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청제&청제비

2023. 12. 2. 04:34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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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영천 청제비]


못의 서북편 얕은 산기슭에는 청못의 둑을 쌓은 내력과 고친 연유를 새긴 비석이 둘 있다. 하나는 청제비(菁堤碑)이고 다른 하나는 청제중립비(菁堤重立碑)이다. 일괄하여 보물로 지정된 두 비는 한국일보사의 주관으로 신라 삼산에 대한 학술조사를 진행하던 신라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1968년 12월 세상에 그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영천의 읍지(邑誌)인 『영양지』(永陽誌)에 “당나라 정관(貞觀) 때의 기사비(記事碑)가 있다”고 했고, 『영천전지』(永川全誌)에도 “당 태종이 신라를 쳤을 때 위징(魏徵)이 청천제(淸川堤)를 막았는데 후인이 비를 세워 그 공을 기록했다”는 부분이 있다. 이로 보아 부정확하긴 하지만 청제비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알려졌던 듯하고 또 지역 주민들 역시 이런 비가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이때 비로소 학계에 보고되고 매스컴을 통해 두루 알려졌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영천 청제비 (永川 菁堤碑) Cheongjebi Monument, Yeongcheon]

 

영천 청못이라는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기록한 내용과 중수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1968년 신라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흔히 ‘청제비’라고 부른다. 

 

전체적인 모습은 화강암의 자연판석으로 직사각형의 형태이고, 비의 양면에는 각기 시대가 다른 비문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다. 신라 법흥왕 23년(536)의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처음 축조할때 새긴 것이고, 반대면의 신라 원성왕 14년(798)의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새로 수리하였을  새긴 것이다. 각기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명칭, 규모, 내용, 동원된 인원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청제비 서쪽으로는 조선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청제중립비가 있다. 내용은 1653년 비가  동강이  있는 것을 최일봉씨   사람이 다시 맞추어 세웠다는 것이다. 영천 청제비는 신라 수리시설의 실태와 신라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청제비,청제중립비 정면 전경"


"청제비,청제중립비 후면 전경"


[청제중립비]


청제중립비는 절단되어 흙속에 묻혀 있던 청제비를 다시 세우고 그 사연을 새겨 강희(康熙) 27년(1688)에 세운 비이다.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글씨를 새기고 뒷면은 이름이 쓰인 부분만을 다듬고 나머지 여백은 그대로 두었다. 앞면 윗부분에 가로로 菁堤重立碑(청제중립비)라고 음각되어 있다. 지붕돌이 없이 윗부분의 좌우를 귀접이하여 그 모양이 이른바 규형 비석에 가깝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중엽부터 조선시대까지 흔히 유행하던 것이다. 높이 107㎝, 너비 77㎝, 두께 15㎝이다.

 

원래 청제비에서 서쪽으로 5m 떨어져 있던 것이나 지금은 청제비와 나란히 비각 안에 서 있다. 청제비의 내용을 인용하여 원성왕 때의 수축 기록을 밝힌 다음 청제중립비는 이렇게 끝나고 있다. “지난 순치(順治) 계사년(1653)에 비석이 누군가의 손에 절단되어 땅속에 파묻혀버리니 이 고적(古跡)이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비석을 고쳐 세우고 그 일을 기록하는 바이다. 아, 훗날 사람들이 이 비로 말미암아 이 제방을 허물지 말아야 할 까닭에 생각이 미친다면 비가 제방에 도움이 없지 않다 할 것이다.” 이 내용에서 청제비가 절단되었다가 다시 세워졌음을 알 수도 있지만 오래 된 문화유산을 아끼는 마음을 배우게도 된다. 비록 중립비를 세운 사람들의 염려가 무색하게 청못은 고속도로가 관통하여 두 동강이 나버렸으나, 키에도 미치지 못하는 청제비는 잔솔 어지러운 청못 언덕에서 천년을 수유(須臾)인 양 말없이 서 있다.

 

츨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청제비]


그저 청제비라고 말하지만 실은 이 비에는 앞뒷면에 다른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그 양면의 명문(銘文)은 각기 다른 연대의 것이다. 곧 하나는 병진(丙辰)이라는 간지(干支)가 적혀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원(貞元) 14년이라는 절대연대가 밝혀져 있는 것이다. 전자가 청제를 처음 만들고 이를 기념하여 새긴 축조명(築造銘)이라면 후자는 청제의 파손을 수리한 사실을 적은 수치명(修治銘)이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의 연구로는 비문에 나오는 병진년을 법흥왕 23년(536)이나 그보다 앞서는 어느 해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원 14년은 원성왕 14년(798)에 해당한다. 따라서 병진년의 간지가 있는 면이 앞면이 되겠으나 조사 당시부터 지금처럼 정원 연호가 있는 쪽이 앞을 향하고 있었다.

 

비석은 자연석을 간단히 가공하여 글씨를 음각했으며 받침돌이나 지붕돌은 애초부터 없었던 듯하다. 이런 형태는 우리나라 비 양식의 변천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으로서 삼국기 비석들의 공통적인 모습이다. 자연석이다보니 부분에 따라 달라 일정치 않으나 높이는 130㎝ 정도, 너비 70㎝ 안팎, 두께는 15~45㎝이나 현재는 하부가 얼마간 묻혀 있다. 석질이 단단한 화강암이라 새겨진 글자의 마멸이 적어 뒷면은 육안으로도 판독할 수 있다. 양면의 글자체는 모두 해서체로 고졸한 맛이 느껴진다.

