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2023. 3. 23. 05:34바롱이의 쪽지/충청남도

반응형

"어버이의 뜻을 받든 비석"

[국보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奉先)’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安宗)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顯宗)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비석만이 남아 있다.

갈비(碣碑)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거북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비몸돌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절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던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글씨를 썼다.

출처:문화재청

봉선 홍경사 갈기비는 절터 한쪽의 좁은 비각 안에 갇혀 있다.


[국보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당대의 대학자 최충(崔沖, 984~1068)이 짓고 고려조 해서체의 제일인자인 백현례가 쓴 비문에 새겨 있기를 봉선 홍경사는 고려 초 8대 현종(992~1031) 때에 세운 대찰이다. 한데 수도인 개경 근방도 아니고, 선종 사찰로서의 심산오지도 아닌, 역원이나 있어야 할 길목에 절집이 있는 것이 이상스럽다. 비신에 적혀 있는바, 그 내력은 이러하다.

당시 성환 일대는 삼남에서 한양이나 개경에 가려면 반드시 지나가게 되는 길목이었다. 그런데 갈대가 무성하여 도적이 들끓었으니 행인들이 이곳을 지나기를 심히 두려워하였다. 현종의 아버지는 본래 태조 왕건의 여덟째 아들로 뒤에 안종으로 추대된 사람인데, 평소에 불법을 숭앙하고 법화경을 받들며 절을 이루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현종이 왕위에 올라 생부의 유지를 받들어 이곳에 절을 지을 뜻으로 현종 7년에 착공하여 5년 만인 12년에 200여 칸의 큰 절을 완공하였다. 절 이름을 봉선 홍경사라고 하였는데 ‘봉선’이란 ‘선친의 유지를 받든다’는 뜻이다. 아울러 절 서쪽에 80칸짜리 광련통화원(廣緣通化院)이란 큰 객관을 지어 행인들이 두루 편리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봉선 홍경사는 고려 제8대 임금인 현종 12년(1021)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고, 천년이 가까운 오늘날까지 그 자리를 의연히 지키고 있는 사적비도 그 5년 뒤인 1026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의 학자 이규보가 편찬한 『동문선』에서는 이 봉선 홍경사가 설립되었을 무렵에 관해 “200여 칸의 당우에 여러 공덕상을 그리고 봉선 홍경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마치 도솔천과 같이 신비롭고, 종과 탑이 있었다. 장엄하기가 이를 데 없어 등이 1,000개나 이어져 켜져 있었다”고 적었으니 당대로서는 어마어마한 절이었던 모양이다.

비갈이 있는 전각 주변에는 당시 절집의 탑이었을 석재들이 깨어져 흩어져 있어 옛 모습이 간 데 없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국보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성환읍 못미처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에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숲이 있고 그 사이에 비각이 하나 있다. 안을 들여다보면 험상궂게 생긴 거북 한 마리가 등에 비석을 짊어진 채 고개를 외로 틀고 노려보고 있다.

비문은 당대의 대학자 최충(崔沖, 984~1068)이 짓고 고려조 해서체의 제일인자인 백현례가 썼다.

이 비가 특이한 것은 먼저 ‘비갈’이라는 이름에서이다. ‘비’란 뒷장에 따로 쓴 설명에도 나와 있듯이 돌이나 나무 따위에 글을 새겨 역사적 사실을 남기는 것을 통틀어 말한다. 그런데 비신이 네모지지 않고 끝이 둥근 것을 ‘갈’이라 하여 형식으로 구분하였으나 후대에는 구분 없이 붙였다. 이 비는 끝이 둥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갈’이라는 말이 굳이 붙을 까닭이 없는데도 붙어 있다.

또 하나는 비신을 받친 거북의 머리가 오른쪽으로 90도 돌아가 있는 점이다. 그리하여 다른 형식적인 거북들과는 달리 한눈에도 매우 활기차 보이며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머리모양도 물고기 같은 지느러미를 달아 용머리 모양으로 한껏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가 하면 거북 등 위에 한편으로는 거북을 덮고 한편으로는 비신을 받친 우아한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비신의 옆면에도 섬세한 당초문이 조각되어 용두의 우악스러움을 보완한다. 비신 위의 이수에는 귀부에 견주어서는 다소 도식적인 운룡문이 조각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모자를 쓴 듯한 산형(山形)을 이루고 있다. 전체 높이 2.8m의 장대한 이 비는 형태적인 완결성으로 말미암아 사적비로서는 대표될 만하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비신에 새긴 글은 당대의 유학자 최충이 지었으며 글씨는 백현례가 썼다. 글씨의 크기 하나하나가 3㎝의 해서로 짜임새가 엄정하다.


"국보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국보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국보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