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

2022. 11. 16. 05:09바롱이의 쪽지/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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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

서산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은 국보 제 228호로 지정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든 고려말 천문학자인 서산출신 『금헌 류방택』선생의 업적과 과학정신을 계승하고 우주과학의 꿈과 희망을 심는 체험중심의 교육장소로 육성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습니다.

주ㆍ보조관측실을 통해 천체를 직접 관측하고 천체투영실에서는 특수효과를 준 입체영상과 함께 가상의 별자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전시물과 각종 행사를 통하여 천문ㆍ기상 과학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출처:서산시청


"서산 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 실물 복원"

직육면체의 돌에 천체의 형상을 새겨 놓은 것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권근, 유방택 등 11명의 천문학자들에게 명을 내려 만들도록 한 것이다.

고구려의 천문도를 표본으로 삼아 그 오차를 고쳐 완성하였는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 내용을 배치하고 있다. 윗부분에는 짧은 설명과 함께 별자리그림이 새겨져 있고, 아래부분에는 천문도의 이름, 작성 배경과 과정, 만든 사람의 이름 및 만든 때가 적혀 있다.

별자리 그림에는 중심에 북극을 두고 태양이 지나는 길인 황도(黃道)와 남북극 가운데로 적도(赤道)를 나타내었다. 또한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이 총망라되어, 황도 부근의 하늘을 12등분한 후 1,467개의 별들을 점으로 표시하였다. 이 그림을 통해 해, 달, 5행성(수성, 금성, 토성, 화성, 목성)의 움직임을 알 수 있고, 그 위치에 따라 절기를 구분할 수도 있다.

태조 4년(1395)에 제작된 이 석각천문도는 중국 남송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지금은 표면이 심하게 깎여나가서 알아보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고구려 천문도의 원형을 짐작케 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출처:문화재청


"1만원권에 담긴 천문학"


"일식과 월식"


"천문우주과학이란?"


"하늘에서 떨어진 돌, 운석"


"인공위성"


"별의 일생"


"우주, 어디까지 가봤니?"


"하늘에 대한 과학 청동기 시대"


"하늘에 대한 과학 삼국시대"


"하늘에 대한 과학 고려시대, 조선시대"


"혼천의, 우암 혼천의"


"일정정시의, 간의, 풍기대"


"측우기와 선화당측우대"


"수표"


"천체 망원경의 구조와 원리"


"천체관측실 가는 길"


"류방택 사료관"


"하늘을 궁리하다"

[류방택 선생의 생애와 사상, 천문활동]

류방택 선생은 그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은 고려 말의 대 선비이다. 그의 절개는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게 하였으나 서산지역을 중심으로 곳곳에 남겨진 그의 자취들은 오히려 그의 숨은 절개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류방택 선생의 자(字)는 태보(甫), 호(號)는 금헌(軒)이다. 본관은 서주인(瑞州 : 현재의 서산·서령)으로 서령부원군 류성간(柳成間)의 6대손이다. 서산지역에 있는 인지면 애정리 구치산 아래 양리촌(村)에서 출생한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덕이 있으며 효도와 우애가 자극하였을 뿐 아니라 학문에 대진(大振)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특히 주역의 이치와 천체의 운행을 밝게 통달하여 세상 사람이 큰 선비로 칭송하였다. 1361년(공민왕 10)겨울에 홍건적이 개성에 침입하여 국가가 혼란에 빠지므로 선생이 그 동안 연구했던 자료를 토대로 역서(曆書)를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티끌만큼도 오차가 없으므로 선생의 명성이 당세에 높았다.

이태조가 등극하자 당시의 역사는 천체의 운행을 맞추지 못하고 중성(中星)의 도수에 오차가 있으므로 이를 근심 하였다. 또한 고구려 천문도의 인본을 구하였는데 시대가 많이 지났으므로 이를 추산하도록 서운관에 명하였는데 서운관에서는 류방택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하자 여러 번 선생을 불렀으나 도비산에 숨어 나오지 않다가 부득이 상경하여 역사를 새로 만들고 별자리 운행을 관측하여 인본에 있는 별들을 모두 추산하였다. 류방택 선생이 추산하고 권근(權近)의 11명과 함께 천문도를 석각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국보 제228호로 지정된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그 공로로 이태조는 선생께 개국 1등 공신 녹권(錄券)을 내렸으나 굳게 이를 사양하고 송도 취령산(鷲嶺山)밑 김포고을에 자취를 감춘 뒤 산정(山頂)에 단(壇)을 만들고 날마다 고려의 옛 도읍지 송도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니 그 때 나이 75세였다. 그 때 한탄하여 읊은 술회시(述懷詩)에 ‘소나무를 위로하며 심히 사랑함은 서리발에 나무가 추울까 걱정되기 때문이요 기죽(竹)을 한마음으로 가련타 사모함은 눈 쌓인 가지가 늘어지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으니 선생의 충절을 가히 추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후 1399년(정종1)에 동학사에 들어가 정포은(圃隱), 이목(李牧) 두 선생을 초혼(魂)하여 제사를 지내고 개성을 바라보며 옛 임금의 한을 달래며 일생을 마치니 그 때 나이 83세 이었다. 죽기 전에 유언하기를 "나는 고려인이므로 내 묘에 봉분을 짓지 말고 일체의 석물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자식들에게는 새 임금을 섬겨라" 하였다. 이는 선생의 고려에 대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정을 밝히는 대목이다. 태종4년에 정숙공(靖公)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1621년(광해군 13)에 동학사의 삼은(三隱:鄭夢周(정몽주), 이색, 길재)다음에 배향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태조는 선생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서 예산 땅 연봉장(현재 예산읍 궁평리)까지 내려와 선생을 맞이했다고 하며, 이 때 이태조는 마땅히 고려조의 신하로서 선생을 주빈지례(主賓之禮)로 영접했어야 했는데 군신지례(君臣之禮)로 영접했기 때문에 태조가 실례를 했다고 해서 예산에 있는 신례원(新禮院)이 본래 잃을 실(失)자 실례원이라 호칭하였다고 한다. 류방택 선생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이래로 한국인의 천문관과 우주이해도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동양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우리의 독자적 천문도(14세기)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우리민족문화 100대 상징물로 선정되었으며 만원권 배면 바탕 그림에 삽입되어 있다.


"하늘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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