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말목장터와 감나무

2021. 8. 13. 05:47바롱이의 쪽지/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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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곳"

[전라북도 기념물 제110호 말목장터와감나무]

정읍시 이평면 면사무소 앞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말목장터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배들평 농민 수천명이 고부로 가기 전에 모였던 곳으로 제1차 백산기포를 할 때까지 장두청을 두고 진을 설치했던 장소이다. 또한 이곳에는 180년 정도 된 감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 아래에서 말목장터에 모여든 농민들에게 전봉준이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농민 수탈의 실정을 알리고 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고 전한다.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이 감나무의 감은 따지 않는다고 한다.

출처:문화재청


말목장터와 감나무(부안, 태인, 정읍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있는 장터로, 갑오년 1월 고부봉기의 불이 번진 곳이다.

조병갑의 만석보 물세 징수에 시달린 농민들은 수십 명씩 관아로 가서 세를 줄여달라고 진정했으나, 오히려 난민 취급을 받고 잡혀 들어가거나 쫓겨났다. 진정과 같은 합법적 방법의 한계를 분명하게 깨달은 농민들은 봉기의 길로 나섰다.

1893년 11월 초순에 전봉준 등 19명의 농민 지도자들은 죽산마을 송두호의 집에 모여 봉기를 모의하고 격문과 행동목표를 쓴 사발통문을 작성했으며 궐기할 날만을 기다렸다. 11월 30일에 익산 군수로 발령을 받은 조병갑이 뒷손을 써서 다시 고부 군수로 부임하게 된 것이 1894년 1월 9일, 드디어 때가 왔다.

1월 10일 밤, 미리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 배들평(梨坪) 말목장터로 모여들었다.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이고 손에 손에 괭이와 죽창을 든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여 리 떨어진 관아까지 가는 길에 마을마다에서 농민들이 쏟아져나와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불어났다. 1월 11일 새벽, 이들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사람들은 오늘도 여전히 세 갈래 길로 오가지만 지금 말목장터에서 그날의 함성과 열기를 되새기게 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건물들이 들어서서 비좁아진 옛 장터 한 귀에 선 감나무 가지만이 바람에 흔들린다. 1994년 초 감나무 옆에 말목정이 세워졌다.

이평은 원래 동진강을 통해 이곳까지 배가 들어온다고 해서 배들평이라 불렸다. 그러나 일제 때 일본인들이 배들평을 배나무가 있는 곳으로 잘못 이해하여 이평(梨坪)으로 표기한 후 지금까지 이평으로 굳어졌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체목 감나무(말목장터 감나무는 2003년 태풍으로 도복(쓰러져 넘어짐)되어 고사하였다. 현재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보존처리 후 전시중이다.)

2003년 태풍으로 도복(쓰러져 넘어짐)되어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보존처리 후 전시중인 말목장터 감나무


"말목장터 유지비"

말목정(말목정은 본래 이곳으로 부터 서남쪽 70m 감나무(지방기념물 110호)로부터 5m지점에 삼강오륜의 숭고한 정신의 계승과 실천으로 살기좋은 고장을 이룩 하고저 건립 되었었다. 그러나 유적지 광장정비 사업으로 말목정 및 창건비를 원형대로 이곳으로 옮겼도다.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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