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근현대사의 증인, 영도대교

2023. 8. 26. 06:51바롱이의 쪽지/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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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연육교"

[부산광역시 기념물 영도대교 (影島大橋)]

영도와 부산을 잇는 연육교인 영도대교는 1932년 3월에 착공하여 1934년 11월에 개통된 길이 214.7m, 폭 18.3m의 우리나라 최초의 연육교이다. 하루 총 6회씩 도개하여 부산의 명물로 자리하였고 1966년 9월 증가하는 차량 통행으로 인하여 도개 기능이 멈추게 되었으나, 2013년 11월 27일에 기존 4차선을 6차선으로 복원․개통하여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도개를 하고 있으며, 부산의 명소로 옛 명성을 다시 찾고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부산시민과 애환을 함께 해 온 영도대교는 8.15해방과 6.25전쟁 이후 생활고에 지친 피난민들이 애환과 망향의 슬픔을 달랬었던 장소였다. 전쟁 당시 영도대교에 가면 친인척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영도대교 인근은 피난민으로 가득 메웠고, 이들의 사연을 듣고 상담하는 점집들이 성업하는 등 우리나라 근대사와 함께 해온 구조물인 동시에 근대 부산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다리이다.

영도대교의 건설은 부산항 물류장 확충과 간선도로의 개설과 함께 근대 부산의도시발달에서 중요한 사업이었다. 특히 영도는 영도대교의 건설로 인하여 부산 도심과 육로로 연결되고 전차가 개통되는 등 도시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영도구의 도시 발달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영도대교는 교량 뿐 아니라 영도대교를 구성하는 건축물들도 건축적인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교대의 경우 정교하게 다듬어진 화강석으로 바른 층 쌓기를 하여 교대를 형성하고 모서리 돌은 직사각형 화강석으로 모접기 등을 하는 등 정교한 디테일을 갖고 있다. 아울러 교대 좌우측의 화강석 계단, 교량 입구의 교문주와 난간 등은 영도대교의 구성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교량 입구 광장인 다리목광장은 영도대교의 얼굴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근대 교량의 형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영도대교는 현재 우리나라에 잔존하는 유일한 단엽식 도개교(bascule bridge)로 희소가치가 매우 높은 교량이다. 또한 일반적인 도개교와는 달리 안벽부에 도개장치를 설치하고 있는 등 도개교량의 형식에서도 특이성이 인정되는 등 한국 교량사(토목)에 있어서도 유례가 없어 근대 교량사를 연구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교량으로 그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 

출처:문화재청


"한국 최초의 도개교, 부산 영도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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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대교]

영도대교(影島大橋, YEONGDO BRIDGE)는 1934년 11월 23일 개통되었다. 다리 전체 길이는 214.63m, 폭은 18m, 도개부 길이는 31.3m, 폭 18m였다. 개통 당시에는 부산대교라고 불렀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영도와 부산이 찻길과 전차길로 연결되었다. 영도대교는 부산 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이름난 장소였다. 한국전쟁 때에는 부산으로 피난온 실향민들이 잃어버린 혈육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이용하면서 전쟁의 아픔과 만남의 장소라는 이미지가 겹쳐졌다.

1980년 1월 30일 새로운 교량이 건설되자 거기를 부산대교라고 부르면서 그때부터 영도대교라고 바꾸어 불렀다. 2006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교량의 노후화와 교통량의 증가로 철거하고 2013년 11월 27일 예전과 같은 도개교로 복원 개통하였다. 새로운 영도대교는 길이 214.63m, 폭 25.3m이며, 도개부 길이 31.3m이다. 도개부의 무게는 590톤이며 4분 30여초에 58도로 도개한다.


"영도대교 현판"


"영도다리에서 본 전경"


[애환과 희망을 담은 유라리 광장]

세월이 흐르면서 상처가 아물 듯 2013년 영도대교가 다시 도개를 시작하면서 점바치 골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상징적인 만남의 장소였던 점바치 골목의 자리에는 또 다른 만남의 장소인 유라리 광장이 들어섰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영도대교의 도개 행사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70여 년 전 슬픔과 애환이 가득했던 이곳은 오늘날 웃음과 희망이 가득한 장소로 변화했다. 그 속에서 영도대교는 여전히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그 자리에 우뚝 서있다.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

영도다리는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기약 없이 헤어진 가족들과의 만남을 꿈꾸는 간절한 소망의 공간이자 전쟁의 아픔, 끝끝내 상봉하지 못한 슬픔과 애환 등이 담겨있는 장소이다.

