 2. 26. 국보 추가지정)이 2006년에 환수되었고, 1책(2019. 6. 26. 국보 추가지정)이 2018년 환수되어 총 75책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영문 설명]

Joseon Wangjo Sillok comprises of 1,893 books and 888 volumes covering 472 years (1392-1863) of the history of the Joseon Dynasty in a chronological order, from the reign of King Taejo, the founder, to the end of the reign of King Cheoljong.

The contents of these annals are encyclopedic, including general state affairs, economy, culture and politics. They are also highly reliable records with historic authenticity and credibility. Historiographers were legally guaranteed independence in their record keeping and the right to keep secrets. After a king's death and the coronation of his successor, professional officials were appointed to write the annals of his reign at the Sillokcheong, the Office for Annals Compilation. Nobody was allowed to read the sacho, or draft history, not even the king. Once the annals were compiled in multiple copies, each copy was stored in special archives. Up until the early 20th century, most of the copies stored at archives in Taebaeksan Mountain, Jeongjoksan Mountain, Jeoksangsan Mountain and Odaesan Mountain survived, even after the massive destruction by the Japanese Invasion (1592-1598) and the Qing Invasion (1636-1637). The Odaesan Edition consists of 27 volumes. Annals covering the period from the reigns of King Taejo to King Myeongjong are one of the four copies transcribed from the Jeonju Archive's edition from July in the 36th year of King Seonjo (1603) to March of the 39th year (1606). Then, newly compiled annals were continuously updated till the Annals of King Cheoljong was published in the second year of King Gojong (1865). From the 39th year of King Seonjo (1606) to 1910, they continued to be preserved at the Odaesan Mountain archive.

The copies were taken to Tokyo University, Japan during the Japanese Imperial Regime to be mostly lost amid the Kanto Earthquake in 1923. Among them, 30 volumes are preserved at the University of Tokyo, and only 27 volumes were moved to Gyeongseong Imperial University.

출처:문화재청


[태백산사고 실록각 현판(太白山史庫實錄閣懸板)]

조선朝鮮 1897년(고종 34)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건물인 실록각의 현판이다. 뒷면에 새겨진 “봉화군수 고영철 삼가 쓰다. 건양 2년(정유년, 1897) 4월[行奉化郡守臣高永喆謹書建陽二年丁酉四月]”이라는 내용을 통해, 경북 봉화 태백산에서 사용 현판임을 알 수 있다.


[왕실도서관 내부 모습]

조선시대 왕실 도서의 수집과 정리를 위한 가장 대표적인 기관은 규장각이다. 정조에 의해 규장각의 제도가 완성되었을 때는 국내 서적 약 1만여 점, 중국 서적 약 2만여 점 등 약 3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었다. 부속으로 봉모당·서고·열고관 등을 두고 봉모당에는 역대 임금의 글과
그림을 서고에는 국내 서적을 보관하였고 열고관에는 중국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였다.

정조 이후 기능이 축소되었으나 고종 대에는 약 4만여 점을 소장한 도서관으로서 서양 문물 관련 자료를 수집 · 연구하였다. 1908년에 규장각을 비롯한 여러 기관의 소장도서 10만여 점은 '제실도서(帝室圖書帝室圖書)'로 통합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규장각이 해체되면서 조선왕실의 도서들은 조선총독부가 관리하였다. 1928년에 규장각 도서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로 넘어가게 되었다.


[규장각 현판(奎章閣)]

왕실 도서관이면서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한 관서로 창덕궁 규장각에 걸었던 현판이다.

1694년(숙종 20) 여러 임금의 어제(御製)·어서(御書)를 봉안하기 위해 별도로 종부시(宗簿侍) 내에 작은 건물을 만들고 숙종이 쓴 이 현판을 걸었다가, 1776년(정조 1) 창덕궁 후원에 새롭게 규장각 건물을 만들고 숙종 어필 현판을 옮겨 걸었다. 

규장각은 정조대 문화의 꽃을 피운 핵심기관이었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신현 시권(申詢御考試券)]

조선朝鮮, 1807년(순조 7)

조선후기의 문신인 신현申(1764~1827)이 순조7년(1807) 응제(임금의 특명으로 치른 시험)에서 작성한 답안지이다. 임금이 검토했다는 뜻으로 '어고(御考)'라고 쓴 종이를 붙였고, 하단에는 응시자의 이름을 감추기 위해 종이를 묶었던 흔적이 있다. 붉은 글씨로 쓴 '삼하(三下)' 는 신현이 받은 점수이다.


[강서 시권(講書試券)]

조선朝鮮

3년에 한 번 행해진 문과 시험 과정 중 구술시험의 결과를 적은 시험지이다. 응시자는 유교 기본 경전 중 7개 경서의 본문구절을 뽑아 외우고풀이하였다. 각과목 아래 점수가 적혀 있는데 이 시험지의 응시자는 모든 과목에서 '通통'을 받았다. 점수는 通통, 略약, 粗조, 不불 순으로 매겨졌다. 한과목이라도 不을 받으면 낙제했다.


[조선시대 신하의 초상화]

조선시대에는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 민본정치의 구현을 위해 왕과 신하가 의견을 나누고 정책을 결정하였다. 신하는 왕의 통치를 돕고 민의를 전하여 선정이 베풀어지도록 보좌하는 중요한 존재였다. 왕은 그들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포상을 했다. 특히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신하를 공신으로 임명하였고, 초상을 제작하였다. 

사모단령(紗帽團領) 차림으로 의자에 앉은 전신상 형태의 공신 초상화는 왕이 신하에게 베푸는 큰 예우 가운데 하나였다. 공신 외에 일반 관료의 초상은 국가 행사가 있을 때 제작하거나, 왕이신하의 초상을 그리도록 명하는 경우가 있었다. 관료초상은 대체로 흉배가 달린 녹포袍 또는 흉배가 없는 분홍색 시복을 착용한 모습이며 전신상, 반신상 등 형태가 다양하다. 왕은 관료 초상을 열람하며 신하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고 사람들이 이들의 충심을 본받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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