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정읍 전봉준 유적과 단소

2021. 8. 14. 04:57바롱이의 쪽지/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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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대장 전봉준 단소]

동학농민군 대장 전봉준 단소(위치 :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 산10-3

본 단소는 1893년 11월 ‘사발통문 거사계획,은 물론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된 1894년 1월 10일(양력 2.25) '고부봉기' 와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동학농민군 대장 전봉준을 기리기 위해서 ‘‘동학농민혁명 60주년’이 되는 1954년 11월 25일, 천안전씨 문중에서 설단하였다.

갑오민주창의 통수천안전공봉준지단의 단비 이름은 당대 석학이자 사학자이셨던 고 김상기 박사가 지었다. 그 당시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란’이라 불리었고, 전봉준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은 ‘동학당의 수괴로, 참여자들은 ‘반란군'이라 하여 ‘역적’으로 인식되던 시대였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1994. 5.11)을 기념하고자 천안전씨 문중에서 ‘전봉준 장군 유적 보존회'를 구성 하고 뜻있는 문중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전봉준 대장이 13세 때 지은 ‘백구' 라는 한시와 운명전에 지은 '절명시' 등을 돌에 새겨 설치 · 정비하였다.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500미터 떨어진 조소마을에 전봉준 대장의 옛집이 있고, 150미터 북서쪽에는 선친 전창혁의 묘소가 있다.)


"전봉준 장군 단소"


"전봉준 장군 운명시"

때를 만나니 하늘과 땅이 힘을 모아주고
운이 다하니 영웅도 할바가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따랐나니
내 부끄러울것이 없는데
나라 사랑하는 마음 그 누가 알아주리

갑술사월 모광쓰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전국)

새야 새야 녹두새야
웃녘 새야 아랫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함박 쪽박 열나무 딱딱 후여
(전라도)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다고
봄철인 줄 알지 마라
백설이 휘날리면
먹을 것 없어
(원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잎에 앉은 새야
녹두잎이 까딱하면
너 죽는 줄 왜 모르니
(평양)

새야 새야 팔왕(八王)새야
네 무엇하러 나왔느냐
솔잎 댓잎이 푸릇푸릇
하절인가 하였더니
백설이 펄펄 흩날리니
저 강 건너 청송녹죽이 날 속인다

(오지영, 『동학사』)


"조소마을 음용대 사발통문 전봉준"


전봉준 선생 고택 우물(예로부터 우리고장 정읍은 수질이 좋은 물이 풍부한 고장으로 알려져 왔으며 곳곳에 우물이 형성되고 각 마을에는 공동우물이 발달하여 왔다. 이 우물은 조소마을 주민들이 사용해 온 공동우 물로 근대사의 여명을 밝힌 동학농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선생이 이곳에 거주할 때 사용했던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는 곳이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사적 제293호 정읍 전봉준 유적]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조선 고종 27년(1890)에 동학에 몸을 담아,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리들의 횡포에 맞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조직해 동학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앞면 4칸·옆면 1칸의 초가집으로 안채가 구성된 남향집이다. 동쪽부터 부엌·큰방·웃방·끝방 순서의 일(一)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남부지역 민가 구조와는 다른 방향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출처:문화재청


사적 제293호 정읍 전봉준 유적(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있는 이 집은 갑오농민전쟁 당시 전봉준이 살던 집으로 사적 제2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의 모습은 원래 있던 방 1칸, 부엌 1칸, 광 1칸의 오막살이를 훨씬 번듯하게 복원한 것이며, 집 주위에 흙담을 두르고 한옆으로는 집터만한 마당까지 내어 잔디를 심어놓았다. 고부봉기가 있은 뒤에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는 동학 교인으로 지목되는 사람들의 집을 모조리 불질렀는데, 1974년에 이 집을 해체·부수할 때 ‘戊寅二月十六日’(1818년 또는 1878년 2월 16일)이라 적힌 상량문이 나온 것으로 보아 당시 이 집은 완전히 타지 않고 일부가 남았던 모양이다.

안내판에는 생가라고 씌어 있으나 전봉준은 1855년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당촌마을의 전봉준 생가터는 지금 밭이 되어 있다. 양반계층에 속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몰락하여 몹시 가난했던 전봉준은 생계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며 원평, 태인 등지로 떠다니며 살았고 농민전쟁 직전에는 이곳 조소마을에 살며 동학의 고부 접주로 있었다.

‘공맹(孔孟)의 학’을 닦던 전봉준은 유학의 가르침만으로는 세상을 구제하는 데 이미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있던 중에 ‘보국안민’이라는 동학당의 주의에 감동하고, ‘마음을 바로한 자의 일치는 간악한 관리를 없애고 보국안민의 업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1890년 무렵 동학에 입도했다고 한다.

그는 입도 후 포교활동을 하지는 않았고, 체포된 후 심문받을 때 동학에 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동학을 대단히 좋아했다”라고 대답했다. 전봉준이 ‘교도로서 믿음에 충실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용무지지(用武之地)를 발견하고 동학에 들어갔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어쨌든 그의 입장은 종교적 영역에 머물려 하던 북접과 달리 부패한 현실을 개혁하고 하루라도 빨리 무고한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자는 현실 개혁적 노선을 걷던 남접계 인물들의 입장과 같았다.

다 알고 있다시피, 그는 농민전쟁의 전 과정을 통해 눈부신 지도력과 조직력을 발휘했고, 1894년 12월에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순창읍 피노리에서 잡힌 후 심문을 받을 때도 “너희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너의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것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마라. 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법을 받지는 아니하리라”하며 기개에 찬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는 1895년 3월 29일에 손화중, 김덕명 등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농민전쟁의 실패와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부르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는 아직도 전국에서 조금씩 가사를 달리하며 전해지고 있다. 노랫말에 나오는 파랑새는 그의 성인 전(全) 자를 풀어 팔왕(八王)새라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전국)

새야 새야 녹두새야
웃녘 새야 아랫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함박 쪽박 열나무 딱딱 후여
(전라도)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다고
봄철인 줄 알지 마라
백설이 휘날리면
먹을 것 없어
(원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잎에 앉은 새야
녹두잎이 까딱하면
너 죽는 줄 왜 모르니
(평양)

새야 새야 팔왕(八王)새야
네 무엇하러 나왔느냐
솔잎 댓잎이 푸릇푸릇
하절인가 하였더니
백설이 펄펄 흩날리니
저 강 건너 청송녹죽이 날 속인다
(오지영, 『동학사』)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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