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환구세덕사&보물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

2023. 12. 4. 05:32바롱이의 쪽지/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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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고성당"


"임고초등학교"


"대환마을과 환구세덕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환구세덕사 (環丘世德祠)]

 

임진왜란 영천 의병장이었던 호수 정세아(15351612) 선생과 그의 아들 백암 정의번(15601592)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정조 1(1777) 서재 뒤에 충현사를 지어 향사하고 강학의 도장으로 사용하여 왔다. 그후 사당의 왼쪽에 충효각이 세워졌다.

 

고종 5(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철거되어 지금은 충효각과 부속건물 2동만이 남아있다.

 

출처:문화재청

 


"보호수 수령 150년 선원리 은행나무"


"환구서원"


"충효각과 충효사"


"선정사"


"대웅전 앞 목불상"


[보물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


나발의 머리에 육계가 붕긋하게 솟은 얼굴은 크기가 알맞아 몸체와 조화를 이루나 치뜬 눈에 길게 찢겨 올라간 눈꼬리, 짧은 인중 아래 가장자리가 쏙 들어가도록 다문 작은 입이 만드는 인상은 온화함보다는 근엄함에 가깝다. 두 무릎 사이가 지나치게 넓다 싶을 정도로 안정된 결가부좌의 앉음새에 잘록한 허리, 자칫 육감적으로 보일 만큼 발달한 앞가슴, 그리고 넓고 당당한 어깨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몸체는 대단히 젊고 강건하지만 다소 유연성이 떨어지고 과장된 느낌이다.

 

몸매를 남김없이 드러낼 정도로 얇은 법의는 오른쪽 어깨와 가슴을 드러낸 채 아래로 흘러내려 양 다리 사이에서 부채꼴의 주름을 만들고 있다.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은 몸에서는 몇 개의 융기선으로 처리된 반면, 왼쪽 팔에 늘어진 무늬는 평행계단식으로 촘촘히 표현되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새로 보완한 오른팔과 두 손은 애초 수인이 지금처럼 항마촉지인이었으리라 추정하고 있으나, 오른팔의 손상이 심한데다 지나치게 몸체에 밀착되어 부자연스럽게 드리워진 왼팔의 손목이 오른발 끝에 놓이는 점을 볼 때 꼭 그렇다고 단정하기는 주저스럽다.

 

앉은키 151㎝, 머리 높이 48㎝, 어깨너비 77㎝, 무릎너비 101㎝의 크기에 윤곽이 뚜렷한 얼굴, 굴곡이 분명한 신체, 반듯한 자세가 퍽 강한 인상을 풍기는 당당한 불상이다.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그 자세에서 멀리 석굴암 본존불의 여운이 간취되기도 한다. 얼마간 경직되고 형식화되어 있으나 비교적 좋은 신체비례나 양감 있는 체구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편단우견에 촉지인을 한 불상형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보물 제5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 (永川 仙源洞 鐵造如來坐像) Iron Seated Buddha in Seonwon-dong, Yeongcheon]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철로 만든 불상이 유행하게 되는데,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永川 仙源洞 鐵造如來坐像)은 안정감 있는 신체 비례와 양감 있는 체구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고려 초기 불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이마 위쪽으로는 고려시대 불상에서 자주 나타나는 반달 모양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얼굴은 둥근 편으로 치켜올라간 눈썹, 긴 눈꼬리, 짧은 인중, 꼭 다문 입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하여 신체의 윤곽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간략한 옷주름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단호사 철불좌상(보물)처럼 완전히 기하학적이고 도식적인 모습은 아니어서 고려시대 철불좌상의 양식 전개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머리에 표현된 반달 모양, 다소 경직된 얼굴 표현, 간략해진 신체 표현 등에서 고려 초기 불상양식을 대변하고 있는 우수한 철불상으로 주목된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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