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팔공산 은해사&백흥암

2023. 11. 30. 05:33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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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팔공산 은해사 천왕문"


[은해사 금포정]

 

은해사 일주문을 지나 보화루까지의 울창한 숲길을 금포정 이라 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1714년 조선시대 숙종 임금 때에 일주문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소나무 숲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 300년생의 높이 10여 미터의 송림이 2km정도 울창한 이곳에는 일체의 생명을 살생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금포정이라고 한다. 또한 2007년에는 과거의 식수를 기리기 위해 금강송1080주를 경내지에 식재하고, 2008년에도 1080주 를 금포정과 경내지 곳곳에 식재하였다.


"어린 소나무와 기다란 소나무"


[사랑나무]


수종이 서로 다른 두 나무가 접촉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서 합쳐진 나무를 연리목, 합쳐진 가지를 연리지라고 한다. 여기에 100여년생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서로 붙어 안고 자라고 있으니 연리지 중에 매우 희귀한 경우이다. 나라의 경사, 부모에 대한 효성, 부부의 애정 등을 상징하는 연리지는 삼국사기 및 고려사에도 귀하고 경사스러운 일로 여겨 왔다. 연리지(연리목) 아래에 촛불을 켜고 빌거나, 왼편으로 돌면 아들을, 오른편으로 돌면 딸을 낳고, 사이가 안 좋은 부부가 손 잡고 돌면 사랑의 묘약이 되어 화합한다는 구전이 있다.


"은해사 바위에 새겨진 불상"


[추사 감정희가 쓴 보화루 현판]


1862년 혼허 지조(混虛 智照)스님이 지은 「은해사중건기」(銀海寺重建記)를 보면 “대웅전·보화루·불광각 세 편액은 모두 추사 김상공(金相公)의 묵묘(墨妙)”라고 했으며, 그뒤 1879년 당시 영천군수이던 이학래(李鶴來)가 쓴 「은해사연혁변」(銀海寺沿革辨)에는 “문의 편액인 ‘銀海寺’, 불당(佛堂)의 ‘大雄殿’, 종각의 ‘寶華樓’가 모두 추사 김시랑(金侍郞)의 글씨이며 노전(爐殿)의 ‘一爐香閣’이란 글씨 또한 추사의 예서이다”라고 했다. 이들이 말한 추사의 글씨를 은해사는 지금도 빠짐없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은해사 전경"


"보호수 은해사 향나무"


"향나무와 보화루"


"범종각"


"홍매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은해사대웅전 (銀海寺大雄殿)]

 

은해사는 통일신라 헌덕왕 1년(809)에 해안사라는 이름으로 혜철국사가 지었다. 조선 명종 1년(1546)에 천교화상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우면서 은해사로 불렀는데, 그 뒤 여러 차례 화재로 건물이 많이 소실되었다. 1919년 크게 넓혀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화루, 심검당, 설선당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19세기 중엽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것이라 전한다.

 

출처:문화재청


"극락보전"

김정희가 쓴 대웅전 현판은 성보박물관 보관중이었으나 방문시 보수공사중이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은해사대웅전후불탱화및삼장탱화 (銀海寺大雄殿後佛幀畵및三藏幀畵)]

 

은해사 대웅전에 보관되어 있는 후불탱화 및 삼장탱화인데,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를 말한다.

 

후불탱화는 세마포(細麻布)에 종이를 여러 겹으로 배접한 바탕 위에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보살만을 배치한 아미타삼존도이다. 남색 하늘 바탕에 갈색과 녹색 구름을 그렸고, 부처와 보살상을 홍색과 녹색 위주로 그려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세련된 필치를 보이고 있다.

