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오봉산 청평사

2024. 2. 18. 07:01바롱이의 쪽지/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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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강댐 선착장에서 청평사행 배에 승선헌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소양호와 산들을 바라본다. 15분정도 걸려 청평사 선착장에 도착한다.


바위에 청평사 공주와 상사뱀의 전설이 적혀 있다.


맑은 계곡물 위 바위에 공주와 상사뱀 동상이 보인다.


[공주와 상사뱀 설화]

 

청평사에는 당나라 공주와 관련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중국 당나라 태종의 딸 평양공주를 사랑한 청년이 있었다. 태종이 청년을 죽이자 청년은 상사뱀으로 환생하여 공주의 몸에 붙어서 살았다. 당나라 궁궐에서는 상사뱀을 떼어 내려고 여러 치료 방법을 찿아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

 

공주는 궁궐을 나와서 방랑을 하다가 한국의 청평사에 이르게 되었다. 공주굴에서 하룻밤을 자고 공주탕에서 몸을 깨끗이 씻은 공주는 스님의 옷인 가사를 만들어 올렸다. 그 공덕으로 상사뱀은 공주와 인연을 끊고 해탈하였다. 이에 공주는 당나라의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청평사를 고쳐 짓고 탑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때 세운 탑을 공주탑이라고 하고 공주가 목욕한 곳을 공주탕이라고 하며 상사뱀이 윤회를 벗어난 곳을 회전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거북바위]

 

거북바위는 자연 암석으로 예전부터 거북이가 물을 바라보게 되면 청평사가 크게 웅성할 것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바위의 아래쪽에 신규선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 사람은 1915년에 청령사를 정비하고 청평사의 역사책인 청평사지를 편찬하도록 한 사람이다.


[구송폭포]

 

구송폭포는 주변에 소나무 아홉 그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폭포 위쪽에 사람이 쉴 수 있는 구송대가 있다. 구송폭포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아홉 가지 폭포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구성폭포라고도 불린다. 이 폭포에서는 일 년 내내 많은 양의 물이 쏟아져 내린다. 특히 폭포의 양쪽에 수직으로 펼쳐진 절벽은 단정한 모습의 선비처럼 아름답다. 구송폭포는 춘천 서면 삼악산의 등선폭포,남산면 문배마을의 구곡폭포와 함께 춘천의 3대 폭포로 꼽힌다.


"구송폭포"


"공주굴"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청평사삼층석탑 (淸平寺三層石塔)]

 

청평사 입구의 환희령이라는 언덕 위에 있는 3 석탑이다. 일반적으로 탑은 사찰의 중심건물인 금당 앞에 세우는데 탑은 사찰 길목의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홀로 있다.

 

형태는 2 기단(基壇) 위에 3 탑신(塔身)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모서리가 들려 있어 날렵한 감을 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아담하면서도 안정감이 드는 탑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청평사가 고려 광종 24(973) 창건된 사실로 고려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탑은 뱀에 몸이 얽혀 갖은 고생을 하던 원나라 순제(順帝) 공주가 절에 와서 불공을 드린 뱀을 떨쳐버리게 되자 소식을 들은 순제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와 일명공주탑이란 애칭으로도 불리운다.

 

출처:문화재청


[진락궁 이자현 부도]

 

전락공은 이자헌이 죽고 난 후 임금이 내려준 이자현의 시호이다. 이 부도는 청평사를 세 번째로 중창한 고려시대 이자현의 부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만들어진 양식으로 볼 때 1700년대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자현의 생존 시기와 600년의 시간 차이가 나기 때문에 다른 스님의 부도라는 설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자현애 유골은 질그릇으로 만든 함에 넣어서 청량사 북쪽의 청평식암 금처 바위 틈에 안치했다고 한다.


[영지 명문 바위]

 

이 바위의 윗면에 한문으로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심생종종생 :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심멸종종멸 :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사라지네
여시구멸이 : 이와 같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처처안락국 : 곳곳이 모두가 극락세계로구나

이 시는 스님이 깨우침을 얻고 나서 지은 시라는 뜻의 오도송 이라고 알려져 있다.


