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문의향교&문의문화재단지

2021. 8. 27. 06:26바롱이의 쪽지/충청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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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문의향교 (淸原 文義鄕校)]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언제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양성산 아래에 있던 것을 광해군 1년(1609)에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숙종 9년(1683)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들은 1980년에 다시 짓고 1988년에 보수한 것이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대성전은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단순한 맞배지붕집으로,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을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앞면 4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강당이다. 이외에 내삼문·외삼문 그리고 향교 입구에 홍살문 등이 있다.

앞쪽에는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쪽 높은 곳에는 제향의 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운영하였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하는 기능만 남아있다. 『교임선생안』·『청금록』 등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어서 이 지방의 향토사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문의문화예술의거리"


"고향을 그리는 마음, 조동마을탑"


"문의 수몰유래비"


"문의문화재단지 입구 성문"


"솟대와 대청호"


"고인돌"

비원 수산리 고인돌, 문의 가호리고인돌, 내수 학평리 고인돌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청주 관정리 고가 (淸原 官井里 古家)]

 

이 민가는 조선시대 후기 건물로 낭성면 관정리의 신방호(申邦浩)씨가 살던 가옥을 원래의 모습 그대로 이전 복원한 집으로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초가이다. 가옥의 구조는 ‘一’자집 형태의 안채와 대문이 있는 광채가 있다.

상량문이 없어 정확한 건립연대는 파악할 수 없으나, 조선후기 건물로 추정된다. 현재의 건축은 1992년 문의 문화재단지를 조성하면서 1994년 관정리에서 이건(移建)하였으며, 당시 소유자인 신병호씨의 증언대로 5대조가 대대로 살아온 집이라고 하면 최소 200여 년 전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건축의 양식은 당시 부농이 주택으로 초가집의 가구구조보다는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였으며 세부 치목 또한 매우 정교하고 평면구성도 5칸 집으로 전형적인 충북의 민가건축의 몸체 형식이고 대청에 신주를 모셔둘 신주 함을 만들어 설치하였다. 당시의 초가집에 비해 매우 건축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대문간채와 광채는 안채와 담장 사이에 대문간채가 따로 있었으나 이전하면서 대문간채를 별도로 건축하지 않고 광채와 같이 ‘ㄱ’자집으로 건축하였다. 이는 문화재단지의 지형적인 조건에 맞추어 건축되면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부농의 주택으로 초가집의 가구구조보다는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였으며 세부 치목 또한 매우 정교하고 전형적인 충북의 민가건축으로 당시의 초가집에 비해 매우 건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노현리 고가 (淸原 蘆顯里 古家)]

조선시대 후기 건물로 문의면 노현리 이양훈(李讓勳)씨가 살던 가옥을 이축한 것으로 당초에는 강릉김씨(江陵金氏) 김승지(金承旨)의 종가(宗家) 댁이었다.

가옥의 구조는 안채가 ‘ㄱ’자 형태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광채와 사주문(四柱門), 측간(厠間)은 목조초가이다. 광채는 ‘一’자 집이다. 1993년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1980년 6월 전국 취락 및 전통가옥(민가)조사 기록대장에 의하면 약200년 전에 지었으며, 엄씨, 김씨가 살다가 연안 이씨가 입주후 이성훈씨가 살았다고 한다. 또한 조사 당시에 안채, 사랑채, 곳간, 축사 등 4채의 전통기와집이었다고 조사되어 왔다.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이건하여 재건축되었으며 현재는 ‘ㄱ’자형 안채와 ‘1’자형의 대문간 및 곳간, 축사로 건축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건축되지 않았는데 이건하는 시기에 사랑채가 소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안채의 평면형식은 충청지역 민가의 특징을 갖추게 구성되어 있고 건축의 가구기법은 일반민가보다 세부분까지 정교하게 가공되었다. 또한 이전과정에서 안채의 지붕의 합각부분이 조금 높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의 평면형식은 충청지역 민가의 특징을 갖추게 구성되어 있고 건축의 가구기법은 일반민가보다 세부분까지 정교하게 가공되어 문화재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옹기장 박재환옹(옹기는 점토와 천연잿물을 사용하여 1,200℃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질그릇을 말하며, 옹기장이란 전통기법에 따라 독과 항아리를 만드는 장인을 가리킨다.

 

박재환 옹기장은 1982년 이곳 봉산리 점촌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6대째 전통웅기 도공으로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박재환옹의 7대조부터 천주교 신자였는데, 6대조 박태진공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하여 옹기를 굽기 시작한 이후 옹기마을로 번성하여 마을이름도 점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 옹기마을이 형성된 것은 미호천 유역에 점토가 많아 태토를 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박재환옹이 주로 만드는 옹기는 항아리, 소줏고리, 장군, 자배기 등의 생활용기이다.)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문의문화재단지는 1980년 대청댐 건설이 계기가 되어 1992년부터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총 4만여 평의 대지 위에 문화재 단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곳은 청주 시내 유 · 무형의 문화재 등을 수집 전시함으로써 인류 문명의 발달과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재현하고 조상의 삶과 얼을 되살리고 배우기 위한 역사의 산교육장이다.