 

그림의 아랫부분에 적힌 화기(畵記)에 따르면 이 후불탱화는 조선 영조 26년(1750)에 화원(畵員) 보총(普摠)·처일(處一) 등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는 같은 장소에 보관되어 있는 은해사괘불탱(보물 제1270호)과 같은 시기, 같은 화원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삼장탱화는 세마포 다섯 쪽을 연결하여 종이를 여러 겹으로 배접한 바탕 위에 가운데에 천장보살, 왼쪽에 지장보살, 오른쪽에 지지보살의 3대 보살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 각 보살의 협시 및 권속들을 그린 것이다. 작품의 제작시기 및 예술성에 있어 후불탱화와 유사하다.

 

화기에 의하면 이 삼장탱화는 조선 영조 31년(1755)에 화원 상오(常悟)·관령(貫伶)·성청(性淸)·성징(性澄) 등 12명에 의해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삼장탱화가 주로 16세기 후반부터 건륭연간(1736∼1795)까지의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이 작품도 그러한 예의 대표적인 하나가 될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감정희 친필을 보관중인 성보박물관은 방문시 내부공사중이었다.


"신일지"


은해사 백흥암 가는 길이다. 은해사 종무소에서 연락처를 받아 백흥암 극락전 내부 답사 허락을 받고 도보로 2.5km 이동한다.


"조금만 더 가면되요"


[은해사 백흥암]


절집 안에서 쓰는 말에 ‘청정수월도량’(淸淨水月道場)이라는 게 있다. 기도나 불공을 드릴 때 부처님께 고하는 축원에서 빠지지 않고 읊조려지는 구절로, 그 절이 맑고 깨끗하기가 물에 비친 달과 같다는 뜻의 말이다. 어느 절에서나 이 말을 수시로 되뇌고 있지만 청정수월도량이 말처럼 흔한 것은 아니다. 백흥암은 그런 드문 절집 가운데 하나다. 은해사의 북서쪽 골짜기 깊숙이 들어앉은 이 조용하고 조촐하고 정갈한 암자는 언제나 수십 명 이상이 모여 노동과 수행에 여념이 없는 비구니스님들의 수행처이다.

 

백흥암은 신라 경문왕 9년(869)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 백지사(栢旨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명종 1년(1546) 천교화상(天敎和尙)이 백흥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은해사에서 팔공산에 이르는 산세가 용이 등천하는 기세이므로 등 너머 운부암(雲浮庵)에서 상서로운 구름이 더욱 많이 일어나서 용의 승천을 돕도록 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중종 15년(1520), 암자 부근의 태실봉에는 뒷날 인종이 되는 왕세자의 태가 봉안된다. 이로써 백흥암은 ‘막중한 것을 수호하는 곳’(莫重守護之所)으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고, 정조 22년에는 완문을 하사받아 관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태실의 수호와 완문의 수장을 계기로 백흥암은 그 모습을 일신하고 사세를 탈없이 유지하게 되었던 듯하다.

 

아쉽게도 백흥암은 평소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 1년 중 다만 하루 사월 초파일에만 출입이 허용된다. 달리 생각하면 이 점은 아쉬워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귀한 물건은 귀하게 다루고 곱게 지키고 가꾸어야 더 귀해지는 법이다. 흔전만전 쓸 수 있다면 누가 그 귀함을 알며 어떻게 그 귀함을 오래 지킬 수 있으랴. 게다가 그곳에는 열심히 일하고 힘써 지혜를 닦는 수행자들이 늘 수십 명 이상 모여 살지 않는가. 그러니 한 해에 한 번 백흥암의 대문이 열리는 일은 조금 불편하기는 할망정 불만스러워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깨어지기 쉬운 옛 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런 접근은 오히려 우리의 배려와 예의인지도 모른다.