 

1968년의 조사를 취재했던 한국일보사의 한 논설위원은 이 글씨체를 두고 이렇게 썼다. “막대기 끝으로 아무렇게나 갈겨쓴 듯 삐뚤빼뚤하여 그것이 오히려 고대인만이 지닐 수 있는 활달하고 힘찬 무기교(無技巧)의 아름다움으로 느껴진다. 근세의 금석문처럼 딱딱하지 않고 신라불(新羅佛)의 미소처럼 천진한 여백이 감돌아 무변한 넓이를 지닌 시대정신의 배경을 보는 듯도 하다.” 문체가 이두를 넣은 신라 속한문체(俗漢文體)인데다 신라시대에 쓰이던 용어가 많아 전문가 아닌 일반인으로서는 그 내용을 해독할 엄두를 내기도 어렵다.

 

병진년 간지의 비문 내용에는 공사기간, 규모, 동원된 인원, 공사를 지휘한 관원의 직책과 이름 등이 실려 있다. 청제를 처음 쌓을 때는 국가에서 7천여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농한기인 2월 8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언제 마쳤는지는 알 수 없으며, 수치를 환산해보면 당시의 규모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한다. 원성왕 때의 수치(修治) 기록도 내용의 구성은 비슷하다. 이때는 법당(法幢)이라는 신라의 군사조직을 통해 동원한 1만 4천 명 이상의 인원이 2월 12일부터 4월 13일까지 일을 했으며, 부척(斧尺)이라는 일종의 기술자들이 수문을 만들거나 목책을 세우는 일에 종사한 것으로 추측한다. 이해에 앞선 몇 년간 재해가 계속되고 공사기간이 보릿고개에 해당하는 점, 그리고 못을 처음 축조할 때보다 배 이상 많은 인원이 수리에 동원된 점을 들어 이때의 공사가 요즈음의 영세민 취로사업과 같은 일종의 진휼(賑恤)과 제언(堤堰)의 중수라는 두 가지 목적을 겨냥한 사업이 아니었겠나 하는 재미있는 견해도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청제비 앞뒷면


 

[영천청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영천지방을 지나다 보면 영천IC 북방 사오백 미터쯤에서 길 좌우로 잇달아 나타나는 저수지를 볼 수 있다. 대단한 크기를 자랑하는 것도, 풍광이 유난히 빼어난 것도 아니지만 우리나라 농업수리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유적으로 흔히 청못[菁池] 또는 청제(菁堤)라고 불리는 인공못이다.

 

우리나라 벼농사의 역사가 유구함을 보여주는 삼한시대의 3대 수리시설로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제천의 의림지(義林池)를 꼽는다. 청못도 그에 버금가는 오랜 역사와 의의를 가진 못이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청못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536년, 혹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렵은 신라농업사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이다. 학자들은 4~5세기까지 맥류(麥類)가 주작물이던 신라사회의 농업이 5~6세기가 되면 벼의 재배기술이 점차 확산되면서 벼농사의 비중이 커지고 그에 따라 수리관개시설의 발달이 가속화된다고 한다. 또 신라가 지증왕·법흥왕 이후 6세기에 들어서서 안으로는 국가조직을 정비하고 밖으로는 영토를 확장하여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게 되는 배경의 하나로 이와 같은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드는 사람도 있다. 청못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예증이 되는 셈이다.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청못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각도 있다. 신라의 명산대천에 대한 제사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삼산(三山)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금의 영천지방, 곧 체야화군(切也火郡)에 있던 골화산(骨火山)으로, 이 산의 산신은 신라를 지키는 호국의 여신으로 받들어졌다. 체야화군은 원래 독립된 국가이던 골화국(骨火國 또는 骨伐國)이 신라에 병합된 뒤 설치되었다. 별다른 무력적인 마찰이 없이 평화적으로 병합이 이루어졌고 그후 골화산은 신라 삼산의 하나로 숭배되었으니 이 지역은 신라의 지배집단인 왕경인(王京人)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국가적인 힘이 동원된 청제의 축조도 이런 정황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청못은 신라사 연구에 감초처럼 중요한 역사적 유산인 것이다.

 

채약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모아 관개에 이용하려고 두 야산의 허리를 이어 만든 청못은 제방의 길이가 약 240m, 그 높이는 12.5m에 둘레는 2㎞쯤 된다. 저수면적은 11만㎡이고 저수량은 약 59만 톤 정도이다. 관개면적은 134㏊에 달해 지금도 중요한 용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니 청못 아래로 펼쳐진 30만 평에 이르는 구암들은 요즈음도 이 못 덕분에 좀체로 가뭄을 타지 않는다. 구암들 일대가 바로 골화국의 터전으로 알려져 있다. 뒷날 이곳이 도동현이 되었고 그 복판인 지금의 도남동은 한 400년 전쯤에 도동 안씨가 정착하여 동족부락을 이룬 곳이기도 한데, “날아다니는 새가 굶어죽어도 도동 안씨는 굶지 않는다”는 말이 영천지방에 전해지니 예전에도 청못 덕택에 구암들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살림이 푼푼했던 듯하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경상북도 기념물 영천청제 (永川菁堤)]

 

신라시대에 축조된 수리시설중 현존하며 관개수리시설로 이용되고 있는 못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으로 법흥왕 23 이전 476 또는 536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청제 축조시 동원된 인원이 7,000명이라는 것으로 보아 국가적인 차원의 사업이었음을 추정할 있고, 목책이나 말뚝으로 제방을 견고히 보강하는 기술이 사용되었고 나무 수문이 설치되었다고 하므로 청제의 기능을 추정해 있고 당시 수리시설의 실태 파악이 가능해지며 농업생산성을 추측하여 있는 귀중한 사료임

 

출처:문화재청


[청제 전경]

우리나라 농업수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으로 저수면적은 11만㎡이고 저수량은 약 59만 톤 정도이다. 현재는 못 가운데로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 못이 두 동강 나버렸다.

 

츨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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