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완성_2020년 4월(Vol. 1)

2020. 5. 10. 07:59뚜벅뚜벅 여행의 완성/여행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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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완성_2020년 4월]

[프롤로그]

황무지/T.S엘리엇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후략)

4월의 노래/박목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영국 시인인 T.S엘리엇의 작품 '황무지'에서 표현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 아닌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고 화창하고 따스한 빛나는 꿈의 계절이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4월은 24절기 중 봄의 끝자락 절기이며 본격적인 농사 시작의 절기인 청명(淸明)과 곡우(穀雨)가 있다.

이달 4일은 청명(淸明)이고 설, 단오, 추석과 함께 우리나라의 4대 명절 중 하나인 한식(寒食)은 5일. 19일은 곡우(穀雨)다. 

24절기 중 다섯 번째 절기인 청명(淸明)은 한식의 하루 전날이거나 때로는 한식과 같은 날이 된다. 또 많은 경우 식목일과도 겹친다.

청명(淸明)이 되면 날씨가 맑아지고 밝으며 온화하며 화창한 좋은 계절이 되니 농가에선 묘목을 심고 모종을 준비한다.

청명이 지나고 15일이 되면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穀雨)이다.

곡우(穀雨)는 곡식 곡(穀)자와 비 우(雨)자로 사람이 사는데 가장 중요한 백곡이 기름지게 자라도록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절기로 벼농사 외에도 각종 농작물의 파종 시기가 겹치는 본격적으로 농사철이 시작되는 때다.

경북 경주 흥무로 벚꽃길(2019년 4월 5일, 경주시외버스정류장 건너편에서 바라본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 형산강과 만개한 흥무로 벚꽃길)

전남 구례 외곡검문소 섬진강과 벚꽃길(2020년 4월 5일, 근경은 벚꽃이 70% 이상 졌으며 원경은 아직 분홍빛으로 만개한거처럼 보인다.)


[여행]

[뚜벅뚜벅 대한민국 답사여행]

뚜벅뚜벅 아름다운 우리땅을 여행하며 삶의 체취와 역사의 흔적이 서린 문화유산을 만나다.

[뚜벅뚜벅 대한민국 답사여행_4월, 벚나무]

벚나무는 장미과에 속한 낙엽활엽교목이다.

벚나무 구별은 꽃피는 시기, 암술대와 꽃자루에 있는 털의 유무, 꽃잎의 길이나 형태 등을 분류 기준으로 하는데, 명확하게 분류하기란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리 쉽지 않으나 꽃이 피었을 때는 쉽게 구별이 된다. 울릉도의 특산이라 할 수 있는 섬벚나무가 가장 먼저 흰색에 가까울 정도로 연한 분홍 꽃을 피우고, 올벚나무나 왕벚나무는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이 피고, 산벚나무는 잎과 함께 피는 것이 다르다. 가지가 수양버들처럼 늘어지는 수양벚나무는 병자호란 때 중국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이 목재로 활을 만들고 껍질은 활을 감을 때 쓰기 위해 들여왔다고 하는데, 다른 벚나무는 열매가 6월에 익는 반면 수양벚나무는 10월에 익는다. 일본에서 관상용으로 개발된 사쿠라 즉, 겹벚나무는 5월 초에 분홍색 겹꽃이 잎이 나오기 전에 피는데,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비옥하고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라지만 결실이 안 되기 때문에 접목이나 삽목으로 증식해야 한다. 벚나무의 꽃은 꽃봉오리가 터지기 시작해서 일주일 정도 밖에 안 가지만 통째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긴 꽃자루에 매달려 있는 다섯 장의 작은 꽃잎이 산들바람에 휘날리며 하나하나 떨어지므로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벚나무 껍질은 화피(樺皮)라는 이름으로 활을 만드는데 필수품으로 들어가는 군수물자이었다. 병자호란을 겪고 중국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은 그 때를 설욕하려고 대대적인 북벌 계획을 세우고 활을 만들 준비로 서울 우이동에 많은 벚나무를 심게 하였다. 

