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영천 숭렬당

2023. 11. 27. 06:14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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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영천 숭렬당 (永川 崇烈堂) Sungnyeoldang Shrine, Yeongcheon]

 

조선 세종 때 대마도와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 이순몽 장군의 집으로 세종 15년(1433)에 중국식으로 지은 건물이다. 1970년 문화재로 지정된 뒤 복원공사를 한 건물로 지금은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으로 쓰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인데 그 양쪽 끝 칸에 날개를 단 듯 지붕을 덧달았다. 따라서 전체로 보면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모양은 맞배지붕이 팔작지붕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이고 있는 지붕 형식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새부리 모양으로 뻗쳐 나왔다. 평면은 가운데 3칸보다 양쪽 끝 칸이 한 자씩 좁으며 건물 안쪽의 천장은 가구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꾸미고 있다.

 

구조가 조선 전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지만 일부 재료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들이 조선 후기의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조사결과 몇 차례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체로 검소하고 건실하게 지은 집이다.

 

출처:문화재청


"숭렬공원"


"숭렬당 외삼문"


"중삼문과 숭렬당"


 

[보물 영천 숭렬당]

 

위양공 이순몽(威襄公 李順蒙, 1386~1449)은 세종 때의 무장이다. 영천에서 태어나 4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서 성장한 그는 태종 5년(1405)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오른 뒤 1417년에는 무과에 급제, 본격적인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세종 1년(1419) 우군절제사에 임명된 그는 그해에 있었던 쓰시마 정벌에 참여하였으며, 세종 15년(1433)에는 중군절제사가 되어 여진족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세종의 총애가 두터워 복장군(福將軍)이라 불리기도 한 그는 1434년 경상도 도절제사를 지냈으며 1447년에는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에 올랐다. 

 

영천 시내 도심에 자리한 숭렬당(崇烈堂)은 이순몽의 사제(私第)였다. 얼핏 그 이름만 들어서는 무슨 충신이나 유명한 장군을 받드는 사당쯤으로 생각되고 크기나 평면구성으로 보아서는 서원이나 향교의 강당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대청 위에 걸린 「숭렬당중수기」에는 이순몽이 ‘휴식을 취하고 생활하던 곳’(燕息起居之所)이라 했으니 일반 주택의 사랑채였음에 거의 틀림이 없다. 그래 그런지 집도 주인을 닮아 다분히 무인풍이다. 웬만한 양반집이나 대갓집의 사랑채와는 견줄 수 없을 만큼 덩치가 크고 지붕도 높아 우선 그 크기부터 무장의 풍모가 있다. 육간대청만 해도 넓다고 하는데 아홉 칸이나 되는 대청은 툭 트여 시원스럽고, 대청 양쪽으로 방을 하나씩 들였을 따름으로 구조도 복잡하지 않아서 단순명쾌하고 호방한 무인의 기질에 들어맞는다. 집 크기에 어울리는 굵은 서까래와 기둥, 큼직큼직한 익공, 부재들에 드러나는 단순소박하면서 건실한 초각 등도 묵직하면서 간결명료하여 주인의 신분과 잘 어울린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영천 숭렬당]

 

집은 두 줄로 막돌허튼층쌓기한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정면 5칸 측면 3칸의 별당식 평면을 이루고 있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가운데 세 칸은 같지만 좌우의 툇간은 약 한 자가 좁다. 가운데 세 칸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이 아홉 칸이나 되는데다 정면에는 대청보다 약간 낮게 턱을 지워 툇마루를 덧달아 크고 넓은 마루가 이 집의 호방한 분위기를 이끈다. 좌우 툇간에는 2칸통의 온돌방을 설치하고 앞퇴는 마루를 놓아 대청과 연결시켰다. 방 뒤로는 반반칸의 개흘레가 덧대어져 있고, 대청 뒤로는 개흘레 너비만큼의 쪽마루가 붙어 있다.

 

기둥 위에 짜인 공포는 익공이 이중으로 겹쳐진 이른바 이익공식인데 주심포계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초기적인 형식이다. 장혀 위에 놓인 외목도리의 힘을 익공으로 전달하는 행공(行工), 창방 위에 얹혀서 장혀를 받치고 있는 화반 등에 보이는 초각수법도 조선 초기의 양식에 속한다. 이 점은 두 방의 측면 벽에 난 붙박이 광창도 마찬가지여서 두껍고 투박한 넉살창 또한 고식에 든다. 사방의 귀기둥 밖으로는 창방, 장혀, 도리의 뺄목이 유난히 길게 빠져나와 있는데, 이는 지붕의 구조에 따른 필연적인 현상이면서 숭렬당의 또 다른 특색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붕을 살펴보면 가운데 3칸은 맞배지붕을 만들고 양 옆 툇간 위는 거기에 덧대어 부섭지붕으로 처리하였다. 가적지붕이라고도 부르는 이런 형태의 지붕은 영천지방 일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형식으로, 맞배지붕이 팔작지붕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형태이다. 이 부섭지붕이 앞뒤의 처마선과 엇비슷한 길이로 길어지다보니 귀기둥 밖으로 내민 부분을 받치기 위해 뺄목이 길게 빠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곳곳에 오래 된 양식이 돋보이는 숭렬당은 1433년에 지어진 건물로 조선 초의 일반 건축으로는 아주 희귀한 예에 든다. 1970년 보물 제521호로 지정된 뒤 해체·복원하면서 처음 모습에서 바뀐 부분을 바로잡아 원형을 되찾았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숭렬당 편액]


편액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국권을 상실한 뒤에는 대동단과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한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의 글씨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숭렬당 내부 전경"


[영천 향사당 입규 현판]


이 현판은 영천 향사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향규를 적어놓은 것으로서, 광해군 6년(1614) 복재 정담(1552-1634)이 지 었으며, 크기는 가로 126cm, 세로 32.5cm로 총 1,091자가 음각되어 있다. 향규는 전문과 규약 10조 및 후기로 구성 되어 있는데, 내용은 17세기 초 영천 사림의 전란 후의 사회기강을 확립하려는 의도를 집약하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조선시대의 향촌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삼문"


"사당과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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