[오봉산 부용봉과 영지]

 

이자현이 청평사 주변을 방대한 규모의 정원으로 가꾸면서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려 만든, 지금까지 밝혀진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고려정원의 한 흔적이다. 사다리꼴로 가지런히 석축을 쌓고 바로 곁의 계곡물을 끌어들인 영지 안에는 큰 바위돌 세개를 놓고 그 사이에 갈대를 심었으며 연못에 오봉산이 비치도록 했다고 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선동교 아래 문화해설사님이 가르쳐 주신 흔적만 남은 물레방앗간 터가 있다. 이자현의 손때 묻은 고려정원의 잔영이다.


"돌확의 샘물"


"보호수 수령 280년 은행나무" 


[명승 춘천 청평사 고려선원 (春川 淸平寺 高麗禪園) Goryeoseonwon Buddhist Garden of Cheongpyeongsa Temple, Chuncheon]

 

청평사는 고려 선종 6 이자현이 문수원을 중건하면서 선원을 확대한 곳이며, 지형지세를 이용해 자연과 인공을 조화롭게 조성하였다. 회전문(보물) 청평사지(강원도기념물) 많은 유구와 유적이 있다. 곳은 산수가 빼어나며 아늑한 분지에 계곡, 영지(影池), (), 너럭바위, 기암괴석, 폭포 등이 어우러진 절경(絶景)으로 천혜의 산수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명승지다.

 

출처:문화재청


[춘천 청평사 고려선원]

 

거기서부터는 탁 트인 공간이 나오고 시야는 곧장 절터를 더듬어 오봉산 봉우리에 꽂히게 된다. 건물터로 추정되는 잘 다듬어진 석축엘 올라서면 하늘 높이 곧게 자라 천연의 일주문 노릇을 하고 있는 소나무 두 그루가 일품이다. 그 직선 앞으로 윤회를 상징하는 회전문이 사천왕문격으로 서 있고, 회전문에서 다시 일직선으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안치돼 있다. 대웅전 뒤편의 산신각과 극락보전이 청평사 전각의 전부이지만, 대웅전 양 옆, 회전문 양 옆으로 크고 작은 회랑과 전각들이 촘촘히 들어섰을 정교한 축대와 초석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예전 전성기의 청평사 규모를 가늠케 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춘천 청평사 회전문 (春川 淸平寺 廻轉門) Hoejeonmun Gate of Cheongpyeongsa Temple, Chuncheon]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973) 승현선사가 세워 백암선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번에 걸쳐 고치고 절을 넓혔는데 청평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조선 명종 5(1550) 보우선사가 이곳에 다시 고쳐 세운 뒤부터이다.

 

청평사의 회전문은 절에 들어설 만나게 되는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우치려는 의미의 문이다. 규모는 앞면 3·옆면 1칸이며, 앞면의 가운데 1칸은 넓게 드나드는 통로이고 양쪽 2칸은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사람 () 모양을 맞배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간결한 형태로 짜여 있는데, 이는 주심포양식에서 익공계 양식으로 변화하는 모습이다. 건물 안쪽은 벽이 둘러진 공간에 사천왕상 등의 입상을 놓을 있게 했으며, 윗부분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만든 홍살을 설치하였다.

 

16세기 중엽 건축 양식 변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축물이다. 절의 서쪽 언덕에는 한국전쟁 불타버린 극락전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건축의 수법을 보여주던 중요한 건물이었다.

 

출처:문화재청


"옛 석축과 청평사 회전문"


"회전문과 오봉산 부용봉"


"범종각과 회전문"


[청평산 문수사시장경비]

 

이비는 고려 말 원나라에서 청평사에 보내온 대장경과 사찰 후원금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는 당가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국제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려 말 대학자인 이재현이 비문을 짓고 당대 최고의 명필인 문하사준 행촌 이암이 비문을 썻으나 1800년대에 비석이 훼손되어 현재는 비석을 세울 때 받침돌로 썼던 비좌만 남아 있으며 탁본으로 전해진다.