또한 고려시대 팔만대장경판에 쓰인 나무의 60%이상이 산벚나무로 만들어 졌음이 나무학자 박상진 교수의 과학적인 조사에서 처음으로 밝혀지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어느 지방에 가도 봄이면 온 천지를 화사하게 장식해 주는 벚나무야말로 비록 생애가 짧아 무상하고 다른 나라 국화라 하지만 우리 생활과 너무나도 가까운 훌륭한 조경수라 할 수 있다.

출처: 우리 생활 속의 나무, 박상진 교수의 나무 이야기 벚나무


[대한민국 문화유산 벚나무(자생지)]

문화재청에 대한민국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벚나무와 자생지는 총 4곳의 천연기념물(올벚나무 1곳, 왕벚나무 자생지 3곳)과 1곳의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왕벚나무 자생지 1곳)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올벚나무는 꽃이 잎보다 먼저 피고 다른 벚나무보다 일찍 꽃이 피기 때문에 올벚나무라고 부르며 병자호란(1636) 이후 인조는 오랑캐에게 짓밟혔던 기억을 되새기며 전쟁에 대비하고자 활을 만드는데 쓰이는 벚나무를 많이 심게 했다. 당시 화엄사의 벽암스님도 그 뜻에 찬성하여 주변에 올벚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그 중의 한 그루가 살아남은 것이 구례 화엄사의 올벚나무이다.

꽃놀이용 벚나무가 아닌 전쟁을 대비하여 자신의 껍질을 내어준 호국의 나무이다.

왕벚나무는 한때 일본의 나라꽃이라 하여 베어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에는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없으며, 순수한 우리나라의 특산종으로서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왕벚나무가 도입되어 가서 자라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승철 성균관대 생명과학과 교수팀은 2014년 ‘미국 식물학회지’에 실린 논문에서 제주 왕벚나무가 자생하는 올벚나무를 모계로, 벚나무(또는 산벚나무)를 부계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잡종이라고 밝혔다.

이후 국립수목원의 지원 아래 명지대·가천대 연구자가 참여해 왕벚나무의 전체 유전체(게놈)를 해독한 연구결과가 과학저널 ‘게놈 바이올로지’ 9월호에 실렸다. 이 연구에서는 제주의 왕벚나무와 인접 종은 물론 일본에서 최초로 왕벚나무가 기록된 도쿄대 부속 식물원(고이시카와 식물원)에서 왕벚나무 표본을 확보해 분석했다. 연구자들은 “완전한 유전체를 비교한 결과 제주 왕벚나무와 일본 왕벚나무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서로 다른 식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출처:한겨레(한·일 ‘벚꽃 원조’ 논란 끝? 제주 왕벚나무 ‘탄생의 비밀’ 확인)


1. 천연기념물 제38호 구례 화엄사 올벚나무

올벚나무는 황해도, 지리산, 보길도 및 제주도에서 자란다. 꽃이 잎보다 먼저 피고 다른 벚나무보다 일찍 꽃이 피기 때문에 올벚나무라고 부른다.

화엄사의 올벚나무는 나이가 약 3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2m, 뿌리부분 둘레 4.42m이다. 병자호란(1636) 이후 인조(재위 1623∼1649)는 오랑캐에게 짓밟혔던 기억을 되새기며 전쟁에 대비하고자 활을 만드는데 쓰이는 벚나무를 많이 심게 했다. 당시 화엄사의 벽암스님도 그 뜻에 찬성하여 주변에 올벚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그 중의 한 그루가 살아남은 것이다.