 

조선 초 시문으로 문명이 높았던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은 「백지사」(栢旨寺)라는 시의 말미를 이렇게 맺고 있다. “방 따뜻하여 새벽잠 안온하고(房暖朝眠穩)/등불 밝아 밤 이야기 길어라(燈明夜話遲)/스님네 마음씨 속되지 않아(居僧心不俗)/ 반 달이 넘도록 돌아갈 줄 모르네(半月爲忘歸).” 백흥암은 그때의 분위기가 남은 고풍한 절이다. 어딘가에 우물이 감추어져 있어 사막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절다운 절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드문 이 시대에 백흥암은 달고 시원한 감로수가 샘솟는 옛 샘 같은 절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은해사 백흥암 공양간 목탁"


[보물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永川 銀海寺 百興庵 極樂殿) Geungnakjeon Hall of Baekheungam Hermitage of Eunhaesa Temple, Yeongcheon]

 

백흥암은 은해사에 속한 암자로 신라말에 지은 것으로 전한다. 조선 명종 1년(1546) 인종의 태실(胎室)을 팔공산에 모시게 되자 백흥암을 수호사찰로 정하고 크게 고쳤다고 한다.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극락전은 인조 21년(1643)에 지은 것으로 지금 있는 건물은 그 뒤로 여러 차례 수리한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재료의 형태와 짜임이 조선시대의 옛 수법을 잘 갖추고 있다.

 

안쪽 천장은 가운데를 높이고 주변을 낮게 만들어 층을 이루게 꾸몄으며, 불상을 올린 불단(수미단)은 조각이 매우 특이하고 우수하여 보물 영천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1643년 중건된 보물 극락전은 단청이 곱게 날아 은은한 고풍이 살아나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이다. 물빛 하늘을 나는 청자 속의 학처럼 그 자태나 처마선이 고상하고 격조 높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극락전·심검당·보화루·진영각이 이루는 네모진 공간은 어쩌면 백흥암이 베푸는 공간미학의 백미인지도 모른다. 극락전은 단청을 입히고 나머지 셋은 백골로 두었지만 네 건물 모두 차분한 고색이 서려 분위기는 그윽하고, 심검당과 진영각의 처마가 극락전 귀기둥 안쪽으로 들어올 만큼 현실의 공간은 비좁은데 느낌은 전혀 답답하지 않다. 여기 안뜰에 서면 저절로 고요하고 단정한 무욕의 세계로 이끌릴 뿐이다. 유마의 방처럼 스무 평 남짓한 공간이지만 그 이상의 깊이와 넓이를 지녔다. 언제나 수십 명이 모여 정진에 여념이 없지만 이곳은 늘 적요하고 정밀(靜謐)하기만 하다. 반야의 칼을 벼리는 ‘지혜의 품’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영천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


극락전 안의 수미단은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불단 가운데 그 구성과 조각솜씨가 가장 빼어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된다. 그것만을 따로 떼어 극락전보다 16년이나 앞선 1968년 보물 제486호로 지정하였으니 그 가치나 아름다움은 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높이 125㎝ 폭 413㎝로 상하대 각 1단, 중대 3단의 5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대와 하대에 갖가지 짐승과 꽃과 새들이 부조되어 있다.

 

출처:글:한국문화유사답사회, 사진:문화재청


수미단이란 상상의 산인 수미산 형태의 단을 만들고 그 위에 불상을 모시는 불단를 말한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永川 銀海寺 百興庵 須彌壇)은 극락전에 있는 높이 125㎝, 너비 413㎝의 조선 후기에 만든 불단이다. 앞쪽 면은 5단으로 되어 있으며, 각 단도 5등분 되어 각각 직사각형 모양이다. 가장 위에 있는 단은 안상문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제2단은 봉황·공작·학·꿩 등을, 제3단은 용·어린아이·물고기·개구리 등을 매우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제4단은 꽃잎 속에 있는 코끼리·사자·사슴 등을 조각하였고, 가장 아래단의 양쪽 끝에는 도깨비 얼굴을, 가운데 부분에는 용을 조각하였다. 각 단에 있는 새나 동물의 배열이 특색 있고, 조각기법도 매우 우수하다. 이런 특징이 있는 불단은 조선 후기 작품으로 더러 남아 있지만, 이 불단은 그 중에서도 대표되는 작품으로 가치가 있다.

 

출처:글,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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