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N 선정 한국의 아름다운 50곳, 옥천 장령산 용암사

2023. 11. 5. 11:33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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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시내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군남초등학교에서 내려 걸어간다. 2000년도에 건립한 하삼리 석장승이 먼저 뜨내기 여행객을 반긴다.


상삼마을 벽화는 용암사 운무대에서 바라본 운무와 일출 전경를 그렸다.


용암사 오르는 길은 완만한 경사길로 오르다 절 부근에 이르면 경사가 가파르다. 거리가 멀지 않으나 오랜만에 오르막을 올라 숨도 가쁘고 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로 흐른다.


석축위로 용암사와 마애여래입상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용암사는 옥천읍 삼청리의 장령산 서북쪽 기슭에 자리잡았으며 법주사의 말사이다. 찻길에서 벗어나 절까지 가는 거리가 꽤 되고 또 절 바로 아래에 이르면 S자를 그리는 가파른 비탈길을 힘겹게 톺아 올라야 한다. 절은 산의 7부 능선 정도 되는 높이에 있는데 진입로가 승용차로 올라가기 무서울 만큼 가파르다. 이 길이라도 나기 전에는 무척 다니기 힘든 깊숙한 곳이었을 것이다.

용암사는 옥천군에서 가장 역사가 깊다. 신라 진흥왕 13년(552) 천축국에 갔다가 귀국한 의신조사가 이곳의 산세를 보고 감탄하여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의신조사는 신라의 고승이라고만 할 뿐 생몰년이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진흥왕 14년(553) 법주사를 창건할 때 서역에 구법여행을 하고 돌아온 의신조사가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와서 머물렀으므로 법보를 모셨다는 뜻에서 법주사로 부르게 되었다는 대목이 「속리산대법주사」 본말사기에 나온다. 전해오는 말대로라면 용암사가 법주사보다 1년 먼저 창건된 셈이지만 남아 있는 유물로 보면 통일신라 때 창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느티나무 옆 화엄경 문구가 적혀 있다.


땀이 흐르고 갈증도 나 공양간 아래 식수를 마신다. 시원하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 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절 부근에 용 모양을 한 바위가 있어서 용암사라고 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용바위를 부숴버렸다고 한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려는 아버지를 떠나 금강산으로 가다가 용암사에 들러 한동안 머물면서 용바위에 올라 서라벌이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하곤 했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지만 상당히 사세가 컸는데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그뒤 명맥만을 유지해오다가 근래에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중건되었다.

산기슭터를 닦아 이룬 절이라서 밑에서부터 올라가며 요사채가 있고 그보다 한 단 위에 대웅전 마당이 있다. 산신각이 있는 것은 다른 절들과 같지만 대웅전 왼쪽의 샘에 지붕을 이어 용왕각도 차려놓았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여래가 모셔졌고 탱화가 다섯 점 있는데 후불탱화의 화법이 정교하고 신중탱화는 고종 14년(1877)에 조성된 것이다.

대웅전 뒤쪽에 옥천이나 금산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뿔 모양 돌무더기 탑 한 기와 보광보살 등 보살과 부처의 명호를 새긴 돌기둥이 웅기중기 둘러선 작은 터가 있다. 절 건물이 지금처럼 크게 들어서기 전에 인근 사람들이 여기서 기도를 올렸던 모양이다. 그곳을 스쳐 조금 더 오르면 산신각, 더 위쪽에 마애불이 있다. 대웅전 오른편, 소나무들이 소슬한 바람을 일구고 이끼 낀 바위가 몇 개 흩어진 둔덕 위에는 고려시대의 석탑 두 기가 나란히 서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용암사 대웅전 뒤로 마애여래입상이 새겨진 바위가 살짝 보인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옥천 용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용암사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장령산에 있는 사찰로, 법주사의 말사(末寺)이다.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용암사라고 이름지었으나,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해 용바위가 파괴되어 현재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대웅전 안에는 불상과 5종의 탱화(幀畵)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 이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불상은 이전의 연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80년 불상을 열어 보았을 때 속에서 ‘순치 8년 신묘년(효종 2년, 1651)’에 만들어진 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이 불상이 조선 효종 2년(1651)에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졌으며, 다라니경에 인쇄된 내용으로 보아 경상도 문경의 오정사에서 만들어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옥천 용암사 동·서 삼층석탑]

 

용암사는 신라 진흥왕 13년(552) 때 의신(義信)이 세운 사찰이다. 이 석탑은 일반적인 가람배치와 달리 대웅전의 앞이 아니라 사방이 한 눈에 조망되는 북쪽 낮은 봉우리에 있다. 석탑이 사방의 조망권이 확보된 위치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르러 성행했던 산천비보(山川裨補)사상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천비보사상이란, 탑이나 건물을 건립해 산천의 쇠퇴한 기운을 북돋아준다는 것이다.

같은 모양의 석탑 2기는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자연암반 위에 건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층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동탑은 4.3m, 서탑은 4.1m로 규모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탑의 경우 2층과 3층 탑신의 몸돌이 결실되어 새로이 보충해 놓은 것이다.

