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

2024. 3. 3. 05:06바롱이의 쪽지/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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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사터]

 

금강교에서 시내를 향하는 길로 곧장 간다. 지금은 신관동으로 옮겼지만 전에는 길 양쪽에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고 지금도 상가와 극장과 은행과 관공서가 모여 있는, 공주의 중심가이다. 그러나 서울로 치면 동네 시장통쯤 되는 기분을 맛보게 할 만큼 공주는 한산한 도시이다. 그래도 이곳이 백제의 공주 시대에 수도의 중심이었음을 알고 본다면 그리 평범해 보이지는 않을 터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역사를 읽어 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답사의 묘미이니 말이다.

시내 한가운데의 대통사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성왕 7년(529)에 중국 양나라 황제를 위하여 창건한 절로 왕도였던 공주 최대의 절이었다. 일제 때 절터를 발굴하던 중에 ‘大通寺’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나와 이곳이 그 역사 속의 대통사터임이 밝혀졌다. 당시 발굴에서 중문터, 탑터, 금당터, 회랑터 등이 밝혀졌으나 그 뒤에 다시 묻어 버려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차게 되었다. 공주 교육청 옆 개울가에는 마름모꼴 초석이 넷 남아 있어 대통사로 들어가던 교각의 초석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적한 주택가의 한 필지, 사진기를 들이대기도 갑갑한 좁은 터였으나, 대통사터를 복원한다고 옆집을 허물고 있다. 공산성말고는 별다른 볼 거리가 마땅치 않은 공주 시내에 본격적인 관광명소라도 하나 만들 참인 뜻을 읽겠다. 터 한쪽에 기둥머리 초석과 깨진 돌조각들이 있어 옛 절터의 흔적을 알겠고, 좁은 돌담 안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그래도 여름이면 담자락에 능소화가 피어 그런대로 운치를 내었는데, 너무 수선스런 복원이 그나마 남은 고적한 맛조차도 앗아가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차라리 지금 국립공주박물관 뜰에 옮겨져 있는 대통사터의 석조를 제자리에 안치하는 것이, 대통사 자리를 더 빛나게 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통사지 석탑과 고양이"


[보물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 (公州 班竹洞 幢竿支柱) Flagpole Supports in Banjuk-dong, Gongju]

 

기도나 법회 등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사찰의 입구에 세워 부처와 보살의 성덕을 표시하는 기를 당(幢)이라 하며, 이를 달아매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이 장대를 양옆에서 지탱하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대통사의 옛터에 남아 있는 이 당간지주는 서로 마주보는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으나, 바깥쪽 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굵은 띠 모양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기둥머리 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았으며, 안쪽 위·아래 2곳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네모난 구멍을 파 놓았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지주의 받침돌과 한쪽 기둥의 아래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형태가 간결하다. 이 일대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백제의 유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받침돌에 새겨진 안상(眼象)을 조각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

 

대통사 터 한귀퉁이에 서 있는 당간지주 한 쌍 덕으로 이곳이 1,500년 전의 절터임을 겨우 알아볼 수 있다.

이 당간지주는 귀퉁이가 깨진 초석 위에 서 있으나 당간지주 자체는 거의 손상이 없이 매우 늠름하다. 옆면 테두리를 따라서 선을 돋을새김했고, 깨진 기단부나마 안상이 조각되어 있어 해서 전체적으로는 간결한 인상이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큰절로서 명목을 유지했음도 짐작하겠다. 높이 329㎝로 보물 제150호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반죽동 당간지주와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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