화엄사의 올벚나무는 나라를 지키려는 조상들의 의지가 담겨있는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구례 화엄사 올벚나무


2. 천연기념물 제156호 제주 신례리 왕벚나무 자생지

왕벚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 나무로 꽃은 4월경에 잎보다 먼저 피는데 백색 또는 연한 홍색을 띤다. 지형이 높은 곳에 자라는 산벚나무와 그보다 낮은 곳에 자라는 올벚나무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이란 설도 있으나, 제주도와 전라북도 대둔산에서만 자생하는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신례리 왕벚나무 자생지는 제주시에서 서귀포시로 가는 길목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왕벚나무는 한때 일본의 나라꽃이라 하여 베어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에는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없으며 순수한 우리나라의 특산종으로서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왕벚나무가 도입되어 가서 자라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벚나무는 우리나라가 원산지로서 그 수가 매우 적은 희귀종이므로 생물학적 가치가 높고, 식물지리학적 연구가치가 크므로 신예리 왕벚나무 자생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제주 신례리 왕벚나무 자생지


3. 천연기념물 제159호 제주 봉개동 왕벚나무 자생지

왕벚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꽃은 4월경에 잎보다 먼저 피는데 백색 또는 연한 홍색을 띤다. 지형이 높은 곳에 자라는 산벚나무와 그보다 낮은 곳에 자라는 올벚나무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이란 설도 있으나, 우리나라 제주도와 전라북도 대둔산에서만 자생하는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왕벚나무는 한때 일본의 나라꽃이라 하여 베어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에는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없으며 순수한 우리나라의 특산종으로서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왕벚나무가 도입되어 가서 자라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개동 왕벚나무 자생지는 제주시에서 동부산업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로 100m쯤 떨어져 두 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높이는 15m 정도이다. 현재는 돌을 쌓아 작은 석축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왕벚나무는 우리나라가 원산지로서 그 수가 매우 적은 희귀종이므로 생물학적 가치가 높고, 식물지리학적 연구가치가 크므로 봉개동 왕벚나무 자생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제주 봉개동 왕벚나무 자생지


4. 천연기념물 제173호 해남 대둔산 왕벚나무 자생지

왕벚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꽃은 4월경에 잎보다 먼저 피는데 백색 또는 연한 홍색을 띤다. 지형이 높은 곳에 자라는 산벚나무와 그보다 낮은 곳에 자라는 올벚나무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이란 설도 있으나, 제주도와 전라남도 대둔산에서만 자생하는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왕벚나무는 한때 일본의 나라꽃이라 하여 베어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일본에는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없으며, 순수한 우리나라의 특산종으로서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왕벚나무가 도입되어 가서 자라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둔산 왕벚나무 자생지는 대흥사 뒷편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나이는 알 수 없으며 나무의 높이는 15m, 둘레는 0.8m이다.

왕벚나무는 우리나라가 원산지로서 그 수가 매우 적은 희귀종이므로 생물학적 가치가 높고, 식물지리학적 연구가치가 크므로 대둔산 왕벚나무 자생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해남 대둔산 왕벚나무 자생지


5.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51호 관음사의왕벚나무자생지

왕벚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 나무로 꽃은 4월경에 잎보다 먼저 피는데 백색 또는 연한 홍색을 띤다. 지형이 높은 곳에 자라는 산벚나무와 그보다 낮은 곳에 자라는 올벚나무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이란 설도 있으나, 제주도와 전라북도 대둔산에서만 자생하는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관음사의 왕벚나무 자생지는 왕벚나무 자생지로서는 가장 많은 개체수를 이루고 있으며 꽃의 형질도 매우 우수하여 보존할만한 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제주 관음사 왕벚나무자생지


[뚜벅뚜벅 대한민국 답사여행_4월, 미선나무]

미선나무는 1919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후 유럽과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금은 여러 나라에서 훌륭한 조경수로 귀한 대접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 나무이다. 

이른 봄 잎이 나오기 전에 개나리꽃과 비슷하게 생긴 하얀 꽃이 마치 작은 초롱과 같이 피는데, 가장자리가 네 갈래로 벌어졌고 3~10개가 모여서 층으로 달리며 향기 또한 그윽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다. 미선나무 꽃은 개나리꽃보다 조금 작고 꽃잎이 서로 포개져 있으며 백색으로 향기가 있는 것이 서로 다른 점인데, 서양사람들은 꽃 모양이 비슷해서 하얀 개나리라 부르기도 한다.

