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과 금봉이의 사랑과 이별, 박달재

2023. 5. 31. 07:00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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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과 금봉이의 사랑과 이별"

[박달재]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대중가요로 전국에 널리 알려진 박달재는 조선 중기 박달과 금봉의 슬픈 사랑이야기로도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예전에는 충주와 연결된 유일한 길이어서 통행량이 많았으나, 현재는 통행의 편의성이 좋아져 예전만큼 교통량이 많지 않습니다. 굽이굽이 굽어있는 이 고개는 돌아가는 묘미가 있는 것인지, 최근에는 새로운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을 받고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박달, 금봉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를 거름삼아 다른 사랑이 돋아나는 길이라고 한다나요?

특히 최근에는 박달과 금봉의 한풀이를 위해 조성한 박달재목각공원 및 목각전시체험장 등 나무의 낭만까지 느껴보실 수 있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박달재는 천등산뿐만 아니라 인근에 인등산과 지등산도 함께 있어 天, 地, 人이 모두 갖추어진 유일한 곳으로, 아득한 옛날 우리민족의 시원과 함께 하늘에 천제를 올리던 성스러운 곳입니다. 언어학적으로도 박달은 순수한 우리말로 한자 자체가 가진 의미는 없으며, 박은 밝다, 크다, 하얗다, 높다, 성스럽다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만큼 민족의 역사성을 높다랗던 재에 담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자동차를 이용하여 10여 분만에 재를 넘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박달재와 다릿재를 넘으려면 걸어서 며칠이 걸렸다고 합니다. 또한 고갯길이 워낙 험하고 가파른 데다 박달나무가 우거져 있어 호랑이 같은 산짐승들이 불시에 튀어나오는 것은 물론 행인을 노리는 도둑이 많아 이곳을 넘는 새색시는 두 번 다시 친정에 가기 어려웠다고도 하는 슬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친정이 그리워도 다시는 갈 수 없는 슬픔에 시집가는 새색시가 눈물을 쏟는다고 해서 '울고 넘는 박달재'라고 불륀다고 하네요. 

출처:제천시

전망대에서 바라본 박달재 전경


"모정 입구 박달재 관문"


[탄생의 터]

박달재는 시랑산 줄기로 시랑산을 해석하면 사내를 모시는 산이란 뜻으로 박달재에 사내를 상징하는 목 조각품이 많은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맞은편 경은사 아래 개울가에 커다란 도덕암이라는 바위가 놓여있는데 조선 태조 때 제천현감이 새로 부임하게 되어 철주목을 떠나 박달재에 다다랐을때 한 무리의 도둑떼를 만나 하인과 뒤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뿔뿔이 도망치고 만삭의 현감부인은 겁에 질려 이 바위까지 도망 오게 되었는데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어 도둑에게 잡혀 욕을 보느니 차라리 개울에 뛰어내려야 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날리려는데 갑자기 진통이 오면서 아이를 분만하게 되었다. 뒤쫓아 오던 도둑이 이 광경을 바라보며 어찌할 빠를 몰랐고 사내아이를 분만한 현감부인은 곧 숨을 거두었으며 도둑은 이 아이를 안아들고 자신의 소행을 뉘우치며 어디론가 사라져 자기의 죄를 속죄하며 그 아이를 자식삼아 길렀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도덕암 또는 도둑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도덕암을 중심으로 만삭의 산모가 분만하는 형상의 산세는 자연의 경이로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경은사와 도덕암"


"목굴암"


[목굴암]

이 작품은 나무에 굴을 파고 그 안에 아미타불을 조각한 작품이다. 작품의 소재인 고목은 충주에서 발견한 고사목을 이용한 것으로 이 나무를 가져온 작가는 박달재에 얽힌 박달이와 금봉이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그들의 영혼이 부처의 힘으로 천년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목굴암 꼭대기에는 가지를 깎아 안은 연꽃이 있는데 이 연꽃은 진흙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처럼 박달이와 금봉이의 영혼이 극락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작품을 제작하기 위에 작가는 나무의 비어있는 속을 깎아 넓혀 작업공간을 안들었다 그 다음 을퉁불퉁한 내부표면을 다듬어 두깨가 일정하도록 하였으며 아미타불을 조각한 후 금을 입혀 마무리 하였다.

완성된 목굴암은 내부 폭이 좁아 한 번에 한명 씩 밖에 들어갈 수 없다. 어것은 이 작품을 찾는 이들이 흘로 작품을 감상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자각하고 나아가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고목 사이로 보이는 아미타불


"오백나한전"


"목굴암 옆 불상"


"박달재 조형물"

겨울 - 천년의 사랑/가을 - 굳은 약속/봄 - 박달연가,여름 - 금봉연가


"사랑과 이별"

[박달재에 얽힌 전설]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 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 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아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 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 새 가까워졌고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게 되었다. 밤마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 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결국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보내고는 날마다 서낭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자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출처:제천시


"박달과 금봉상"


[박달과 금봉이 가묘]

박달이와 금봉이의 시신은 없지만 그들의 넋을 기리고 애틋한 사랑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가묘를 만들어 놓았다.


"한국의 명수 100선 박달령 옹달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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