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임고서원

2023. 12. 3. 06:24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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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기념물 임고서원 (臨皐書院)]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정몽주(1337∼1392)는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당시 긴장상태에 있던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탁월했다. 특히 시조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조선 태종)이 살해하였다.

 

임고서원은 조선 명종 8년(1553)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다시 지었으며, 이 때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인조 21년(1643)에는 여헌 장현광을, 영조 3년(1727)에는 지봉 황보인을 추가로 모셨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거되었으나 1965년에 정몽주의 위패만을 모시고 복원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전망대에서 바라본 임고서원"


"포은선생숭모기념비"


[경상북도 기념물 임고서원은행나무 (臨皐書院銀杏나무)]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임고서원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500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0m, 둘레는 5.95m 이른다. 가지는 사방으로 퍼져 있으며, 나무가 자라나는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본래 나무는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을 당시 그곳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나,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없어진 임고서원을 1600년경 이곳에 다시 지으면서 은행나무도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임고서원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로 생물학적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동방이학지조 송탑비"


[조옹대와 용연]


포은 선생은 호수의 물고기를 보며 연비어약을 말씀하셨으며, 여헌선생은 임고서원 중건상량문에서 "조옹이라는 대가 시냇가에 있는 것은 아마도 은거하신 초지일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은 포은 선생께서 낚시를 즐겼다 하여 조옹대라 부르고, 또 선생이 낚은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용이라고 하여 조룡대라 부르기도 한다. 이로 인하여 연못은 용연이라 불렀는데 이번에 복원을 하고 울진금강송 아래 자라던 토종 잉어를 분양받아 금강이라 이름 지은 뜻은 포은 선생의 시 호중관어의 "모든 것이 팔팔한 고기와 같네" 에서 찿으리라.


"임고서원 전경"


"임고서원 전경"


 

"단심가,백로가 시비와 영광루"


"구 임고서원"


통정대부 공조참의로 추증된 최선매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


"임고서원"


"조옹대"


"포은유물관"


"동방이학지조 포은 선생 상"


"포은선생연보고이"


"영일정씨족보목판"


"이름에 얽힌 설화"


"아버지 시묘살이 하는 19세 정몽주"


"개목사와 포은 선생"


"네가지 덕을 실천한 포은의 생애와 학문"


"고려의 과거제도와 3장의 장원급제"


의를 몸소 실천하다, 제김득배문(김득배를 장사지내며 지은 제문)


"빛을 발한 외교 활동"


유교정신의 실천, 오죄상소문(포은 선생이 오죄와 관련되어 유배되었던 사람들의 사면,복권을 위해 올린 상소문)


포은선생문집(임고서원 목판본으로 간행된 포은선생문집이다. 본 판본은 현재 국내에 단 2종만 전해질 정도로 희귀본이다.)


선죽교에서 피살된 포은 선생, 피살된 자리에 핀 대나무


하늘의 별이 되어 만고의 충의지사로 빛나다.


[정몽주 초상 모사본]


동강 권오창 화백이 2003년 증모한 정모주초상. 임고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3본의 포은 선생 초상 중 보물 1110호인 1629년 어진화사 김식이 그린 승정기사모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간신에서 절의지사로


[장중첩]


장중첩은 일명 녹죽첩이라고도 한다. 포은 선생의 충효정신을 숭장하여 박한 풍속을 고치도록 장려하기 위해 1486년 경상도 관찰사 손순효가 성급한 공문서로, 포은 선생의 후손에게 공부 이외의 요역을 면제 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권벌의 축시와 탄온 이정이 그린 녹죽이 있으며 김현성, 최석정, 민응수의 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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