가지는 진한 자주색이며, 새로 나온 것은 둥글지 않고 네모지다. 꽃이 지고 나면 바로 잎이 가지 양쪽으로 사이좋게 마주 보고 나온다. 나무 모양은 대개 우산형인데, 전정할 때 가지 밑 쪽 3분의 1만 남기고 모두 잘라주어 충실한 가지가 나와야 보기가 좋다. 꽃 색이 연분홍인 것도 가끔 있는데 이것을 분홍미선이라 하고 상아색인 것은 상아미선이라고 한다. 염분이 많은 곳에서는 잘 자라지 못하며 비옥한 곳보다는 다소 건조하고 척박한 데서 맹아지가 많이 나와 나무 모양이 좋다.

미선이라는 고운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열매가 특이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서 둥글게 펴 그 위에 한지나 명주 천을 붙여 만든 둥그런 부채를 미선이라고 하는데, 직경이 약 2.5cm 되는 미선나무 열매가 꼭 그것과 닮아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출처:우리 생활 속의 나무


[대한민국 문화유산 미선나무]

문화재청에 대한민국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미선나무 자생지는 충청북도 괴산군 3곳, 영동군 1곳, 전라북도 부안군 1곳등 총 5곳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미선나무 자생지 첫 발견지임을 알리는 미선나무자생지 기념비(천연기념물 14호(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산 21-3번지)로 지정됐던 미선나무 자생지 보호구역에서 140여 m 떨어진 초평의용소방대 건물 옆에는 이곳이 미선나무 자생지 첫 발견지임을 알리는 기념비 등이 세워져 있다.)와 천연기념물 지정 표시석

보존가치를 잃어 천연기념물 해제된 진천미선나무자생지(세계 1속 1종 희귀식물이자 멸종위기 2급인 미선나무 자생지가 처음 발견된 곳은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산 21-3번지이다. 1917년 정태현 박사가 이곳에서 군락지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1919년에는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이 새로운 종임을 확인했다. 이어 1924년 일본인 학자 이시토 야쓰토무(石戶谷勉)가 학명 'Abeliophyllum distichum'으로 학계에 보고했다. 용정리 미선나무는 1957~1960년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에 실렸고 1962년 12월 3일에는 천연기념물 14호로 지정됐으나 무단 채취로 보존 가치를 잃어 1969년 9월 8일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됐다. 이후 충북 괴산군 장연면 송덕리와 추점리, 칠성면 율지리, 충북 영동군 매천리,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등이 미선나무 자생지 5곳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해제된 군락지에 심은 푸른 잎의 미선나무

미선나무 군락지 표지판


1. 천연기념물 제147호 괴산 송덕리 미선나무 자생지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식물로 개나리와 같은 과에 속하는데, 개나리와 마찬가지로 이른 봄에 꽃이 잎보다 먼저 난다. 높이는 1∼1.5m 정도로 키가 작고, 가지 끝은 개나리와 비슷하게 땅으로 처져 있다. 미선나무는 열매의 모양이 부채를 닮아 꼬리 미(尾), 부채 선(扇)자를 써서 미선나무라 하는데, 하트모양과 비슷하다.

미선나무는 한때 많은 사람들이 함부로 꺾어 가지고 가서 일부 알려진 자생지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미선나무 보존 위원회가 결성되고 서울대학교 관악수목원과 자연보존협회가 참가하여 미선나무를 되살리는 사업을 하고, 옮겨 심을 어린나무를 주변에 나누어줌으로써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괴산의 미선나무는 산골짜기 작은 시내 옆의 경사진 야산에서 자라고 있다. 이 지역은 흙이 적고 곳곳에 큰 바위와 굵은 돌이 쌓여 있는데, 이는 미선나무가 다른 나무들과의 경쟁력이 약해서, 다른 나무들이 살지 않는 황폐한 곳에서 경쟁을 피해 살기 때문이다.

