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정지용생가&문학관

2023. 11. 7. 05:48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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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정지용 생가]

 

“잊혀져가는 우리 고향의 정경을 오롯이 그려낸 국민시인 정지용. 그의 시 향수가 그러하듯 초가삼간 그의 생가는 그의 삶의 흔적은 질박하게 품어놓는다. 생가에서 한 폭의 맑은 수채화처럼 다가오는 정겨운 시를 기억하며 그의 삶의 흔적을 더듬어보자.” 

 

정지용 생가는 해금조치 직후 조직된 '지용회'를 중심으로 그 이듬해 복원했다. 정지용은 6 · 25발발 와중에 행방불명되고 정부는 그를 월북작가로 분류해 그의 작품 모두를 판금시키고 학문적인 접근조차 막았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88년에 그의 작품은 해금 되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지용회는 해금조치가 있은 후 그의 생가를 허물고 지은 집의 벽에 그 자취만이라도 전하고자 ‘지용유적 제1호’임을 알리는 청동제 표시판을 붙여놓았다. 표지판은 생가복원 이후 생가 부엌 외벽의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지용 생가 방문을 항상 열어두어 찾는 이에게 그의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였었음을 가구로 알리고 있다. 시선가는 곳 마다 정지용의 시를 걸어놓아 시를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생가의 사립문, 집 마당 언저리의 우물, 담벼락 아래 소박한 장독대. 당시의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부엌 등 생가를 돌아보노라면 잊혀져가는 고향집 풍경이 정겹게 다가온다. 생가의 툇마루는 방문객들이 걸터앉아 문학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기념촬영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출처:옥천군청


‘지용유적 제1호’임을 알리는 청동제 표시판


"정지용 시인 초상화와 호수 시"


홍시 - 정지용

어저께도 홍시 하나.

오늘에도 홍시 하나.

까마귀야, 까마귀야.

우리 남게 왜 앉았나.

우리 오빠 오시걸랑.

맛 뵐라구 남겨 뒀다.

후락 딱 딱

훠이 훠이!

정지용 생가 감나무 아래 땅에 떨어진 홍시

[청석교 상판]

 

이 다리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옥천 죽향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황국신민서사비"이다. 광복후에는 글자를 지우고 "통일탑"으로 사용 되다가 199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오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우리 학생들에게 충성맹세를 강요한 내용이 새겨졌던 비로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자료이다.


[정지용 시인상과 정지용 문학관]

 

1996년 문을 연 정지용문학관. 이 문학관은 정지용 문학의 실체를 보고, 느끼고,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문학 전시실과 영상실, 문학교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문학관을 들어서면 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 로비에서 밀랍인형 정지용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벤치에 앉아있는 정지용과 기념촬영을 할 수 있는 포토존이다.

전시실은 정지용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문학사의 전개 속에서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게 시대적 상황과 그의 문학을 시대, 연도별로 정리해놓았다. ‘한국현대시의 흐름과 정지용’에서는 시문학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정지용 시인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외 정지용 시, 산문집 초간본 등 원본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 중앙은 멀티미디어 기반의 문학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독특한 아이템으로 가득 차있다. 이곳에서는 관람객이 정지용 문학을 재미있게 체험 할 수 있다. 배경 영상과 음악위에 자막으로 흐르는 정지용 시인의 시를 낭송해 볼 수 있는 시낭송실은 흥미성과 오락성을 겸비하고 있어 관람객에게 인기가 높다.

 

출처:옥천군청


​정지용은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군 옥천면(현 옥천읍) 하계리에서 부친 정태국과 모친 정미하의 장남으로 출생, 옥천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휘문고보에 다닐 때부터 습작활동을 시작하여, 1922년 「풍랑몽」을 쓰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시문학>. <구인회> 등의 문학 동인과 <가톨릭 청년> <문장) 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후에는 이화여전 교수, 경향신문 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 인민군에 의해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 이후 납북되어 그해 9월 25일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행적은 알 수 없고, 그의 죽음에 대해 소문과 추측만이 떠돌았다.

시집으로 「정지용시집』. 「백록담」, 「지용시선」이 있고, 산문 「문학독본」. 「산문」이 있다.

120여 편의 많지 않은 작품들이지만 거기에는 시골(전통)과 도시(근대), 동심(동요)과 구원(종교시), 바다(이미지즘)와 산(동양 정신) 등이 빛나는 언어로 완성되어 있다. 절제된 감정과 사물에 대한 정확 묘사 그리고 섬세한 언어 감각으로 빚은 시편들을 통해 그는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하였다.

포토존 정지용 밀랍인형,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고 있다.

"향수"


[정지용 시집 1935, 시문학사 초판]

 

이 시집은 1935년 10월 《시문학》 동인인 박용철에 의해 시문학사에서 발간되었다. 시집은 내용에 따라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89편의 시를 담고 있다. 초기시를 모은 이 시집이 간행되면서 당시 시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수많은 평론가와 시인들이 이 천재시인의 탄생을 출현을 기뻐했으며, 비로소 우리도 시인을 가졌다고 격찬하였다.


"한국 현대시의 흐름과 정지용"


[한국전쟁과 천재시인의 최후..., Korean War and Last Moment of Genius Poet]

 

8.15 해방이 되자 지용은 누구보다 목청껏 애국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이 땅의 진정한 해방과 통일을 갈망하며 각종 사회적인 문제에도 개입한다. 시보다는 산문 활동에 주력하며 우리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정지용 시인은 서울 녹번리 초당에서 그 전쟁을 맞는다. 그해 7월에 그의 집을 자주 드나들던 젊은 문인 4~5 명이 찾아와 한참을 이야기하다 그들과 함께 나간 뒤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납북되어 평양의 어느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 인민군과 함께 북쪽으로 가다가 미군 폭격기의 공격으로 죽었다는 이야기, 미군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이야기 등 소문만 무성하게 떠돌았다. 분단의 비극과 함께 이것이 천재시인의 최후였다.

나비

내가 인제

나븨 같이

죽겠기로

나븨 같이

날라 왔다

검정 비단

네 옷 가에

앉았다가

창(窓) 훤 하니

날라 간다

*이 시는 「문예」 8호(1950, 6)에 발표된 '4.4조 5수'의 다섯 번째 부분이다. 한국전쟁 직전에 발표한 정지용의 마지막 작품으로 마치 자신의 앞날을 미리 예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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