각 부의 양식과 석재의 결구 수법에서 매우 간략화된 수법을 보이고 있는 이 탑은, 현재까지 확인된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석탑 중 유일하게 쌍탑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옥천 용암사 동·서 삼층석탑]

 

자연석 암반 위에 2층 기단을 쌓고 3층 탑신을 올린 일반형 석탑이며 보물 제1338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쪽에 있는 것이 4.3m, 서쪽에 있는 것이 4.1m로 규모가 비슷하고 형식은 같다. 1층 몸돌이 유난히 높고 지붕돌의 폭이 위쪽으로 올라가도 별로 줄어들지 않아서 높직하고 호리호리한 느낌을 준다.

기단 면석은 몇 장의 돌로 짜맞추었으며 1층에는 4장, 2층 기단에는 1장 또는 2장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갑석을 얹었다. 갑석이 매우 두툼한 편이며 2층 갑석 위에는 1층 몸돌을 받는 굄이 한 단 두드러져 있다. 다른 층에 비해 매우 높은 1층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이 얕게 새겨졌고 지붕돌 아랫면에는 층급받침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지붕돌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 복발, 보주가 모두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의 조성수법이나 지붕돌 층급받침 등 각 부의 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용암사는 신라 진흥왕 13년(552) 천축국에 갔다가 귀국한 의신대사가 이곳의 산세를 보고 감탄하여 지었다는 절이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후 근근이 명맥만 유지해오다가 근래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건하는 등 옛 사세를 되찾고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옥천 용암사 마애여래입상]


신라 진흥왕 13년(552)에 창건한 용암사에 있는 마애불로 방 모양으로 암벽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붉은 바위색이 퍽 인상적인 작품이다.

사찰에서는 마의태자상이라고 하는데 마의태자를 추모하였던 신라 도공의 후손이 염불하는 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미륵불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전한다.

발을 좌우로 벌리고 연꽃대좌 위에 서 있으며, 가늘고 긴 눈, 작은 입, 가는 코 등이 묘사된 얼굴에는 파격적인 미소에도 불구하고 도식화된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도식적인 표현은 갖다 붙인 듯한 팔과 V자형의 규칙적인 옷주름, 좌우로 힘없이 표현된 옷자락 등 신체의 세부표현에서도 보이고 있어 세련된 통일신라 조각이 형식화되어 감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세련된 조각기법이 형식화되던 시기에 나타난 도식화된 작품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옥천 용암사 마애여래입상]

 

대웅전 뒤편에 우뚝 솟은 바위를 위쪽만 처마처럼 남기고 편편하게 다듬은 후 얕게 돋을새김한 마애불이다. 바위 아래쪽의 좁은 틈에서 물이 흐르고 부처상은 높다란 바위의 한가운데쯤에 새겨져서 마치 공중에 둥실 뜬 것처럼 보인다.

불상은 연꽃대좌 위에 두 발을 벌리고 선 모습이며 높이는 3m 가량 된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가 있고 귓바퀴가 늘어져 어깨에 닿았다. 눈은 가늘고 길게 표현되었고 코가 가늘며 입은 자그마하여 덤덤하고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어깨가 넓은 당당한 체구이다. 왼손은 몸 옆으로 내렸는데 손바닥 안에 무언가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오른손은 들어서 선정인을 취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법의는 몸 앞에서 U자 모양의 규칙적인 곡선을 지으며 아래로 흘러내렸고 왼쪽 손목까지를 감싸고 있다. 불상 둘레에 정으로 긁어내리듯 키 모양의 광배를 표현하였고, 예전에 채색을 했었는지 입술과 법의, 광배 둘레, 연화대좌 등에 붉은색이 남아 있다.

이 마애불은 정성껏 기도하면 모든 소원을 이루어주는 영험 있는 부처라고 인근에 알려져 있다. 전해오는 말로는 마의태자가 조성했다고도 하고 마의태자가 떠난 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태자의 모습을 새긴 것이라고도 한다.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불상도 동쪽을 향하고 있다. 부처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면 저 아래로 저수지와 논밭, 닭 울고 개 짖는 마을이 아득히 내려다보인다.

표정이나 옷주름의 도식적인 표현 등에서 신라 말 고려 초의 마애불에 유행하던 수법을 보이는 이 불상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옥천 용암사 마애여래입상은 표정이나 옷주름의 표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의 마애불로 여겨진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마의태자가 조성했다고도 하고 또는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태자의 모습을 새긴 것이라고도 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제3전망대, 제2전망대서 바라본 전경"


[용암사 운무대 전경]

 

여기는 구름이 춤추는 곳, 용암사 운무대입니다. - 일출을 봐도 좋고, 낮에 봐도 풍광 좋은 곳 -

운해와 일출의 절묘한 조화를 아름답게 사진기에 담을 수 있는 계절은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한 환절기로 이른 봄이나 늦은 가을이 적기.

이곳 용암사 운무대에서 바라보는 운해와 일출은 미국 'CNN go'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 다운 50곳에 포함될 정도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합니다. 낮게 깔린 구름은 마치 춤을 추듯 일렁이고 운해를 뚫고 떠오르는 붉은 해는 수묵화 같은 산봉우리마저 짙게 물들입니다. 이처럼 일출이 함께하는 운해는 절경 중의 절경으로 동트기 전부터 전국 사진작가들의 발길을 끌어모으며, 특히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겨울 새벽 찬바람 속에서도 많은 이들이 찾고 있습니다. 해발 424m에 위치한 소담스러운 용암사 운무대에 올라 새벽엔 일출을 감상하고 낮에는 탁 트인 아름다운 옥천의 풍광을 느껴보세요.


"용암사 운무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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