괴산의 미선나무 자생지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매우 귀한 미선나무가 모여 자라고 있는 곳으로서, 그 희귀성과 식물 분류 및 분포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괴산 송덕리 미선나무 자생지

송덕리 미선나무 푸른 잎과 말라버린 갈색의 열매

송덕리 미선나무 푸른 잎과 새하얀 꽃


2. 천연기념물 제220호 괴산 추점리 미선나무 자생지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식물로 개나리와 같은 과에 속하는데, 개나리와 마찬가지로 이른 봄에 꽃이 잎보다 먼저 난다. 높이는 1∼1.5m 정도로 키가 작고, 가지 끝은 개나리와 비슷하게 땅으로 처져 있다. 미선나무는 열매의 모양이 부채를 닮아 꼬리 미(尾), 부채 선(扇)자를 써서 미선나무라 하는데, 하트모양과 비슷하다.

괴산 추점리의 미선나무 자생지는 농경지로부터 가까운 작은 야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이 자생지는 흙이 적고 곳곳에 큰 바위와 굵은 돌이 쌓여 있는데, 이는 미선나무가 다른 나무들과의 경쟁력이 약해서 다른 나무들이 살지 않는 황폐한 곳에서 경쟁을 피해 살기 때문이다. 이 자생지는 군락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미선나무가 전체적으로 분포하지만, 빽빽히 모여 있지는 않다. 

괴산 추점리의 미선나무 자생지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매우 귀한 미선나무가 자라는 곳으로서 그 희귀성과 식물분류학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괴산 추점리 미선나무 자생지

추점리 미선나무 푸른 잎과 새하얀 꽃


3. 천연기념물 제221호 괴산 율지리 미선나무 자생지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식물로 개나리와 같은 과에 속하는데, 개나리와 마찬가지로 이른 봄에 꽃이 잎보다 먼저 난다. 높이는 1∼1.5m 정도로 키가 작고, 가지 끝은 개나리와 비슷하게 땅으로 처져 있다. 미선나무는 열매의 모양이 부채를 닮아 꼬리 미(尾), 부채 선(扇)자를 써서 미선나무라 하는데, 하트모양과 비슷하다.

괴산 율지리 미선나무 자생지는 율지리 마을에서 멀지 않은 야산 중턱에 위치한다. 이곳은 바위와 굵은 돌이 쌓여 흙이 적은데, 이는 미선나무가 경쟁력이 약해서 다른 나무들이 살지 않는 황폐한 곳에서 경쟁을 피해 살기 때문이다. 율지리 미선나무 자생지 주변에는 자연환경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큰 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작은 나무들만 보인다.

괴산 율지리의 미선나무 자생지는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미선나무가 모여 자라고 있는 곳으로서, 그 희귀성과 식물분류학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괴산 율지리 미선나무 자생지

율지리 미선나무 푸른 잎과 갈색 열매

율지리 미선나무 푸른 잎과 새하얀 꽃


4. 천연기념물 제364호 영동 매천리 미선나무 자생지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식물로 개나리와 같은 과에 속하는데, 개나리와 마찬가지로 이른 봄에 꽃이 잎보다 먼저 난다. 높이는 1∼1.5m 정도로 키가 작고, 가지 끝은 개나리와 비슷하게 땅으로 처져 있다. 미선나무는 열매의 모양이 부채를 닮아 꼬리 미(尾), 부채 선(扇)자를 써서 미선나무라 하는데, 하트모양과 비슷하다.

영동 매천리 미선나무 자생지는 백천 냇가 낮은 구릉지에 위치한다. 이곳의 미선나무들은 무리지어 있거나 띄엄띄엄 떨어져 자라고 있으며, 훼손되어 복구한 것이 아닌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영동 매천리 미선나무 자생지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매우 귀중한 미선나무가 자라고 있는 곳으로서,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영동 매천리 미선나무 자생지

매천리 미선나무 푸른 잎과 새하얀 꽃

매천리 갈색 낙엽 위 새하얀 미선나무 꽃


5. 천연기념물 제370호 부안 미선나무 자생지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식물로 개나리와 같은 과에 속하는데, 개나리와 마찬가지로 이른 봄에 꽃이 잎보다 먼저 난다. 높이는 1∼1.5m 정도로 키가 작고, 가지 끝은 개나리와 비슷하게 땅으로 처져 있다. 미선나무는 열매의 모양이 부채를 닮아 꼬리 미(尾), 부채 선(扇)자를 써서 미선나무라 하는데, 하트모양과 비슷하다.