"진락공 중수 문수원비"


"경운루"


"경운루에서 바라본 회전문과 푸른 산"


청평사 여 문화해설사분은 "보우대사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 절에도 박석이 깔린거 아닌가?" 라며 설명해 준다.


"청평사 전경"

관음전, 대웅전, 나한전


[박석과 대웅전 계단 소맷돌]

 

국보로 지정되었던 극락전이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후 지금은 그 기단 위에 대웅전이 들어섰다. 무지개처럼 공굴린 계단의 소맷돌 끝부분이 정교한 조각솜씨를 자랑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극락보전]

 

작은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화려한 꽃창살, 내부 닫집등 국보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왔던 건물이었던 극락보전은 대처승이었던 청평사 주지 일본인 부인이 방화하여 소실 되었다고 한다. 


"보호수 수령 830년, 수령 530년 주목"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 청평사지 (淸平寺址)]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973)에 지어져 ‘백암선원’이라 부르던 유서깊은 사찰이다. 그후에 보현원, 문수원으로 불려오다 조선 명종 때 보우선사가 크게 고쳐 지으면서 이름을 청평사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랜 세월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문수원기비와 국보였던 극락전 등이 불타 없어졌으며, 현재의 극락전은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다. 남아 있는 유물로는 회전문(보물 제164호), 삼층석탑, 진락공 부도, 환숙당 부도 등이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관직에 있던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숨어 지내던 문수원과 영지가 남아 있는데, 이곳은 고려시대의 정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출처:문화재청


[공주탕]

 

공주탕은 공주설화에서 공주가 목욕재계를 하였다는 곳이다. 공주설화는 중국 당 나라 태종의 딸 평양공주가 상사뱀을 구송폭포 아래에 떼어 놓고 절에 올라와 인간세상에서 물든 마음을 깨끗이씻어 내고 스님의 옷을 만들어 가사불사를 한 공덕으로 상사뱀이 윤회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불교에서 목욕은 단순히 몸을 씻는다는 의미 외에도 착하지 않은 마음까지도 함께 씻어 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기우단 터]

 

계곡 건너 기우단 터는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늘에 비가 오게 해달라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기우제는 사찰에서도 지냈지만 마을에서 신성시하던 산꼭대기,마을 제당 등에서 지내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시대 서종(1700-1748)가 쓴 약헌유고」의"청평산기”에 '기우제를 지내면 종종 감응이 있었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청평사에서 기우제를 정성스럽게 지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환적당과 설화당 부도]

 

이 부도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부도로, 동쪽은 서산대사의 손제자인 환적당 의천(1603~1690)의 부도이다. 의천은 전국의 명산대찰을 돌며 공부한 조선 후기 과)이다. 의천의 부도는 그가 공부한 합천 해인사, 대구 용연사, 제천 덕주사 등 여러 곳에 건립되었는데 이는 그 중 하나이다. 하대석부터 지붕돌인 옥개석까지 모두 8각이지만 탑신석만이 둥그런 원형이다.부도 아래 쪽에 환적당이라고 새겨져 있다. 서쪽의 부도는 설화당 부도라고 하는데 어느 시대 누구의 부도인지 알려진것이 없다. 만든 양식은 조선시대 부도이지만 문양이 섬세하고 지붕의 내림마루나 상륜부의 장식 등으로 보아 환적당 부도보다 오래된 조선 중기 이전에 세워진 부도라 생각된다.


해탈문은 이전 청평사 주지 스님이 지었으나 현재는 약간의 형태만 남은 상태다.



 청평사 답사 후 소양강댐 선착장으로 배에 승선한다. 전설과 문화재, 자연 경관등이 푸른 소양호처럼 눈과 마음에 물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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