전쟁통에 헤어진 사람들이 반드시 만나자고 눈물로 약속하며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았던 곳이 영도 다리였다.

피란민들은 포화를 뚫고 살아남아 땅 끝 부산에서 가족 친지들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어디 가면 찾을 수 있을까예?

헤어진 가족의 이름을 적은 종이나 헌 옷을 영도다리 난간에 빽빽하게 붙였고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은 점집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쟁 통에 헤어진 가족들의 생사를 묻는 피란민들의 애타는 그리움이 영도 점바치 골목을 번창시켰다.

너도나도 모여들어 가족 친지들의 생사여부를 묻고 점쟁이들은 그들의 애환을 들어주었다. 당시 목조가옥 형태의 점집이 80여곳에 도달했고 돗자리 형태의 점집까지 포함하면 120여곳에 이르렀다.

부산근현대사의 증인, 영도대교

영도대교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험난했던 역사의 한 장면이 그대로 스며있다. 영도대교는 일본의 식민지 수탈과 대륙침략 기지화가 진행되면서 탄생했다.

다리 상판을 들어 올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도개교(跳開橋)로서 그 신기한 광경 때문에 부산의 명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명물 중 명물이었으니 영도 다리는 6·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만남의 광장이 되었다.

전쟁 후 산업화가 진전되는 시기엔 수많은 선원과 노동자들이 뭍에서 섬으로 섬에서 뭍으로 일거리를 찾거나 일터로 가기 위해 하루 수십 번씩 왕래를 하였던 다리이기도 했다.


"영도대교와 유라리광장 동상"


"유라리광장 동상"


"영도대교 도개행사"


"꼭 다시 만나자"

[눈물로 약속한 공간 영도대교]

영도대교는 중구와 영도구를 연결하는 다리로, 일제 강점기에 지어졌다. 일제는 물자수탈의 기지 역할을 했던 부산항과 그 앞에 있던 섬 영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했다. 1934년, 부산 최초의 연륙교이자 도개교가 개통되던 날 영도대교 앞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구경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다리 상판 한쪽을 들어 올려 배가 지나다닐 수 있게 만든 영도대교는 영도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세 살 애기들도 다 아는 전국적인 명물이 되었다.

한국전쟁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부산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자 모여든 곳 또한 영도대교다. 피난민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던 부산의 명물 영도다리는 이별 후 재회를 위한 약속의 장소가 되었다. 헤어진 가족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이 누런 종이 위에, 찢어진 천 위에 새겨져 영도다리 난간을 빼곡히 채웠다. 누군가에게는 재회의 기쁨을, 누군가에게는 피맺힌 원망을 안겨주었을 영도대교. 살았는지 죽었는지 속 시원히 듣고 싶어 찾아간 점쟁이들이 그나마 피난민들에는 큰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은 사라져버린 영도다리 아래 점바치골목에는 그렇게 피난민들의 희망과 절망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전쟁의 아픔이 세월에 묻혀가던 1966년 영도대교는 도개를 중단했다. 노후된 다리는 더 이상 늘어나는 교통량을 견뎌낼 수 없었고, 바로 옆에 부산대교가 개통하면서 존치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영도다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시민의 노력으로 47년 만에 복원되었고 도개 역시 재개되었다.

피난민이 가족을 찾기 위해 몰려든 이 곳이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드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오후 2시가 가까워지면 신호가 울리고 차단막이 내려간다. 통행하던 모든 차량이 일제히 멈춰 서고 조금씩 천천히 영도다리가 올라간다. 15분 동안 진행되는 도개행사는 피난민의 아픔을 품었던 과거의 영도다리를 꼭 기억해 달라는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처럼 느껴진다.

언제 열렸냐는 듯 다리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통행은 재개된다. 거닐어 본 영도대교의 난간이 유독 눈에 밟힌다. 매일 다리 위를 서성거리며 보고팠던 얼굴을 애타게 찾던 사람은 간 곳 없고 무심한 바다 위로 파도만 일렁인다. 

만남의 기쁨과 헤어짐의 아픔을 간직한 영도다리를 건너 태종대로, 흰여울마을로 여행자의 발걸음은 계속된다.

출처:비짓부산


"오후 2시 영도대교 도개"


"오후 2시 영도대교 도개"


"오후 2시 영도대교 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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