이 미선나무 군락지는 변산반도 직소천과 백천냇가 일대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선나무의 수가 많고 잘 보존되어 있다.

미선나무는 세계에서 단 한 종류 밖에 없는 희귀식물로서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며 부안의 미선나무 군락지는 미선나무가 자랄수 있는 남쪽한계선이 되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부안 미선나무 자생지

부안 미선나무 푸른 잎과 새하얀 꽃


[대한민국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이란(World Heritage)?]

「세계유산협약」(1972)에 의거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뛰어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있다고 인정하여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한 유산으로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분류됨. 출처:문화재청


[세계유산현황]

2019년 7월 현재 세계유산은 전 세계 167개국에 분포되어 있으며, 총 1,121점(2019년 등재기준) 가운데 문화유산이 869점, 자연유산 213점, 복합유산이 39점이다. 한편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목록에는 총 53점(2019년 등재기준)이 등재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세계유산은 ‘해인사 장경판전(1995년)’, ‘종묘(1995년)’, ‘석굴암 ·불국사(1995년)’, ‘창덕궁(1997년)’, ‘수원화성(1997년)’,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년)’, ‘남한산성(2014년)’, ‘백제역사유적지구(2015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2018년)’, ‘한국의 서원(2019년)’으로 총 14점이 있다.(출처:유네스코한국위원회)


[뚜벅뚜벅 대한민국 세계문화유산_4월, 한국의 서원(2019)]

요약

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 시설의 한 유형으로,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에까지 향촌 지식인인 사림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 유산은 교육을 기초로 형성된 성리학에 기반한 한국 사회 문화 전통의 특출한 증거이다. 이 유산은 동아시아 성리학 교육기관의 한 유형인 서원의 한국적 특성을 나타낸다.

영문명

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등재기준]

기준 (iii) 신청유산은 조선시대 교육 및 사회적 활동에서 널리 보편화되었던 성리학의 탁월한 증거이다. 이 유산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 사이에 건립되었으며, 교육을 기초로 형성된 독특한 역사 전통과 성리학의 가치를 나타낸다. 향촌 지식인들은 이 유산을 통해 성리학 교육을 적절하게 수행하기 위한 교육 체계와 건축물을 창조하였으며, 전국에 걸쳐 성리학이 전파되는데 기여하였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

신청유산은 향촌 지식인들에 의해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 사이에 건립되었다. 이 유산은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의 9개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이 유산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한국 사회의 많은 부분에 기초가 되었던 성리학 교육을 증진한 교육기관의 탁월한 증거이다. 서원에서 향촌 지식인들은 교육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교육 체계와 유형적 구조물들을 창조하였다. 그들은 성리학 경전과 연구를 수행하였고,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이상적 인간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은 향촌사회의 선현들을 제향하였고, 제향인물을 통해 강한 학문적 계보를 형성하였다. 또한, 향촌 지식인들은 이 유산을 기초로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활동들을 통해 성리학이 사회 전반에 전파되는데 기여하였다.

이 유산은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던 성리학이 지역화되고 변영된 톡특한 과정을 통합적으로 보여준다. 이 유산은 한국에서 서원 건축의 정형화에 의해 완성된 독특한 문화전통을 나타낸다. 9개로 구성된 이 유산은 한국 서원의 특성과 발전을 보여주며, 서원이 건축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발전하였는지 각각의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완전성]

신청유산은 한국의 성리학의 발전과 서원 유형의 정립과정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서원 9개로 구성되어 있다. 각 구성요소는 집합적으로 신청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보여주며, 각각 하나의 온전한 서원으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완전성을 갖추고 있다.

