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고구려비&먹거리

2020. 12. 18. 08:29뚜벅뚜벅 대한민국 국보/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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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유일 고구려비"

[국보 충주 고구려비]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사자(使者)’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募人三百)’·‘신라토내(新羅土內)’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영문 설명]

This is the only existing Commemorative Stone from Goguryeo in the Korean Peninsula. The monument was set up to commemorate the occupation of a number of fortresses along the Namhangang River by Goguryeo troops. It was discovered in 1979 in a village named Ipseok.

The monument had already been severely eroded by time and local residents' negligence when discovered. It is in the form of a natural stone pillar, a smaller version of the monument to King Gwanggaeto of Goguryeo located in Manchuria, China. The inscription is engraved on four sides, but only the letters on the front and one side are legible for now. Based on the mention of King of Goryeo in the preface of the inscription, Goryeo here means Goguryeo, the inclusion of the names of official posts unique to Goguryeo, and the terms referring to Silla used by Goguryeo, this is undoubtedly a Goguryeo monument.

Judging from what is legible, the monument is believed to date to around the late fifth century when King Jangsu of Goguryeo moved the capital to Pyeongyang and extended the Dynasty's territory southward to the basin of the Hangang River. With its rarity and valuable content illustrating the relations between Goguryeo, Silla and Baekje, this monument is of great importance for the study of Korean history.

출처:문화재청

국보 충주 고구려비


[선돌마을에서 찾은 국보 비석]

돌이 하나 서 있어 마을 이름이 선돌마을이었다. 한자로 옮기니 입석마을이 됐을 뿐, 그 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관심을 두는 이도 없었다.

설화에 따르면 조선 시대 숙종이 이곳을 지날 때 마을에 사는 전의 이씨에게 두 돌기둥을 기준으로 안쪽의 산과 밭을 하사했는데, 돌기둥 하나가 충주 고구려비다. 숙종도 이 비석이 무엇 인지 모르고 흔한 돌기둥으로 여긴 것이다.

그 돌기둥은 고구려 장수왕 때 남진 정책으로 충주가 고구려 땅이 된 뒤에 세운 고구려비다. 판독 가능한 비문만 모아도 그동안 공백으로 남았던 충주 지역에서 삼국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입증하는 유물이자,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고구려 비석이다. 국보 20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충주 고구려비전시관에 있다.

'칠전팔기의마을'이 쓰인 입석마을비가 고구려비전시관 옆으로 이전하였다.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충주에서 고구려를 만나다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앞에 고구려의 상징물인 삼족오 조형물이 있다. 태양에 산다는 전설의 새 삼족오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며, 강인한 고구려의 기상을 나타낸다. 고구려의 기상은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안에서도 만날 수 있다. 전시관으로 들어가다 보면 벽화를 재현한 전시물을 따라 복도를 지나는데, 말을 타고 달리는 ‘개마무사’ 조형물이 여행자를 반긴다

개마무사는 고구려의 주력부대였다. ‘개마’는 말에 갑옷을 입힌 것을 말하며, 그 말을 탄 무사와 기병대를 개마무사라고 불렀다. 개마무사는 앞장서서 쳐들어가는 돌격대이자, 마지막 방어책이었다. 화살도 뚫지 못하고 창날에도 끄떡없는 철갑옷을 입은 개마무사는 승전의 수호신이었다.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확장할 때 개마무사가 5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시관 통로 벽에 남진 정책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역사, 당시 주변 국가와 관계 등이 적힌 기록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지날 때마다 고구려에 대해 알게 된다. 고구려는 알면 알수록 강한 나라였다. 드디어 강한 나라 고구려의 최고 상징물, 충주 고구려비를 만난다.

출처:충주시

삼족오 조형물/충주고구려비전시관/개마무사 조형물


[충주고구려비를 품은 고구려의 최전선 마을]

돌이 하나 서 있어 마을 이름이 선돌마을이었다. 한자로 옮기니 입석마을이 됐을 뿐, 그 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관심을 두는 이도 없었다.

설화에 따르면 조선 시대 숙종이 이곳을 지날 때 마을에 사는 전의 이씨에게 두 돌기둥을 기준으로 안쪽의 산과 밭을 하사했는데, 돌기둥 하나가 충주 고구려비다. 숙종도 이 비석이 무엇 인지 모르고 흔한 돌기둥으로 여긴 것이다.

그 돌기둥은 고구려 장수왕 때 남진 정책으로 충주가 고구려 땅이 된 뒤에 세운 고구려비다. 판독 가능한 비문만 모아도 그동안 공백으로 남았던 충주 지역에서 삼국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입증하는 유물이자,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고구려 비석이다. 국보 20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충주 고구려비전시관에 있다. 

출처:충주시


"중원문화의 중심 충주"


"충주 고구려비 발견의 감동"


[충주 고구려비의 의의]

우리나라 유일한 고구려 비석

첫째,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비석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충주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릉비와 함께 한국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열쇠로 만주부터 남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고구려의 존재를 뚜렷이 보여준다.

둘째,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를 동이라 하고 신라 왕을 매금이라 부른 점은 고구려가 상위의 입장에서 신라를 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행여제 표현이나 고구려 왕이 신라 매금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내용도 고구려와 신라가 주종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신라 내에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신라토냉당주는 신라에 파견된 고구려의 군사령관이었을 것이다.

셋째, 3국 간의 정치적 관계 뿐만 아니라 문화적 교류와 영향을 알 수 있다.
당주도사 같은 직명은 고구려 문화가 신라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불교 등 고구려 문화가 백제왕실에 전해졌듯 고구려 비석 문화도 백제와 신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넷째, 고구려의 관등조직이나 인명표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내당주, 고모루성수사등 관직명과 전부 하부 등 출신부명, 그리고 태사자, 주부, 대형 등 관등명, 다우환노, 귀덕, 보노 등 고구려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의 인명 표기가 관직명 · 출신 부명 · 관등명 · 인명 순으로 기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고구려에서도 이두식 표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절사, 절교사 등의 용어는 이두로서 신라의 이두가 고구려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충주 고구려비의 이두식 표기는 순한문식으로 광개토대왕릉비와 대조를 이룬다. 고구려의 이두식 표기는 평양성 각석에서도 확인된다.


"충주고구려비 탁본"


"충주고구려비 제1면(뒷면)"


"충주고구려비 제1면(뒷면)"


"충주고구려비 제2면(우측면)"


"충주고구려비 제2면(우측면)"


"충주고구려비 제3면(앞면)"


"충주고구려비 제3면(앞면)"


"충주고구려비 제4면(좌측면)"


"충주고구려비 제4면(좌측면)"


"우리나라 유일한 고구려 비석, 국보 충주 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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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자유시장 오공주왕만두(아침 6시부터 영업하시는 서글하고 친절하신 할머님이 운영한다.)

커다란 양은 솥에 끓여지는 시래기국


시래기 순댓국(뚝배기에 토렴한 밥을 담은 시래기 순댓국, 돼지 내장과 담백한 당면순대, 새콤 달금한 양념의 아삭하고 시원한 깍두기, 김치, 오가피 넣어 끓인 물 등을 내준다.)


시래기 순댓국(알맞게 간이 된 구수한 감칠맛의 된장 국물에 졸깃한 듯 부드러운 시래기, 토렴한 밥, 졸깃한 돼지 내장, 담백한 당면순대 등을 담고 얼큰한 다진양념, 채 썬 파를 넣었다. 얼큰한 양념을 풀어 먹는다. 아침 이른 시간에 맛보는 따뜻하고 배부른 한 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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