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옥천 이지당

2023. 11. 4. 05:34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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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옥천 이지당 (沃川 二止堂) Ijidang hall, Okcheon]
 
「옥천 이지당」은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인 중봉 조헌이 16세기 말 옥천에 머물면서 빼어난 경치를 벗 삼아 유상하며 동네 이름을 따서 각신서당을 짓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것에서 비롯되며, 그의 사후 80여 년 뒤인 1674년 무렵에 김만균이 주도하여 왼쪽 누를 첨건하는 등 면모를 일신하고 송시열이 명칭을 이지당으로 지었음.

김만균과 송시열, 조헌은 옥천이라는 지연과 기호학파라는 학연으로 연결되어 있은데, 이러한 관계는 조헌 사후에 이지당이 정사(精舍)로 활용되고 유지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함.

이지당의 입지는 금강 상류의 한 지류인 서화천을 굽어보는 산비탈에 터를 잡아 앞으로는 너럭바위와 유유하게 흐르는 강이 펼쳐지고, 뒤로는 기암에 기대고 있어 사철 수려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임. 정사건축(精舍建築)의 성격에 누정(樓亭)이라는 성격을 불어넣은 복합건축으로 ‘ㄷ’자형 평면구성과 양 익랑을 중층의 누로 꾸민 건축유구로서 조선 후기의 소박하고 단아한 건축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음. 특히 본채 양쪽의 누는 이지당 영역의 외부공간을 한정하고 전방으로 펼쳐지는 수려한 경관을 감상하며 천인합일을 추구하는 유식공간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정사건축에 2층의 누를 덧붙여 지은 경우는 매우 드문 형태임. 

 
출처:문화재청


"보물 옥천 이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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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시 옥천 시내버스 터미널 발 이지당행 921번 버스에 승차한다. 13시 15분 각신리에 동네 할머님 한 분과 내린다. 버스는 안쪽 각신마을을 거쳐 되돌아 나와 옥천으로 향한다. 하루 운행 횟수가 적은 노선이다. 다음 버스가 오후 5시 옥천에서 출발한다. 

이지당 답사 후 버스 기사님이 알려주신 길로 걸어간다. 1.6km 거리다. 옥각교를 건너 대전발 607번 버스를 타고 옥천으로 향한다.


서화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으로 수질이 많이 개선된듯하다.


"서화천과 이지당"


"서화천과 이지당"


"서화천과 이지당"


"바위에 새겨진 이지당 암각"


[보물 옥천 이지당 (沃川 二止堂) Ijidang hall, Okcheon]
 
옥천 이지당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의병장인 조헌趙憲, 1544~1592이 뛰어난 경치를 벗 삼아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에,김만균金萬均, 1631~? 이 조헌의 업적을 기리고자 세운 건물이다.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를 되찾고 금산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목숨을 잃었다. 의병장이면서도 뛰어난 학자로서 이이의 학문을 계승·발전시켰다.
 
이지당은 조헌의 사후 80여 년 뒤인 1674년 무렵 김만균이 건립하였으며, 송시열이「시전詩傳」에 나오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1)라는 문구를 빌려 이지당이라 하였다. 그 후 광무 5년 1901에 옥천의 금琴·이李·조趙·안安씨 네 문중에서 보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이지당'이라는 현판은 송시열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또한 조헌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 문인들의 시판이 남아 있다. 이지당은 조헌 사후에 정사2)로 활용되어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으며 유지 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1칸이다. 몸채 좌측에 3칸, 우측에 2칸의 익랑翼廊3)을 연결한 '7' 모양 기와집으로 구성하여 조선 후기의 소박하고 단아한 건축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양 익랑을 중층의 누를 덧붙여 지은 경우는 매우 드문 형태여서 가치가 높다.

이지당은 금강 상류의 한 지류인 서화천을 굽어보는 산비탈에 터를 잡아 앞으로는 유유하게 흐르는 강이 펼쳐지고, 뒤로는 기암에 기대고 있어 사계절 수려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1) 고산앙지 경행행지: 산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고, 밝은 행실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2) 정사: 학문의 연구나 정신 수양을 위하여 세운 집.
3) 익랑: 문의 좌우편에 잇대서 지은 행랑.


"옥천 이지당"


각신서당, 이지당 현판과 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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