신청유산은 조선시대 서원의 필수 공간 요소인 제향공간, 강학공간, 교류와 유식공간을 구성하는 각 건축물뿐만 아니라 원래의 지형, 주변환경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제향공간을 구성하는 사우와 사우 내부의 위패, 전사청 등이 온전하게 존재하며, 강학공간을 구성하는 강당과 재사, 도서관, 각 건물의 편액 등이 온전하다. 누각 등 회합 및 유식공간의 구성요소 역시 온전하며, 주변의 경관, 지형 등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서원 주변의 경관 중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입증할 중요한 부분은 모두 유산구역이나 완충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진정성]

신청유산은 형태와 디자인, 자재와 구성물질, 전통적 기법과 관리체계, 입지와 주변환경 측면에서높은 수준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신청유산은 서원 설립운동의 초기에 해당하는 16세기 중반부터 약 1세기 기간 동안 건립된 대표적 서원으로서, 역사발전 과정에서 훼철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였다. 제향자의 연고 및 경관을 포함하는 입지 환경, 제향공간, 강학공간, 교류와 유식공간의 건축 배치, 각 건물의 유형적 형태, 목재와 기와를 사용하는 물질 구성, 보존 관리의 체계 등을 원래의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다.

형태와 디자인 측면에서 신청유산은 서원 역사의 건축적 구현을 보여준다. 한국의 서원은 제향, 강학, 교류와 유식 공간의 유기적 결합을 하나의 전형적인 형태로 완성하였고, 이를 지금까지 변형 없이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목조 건축기법과 좌식형 생활 관습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건축 형태를 만들어 내었다.

자재와 구성물질, 전통적 기법과 관리체계 측면에서, 신청유산은 서원 설립 당시의 건축적 결과물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조선시대 건축기법과 자재로 최소한의 보수를 해오고 있으며, 진정성과 완전성을 해치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전통적인 기법으로 영건하였던 원형을 따라 현재는 공인된 기술인력과 훈련받은 장인들에 의해 최소한의 보수를 행한다. 신청유산은 문화재청과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관리하며, 전승되어오는 전통 기술을 적용한다. 목조건축에 위해를 줄 수 있는 흰개미, 부식, 화재 등에 대해 공인된 전문집단의 관리를 받고, 예방조치를 한다.

신청유산은 기록유산, 무형유산에 속하는 것들도 잘 보존, 전승하고 있다. 서원을 거쳐간 인물들이 남긴 전적, 문집, 기문, 목판 등은 잘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제향은 지금까지 창건 당시의 모습 그대로 계승되어 시행되고 있다. 기록유산과 무형유산 모두 개별 유산들이 지속된 전통을 보여준다.

[보존 및 관리체계]

신청유산인 한국의 서원은 9개의 서원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 신청유산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온전히 포함하고 서원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경계가 설정되었다. 또한 서원의 보호·관리는 대한민국의 문화재보호법과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관련 조례 등을 통해 법적 보호를 받고 있으며, 이미 국가 사적으로 각각 지정되어 해당 서원은 물론 주변 지역까지도 보호·관리되고 있다.

신청유산은 제향-강학-교류와 유식이라는 기능과 유기적인 공간구성을 통해 서원의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이에 각각의 기능에 해당되는 건축물과 시설물들이 유산구역에 포함되었고, 서원의 입지와 주변 환경 등을 고려한 산림, 농경지, 강, 계곡 등이 완충구역에 포함되어 보호·관리되고 있다.

