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만석보터&만석보 혁파 선정비

2021. 8. 13. 05:38바롱이의 쪽지/전라북도

반응형

"만석보, 정읍천, 만석보터"


[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 만석보터]

정읍군 이평면 팔선리(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에 있으며 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1892년 5월에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오자마자 온갖 가렴주구를 일삼는 가운데, 농민을 함부로 징발하고 남의 산에서 수백 년 묵은 소나무를 베어다 쓰면서 보를 쌓고는 물세를 거두어들였다. 원래 정읍천 아래에는 배들평 농민들이 쌓은 만석보가 있었다. 만석보는 광산보 또는 예동보라고도 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이 보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배들평에는 풍년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하여 만석보라고 불렸다.

조병갑은 만석보 바로 아래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로 보를 쌓게 하였다. 이 새 만석보는 너무 높아서, 홍수가 지면 오히려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들이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보를 쌓은 첫해에는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서는 한 마지기당 두 말, 나쁜 논에서는 한 말씩 수세를 걷었다. 특히 그 무렵에는 삼남지방에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보세를 감해달라고 관아로 간 농민들은 보세 감면은커녕 매를 맞고 나왔다. 만석보는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1894년 1월에 봉기하여 고부 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만석보로 달려와 속 시원히 헐어버리고 말았다.

너르디너른 배들평가를 가로지르는 방죽 위에는 1973년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건립한 만석보 유지비가 있다. 유지비 앞에 서면 앞뒤로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저편 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아스라이 백산이 보인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 만석보지]

보(洑)라는 것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둑을 쌓고 냇물을 가두어 두는 곳을 말한다.

원래 정읍천과 태인천 상류에 농민들이 설치한 보가 있었으나, 고종 30년(1893)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두 하천이 합류하는 하류지점에 새로 만석보를 축조하였다. 만석보가 완공된 후 가을에 새 보에 대한 수세라는 명목으로 많은 양의 쌀을 착취하자 농민들이 분개하여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민란을 일으켜 동학농민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만석보는 농민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지금은 둑을 쌓았던 흔적만이 남아있다. 1973년 동학농민운동의 근원지인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

 출처:문화재청

만석보 유지비(조병갑이 물세를 받기 위해 만든 만석보터에 세운 기념비이다. 기념비 뒤로 동진강이 보인다.)


정읍 예동마을 만석보 혁파 선정비(1892년 5월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이미 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을 강제로 동원, 새로운 보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수세 면제의 약속을 어기고 더욱 수탈하며 탐학을 저질렀다. 이에 ‘배들평야’ 농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봉기하니,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보의 일부만 동학농민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1898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안길수가 나머지를 철거 하였다. 이는 만석보로 상징되는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대한 재발 방지 약속과 마무리였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군수안후길수만석보혁파선정비’를 세웠다. 그 이후 비문의 형태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을 맞이하여 뜻있는 지역민의 건의 에 따라 비각을 세우게 되었다.)


"사인여천, 제폭구민, 보국안민"


1894,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조형물

동학농민혁명과 고부봉기(1893년 1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고부의 동학교인과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명분으로 삼아,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을 목적으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결의하며,동학농민혁명을 준비하였다. 사발통문은 기존의 봉기와는 달리 치밀한 계획을 거쳐 작성되었는데, 특히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할 것을 명시한 것은 단순봉기가 아니라 전국적인 혁명이었음을 알게 한다. 

1894년 1월 8일, 혁명에 참여할 군중을 모으는 걸굿이 이곳 예동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합류한 군중은 그 당시 교통의 요지인 말목장터에 집결하였고, 전봉준·김도삼 .정종혁등의 지휘에 따라 1월 10일 고부관아를 점령하였다. 고부봉기는 우리나라 민족민주운동의 첫발을 디딘 동학농민혁명의시작이며, 이곳 예동마을은 고부봉기의 시 발점 으로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1894,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 상징조형물(반봉건, 반외세 근대 민족민주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혁명의 시작이 된 고부봉기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전체적인 형상은 보름달과 이를 받치고 있는 세 개의 날개, 그리고 그 아래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로 구성되어 있다. 보름달은 봉건적 질서에 억압받던 동학교인과 농민들의 삶에 희망의 빛이 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를 표현하였고, 새로운 세상의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보름달을 받치고 있는 날개는 외세의 침략과 수탈 속에서 피워낸 농민들의 자주독립 의지가 세상에 펼쳐지는 형상을 나타내며, 그 아래 거대한 그림자는 동학농민군이 꿈꾸던 반봉건 반외세 의지가 전국화 세계화되는 것을 상징한다. 본 작품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된 고부봉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조형물로서,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낸 동학농민군의 굳센 의지를 잊지 않고 우리 가슴에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