현재까지 신청유산을 위협하는 개발 및 환경압력 등 유산에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요인은 경미하다. 이는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주변 지역의 토지 이용과 개발 행위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청유산 대부분이 목재 건축물인 점을 감안한다면 잠정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화재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소화설비 및 상시 감시체계를 구축하여 재해 및 재난에 대응하고 있다. 또한 세계유산 등재 이후 방문객과 관광 산업에 의한 서원의 보호・관리에 대한 영향은 향후 증대할 것으로 예상되나 해당 서원과 지방자치단체에서 서원 보존관리 계획을 수립하여 영향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다각적인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출처:유네스코한국위원회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 2019)


[대한민국 세계문화유산_4월, 한국의 서원(2019)] 

1. 영주 소수서원(사적 제55호)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 출처:문화재청

한국의 서원, 영주 소수서원(안향 초상(모사본)과 명종어필 소수서원 현판)


2. 경주 옥산서원(사적 제154호)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곳은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 2층 건물인 무변루, 학생들의 기숙사로 동재인 민구재, 서재인 암수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 출처:문화재청

한국의 서원, 경주 옥산서원


3. 정읍 무성서원(사적 제166호)

신라후기의 학자였던 최치원(857∼?)과 조선 중종(재위 1506∼1544)때 관리였던 신잠(申潛)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으로, 교육기능과 제사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숙종 22년(1696)에 임금으로 부터 이름을 받아 무성서원이라 하게 되었다.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사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사당, 현가루, 동·서재, 비각, 명륜당 등이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성종 15년(1484)에 세웠고, 문루인 현가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2칸·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이곳에는 성종 17년(1486) 이후의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 등의 귀중한 서원자료가 보존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 출처:문화재청

한국의 서원, 정읍 무성서원


4. 안동 도산서원(사적 제170호)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출처:문화재청

한국의 서원, 안동 도산서원


5. 장성 필암서원(사적 제242호)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선조 23년(1590)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1624)에 다시 지었다. 현종 3년(1662)에 임금께서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167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청절당의 처마밑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초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 출처:문화재청

한국의 서원, 장성 필암서원


6. 안동 병산서원(사적 제260호)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유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화기제작을 비롯하여 군비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 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병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 - 출처:문화재청

한국의 서원, 안동 병산서원


7. 논산 돈암서원(사적 제383호)

김장생(1548∼1631)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건립한 서원이다. 서원은 훌륭한 분들의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양성하던 지방교육기관이며,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원래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경회당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쓰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다. 후세에 이 경회당과 양성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세우고 김장생을 추모하여 후학에 힘썼다. 현종 원년(1660)에 왕이 돈암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추가로 모시었다. 

이 서원에는 『황강실기』, 『사계유교』, 『상례비요』 등의 서적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사우(祠宇), 응도당, 장판각 등의 건물들과 하마비, 송덕비가 남아 있다.

이 서원은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도 남아 보존된 47개의 서원중의 하나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있는 곳이다. - 출처:문화재청

한국의 서원, 논산 돈암서원


8. 달성 도동서원(사적 제488호)

도동서원은 1605년(선조38)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선중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있다. - 출처:문화재청

한국의 서원, 달성 도동서원


9. 함양 남계서원(사적 제499호)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조선 명종 7년(1552)에 지었다.

명종 21년(1566)에 나라에서 ‘남계’라는 사액을 내려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6년(1603)에 나촌으로 옮겨 지었다가, 광해군 4년(1612)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숙종 때 강익과 정온을 더하여 모셨다. 따로 사당을 짓고 유호인과 정홍서를 모셨다가, 고종 5년(1868)에 이는 훼철되었다. 앞쪽 낮은 곳에는 공부하는 강학공간을 두었고 뒤쪽 높은 곳에는 사당을 두어 제향공간을 이룬 전학후문에 배치를 하였다.

누문인 봉수루를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그 앞쪽 양 옆으로 유생들의 생활공간인 양정재와 보인재가 있다. 재 앞에 각각 연못과 애련헌·영매헌이 있다. 내삼문 안쪽으로 사당이 있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밖에 전사청과 고직사·묘정비각 등이 있으며,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으며, 『어정오경백편』·『고려사』 등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적으로 9곳에 이르며, 그중 주된 곳이 남계서원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 출처:문화재청

한국의 서원, 함양 남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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