 

단지 내에는 문의 아득히 고인돌, 미원 수산리 고인돌, 내수 학평리 고인돌이 이전되어 있고 문의현의 관아 객사 건물인 지방유형문화재 제49호인 문산관이 이전 복원되었으며 낭성면 관정리와 문의면 노현리, 부강면 부강리에서 민가가 이전되었으며, 서길덕 효자각, 김선복 충신각 및 문의지역에 있던 옛 비석도 이전되어 있다.

 

옛 조상들의 생활 풍습을 알기 위하여 양반 가옥, 주막집, 토담집, 대장간, 성곽 등이 고증을 거쳐 건립되었으며 유물전시관에는 낭성면 무성리에 있는 영조대왕태실 조성을 기록한 지방유형문화재 제 70호인 영조대왕태실가봉의궤를 비롯하여 군내에서 수집한 유물을 전시한 유물관과 백제부터 근대까지 기와를 시대별로 분류한 기와 전시관이 있다. 

 

출처:청주시청


"가덕 국전리 소나무와 문의 문신관"


가덕 국진리 소나무, 기증 이은봉(이 소나무 3그루는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국전리 음짓마을(문의IC 일원) 수호목이었다. 2001년 청주-상주 간 고속도로 착공으로 베어질 위기에 있던 소나무들을 이 마을 출향인사인 이은봉씨가 사재를 털어 문의 문화재단지로 옮겨 심은 것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문의 문산관 (淸州 文義 文山館)]

 

문산관은 조선시대 문의현의 객사이다. 객사는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 보름으로 대궐을 향하여 절을 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한 관아건축이다. 건물구조는 지붕이 좀더 높은 3칸의 정당이 중앙에 있고 그 좌측에 4칸, 우측에 3칸의 익실(翼室)을 두었으며, 전면에 중문․외문, 측면에 무랑 등이 부속되었고, 정당은 벽돌을 깔고 좌․우익실은 한국식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이 건물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766년(현종7년) 문의읍지에 현령 이명하가 옮겨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지붕의 암막새 기와에‘옹정육년 무신사월(擁正六年 戊申四月)’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1728년(영조4년)에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 건물은 1979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문의향교 옆으로 옮겼다가 1997년 문의문화재단지 내 현 위치에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부강리 고가 (淸原 芙江里 古家)]

 

이 집의 안채는 조선시대 후기 건물로 부용면 부강리 김종철(金鍾喆)씨가 살던 고가를 이전 복원한 것으로 ‘ㄱ’자집 형태의 목조기와집이다. 광채는 지붕을 얇은 판석으로 덮은 돌기와집(석와가(石瓦家))형태로 중부지방의 산골부락에 많이 있었던 형태이다. 가옥의 구조는 안채가 ‘ㄱ’자형태의 목조와가이고 광채는 ‘一’자 돌기와집이다. 1995년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1982년 전국 취락 및 전통가옥(민가)조사 기록대장에 의하면 1950년대까지 거주하였던 송동촌씨의 3대 선친이 건축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건립년대는 확인할 수 없다. 현재는 문의문화재단지 내에 ‘ㄱ’자형 몸채와 대문채가 이건되었다. 그러나 1982년 조사기록대장의 사진에 의하면 대문간채가 없었으며 건물로 진입하는 입구의 방향도 사랑방쪽으로 배치되어 있어 현 상태와는 다른 분위기였을 것이다. 특히 집을 진입하는 방향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문화재단지의 조성과정에서 원형대로 배치하기가 곤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랑방 쪽은 우진각 지붕이고 안방 쪽 날개채는 맞배집 형태이다.

건축의 형식은 일반 서민민가 중에서 전통 기와집의 형식이며 구조양식이 민도리 3량구조로 아담하고 소박한 민가 주택으로 문화재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문의현의 옛 비석(이곳의 비석들은 옛 문의현 지역인 문산리, 미천리 일대에 있었던 관찰사 또는 현령들의 공덕비와 선정비이며 1979년 대청댐이 수몰되면서 문의면 미천리에 보관 하였다가 1997년 4월 이곳 으로 이전 하였다. 근세에 세운 이갑수 면장과 주사 안승묵의 구휼비도 있다.)


"양반가옥과 김선복 충신각"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청주 문산리 돌다리 ([淸原 文山里 石橋])]

청원 문산리석교는 원래 대청댐 수몰전에는 문의초등학교 정문에서 남쪽으로 100m 전방에 있던 것인데 1980년 대청댐 건설로 문의면 미천리에 문산관과 함께 이전하였다가 2002년 3월 문의문화재단지로 재이전하였다.

이 석교에 대한 문헌은 조선 헌종 초기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처음으로 나온다. 축조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데 교각내에 을묘이월(乙卯二月)이라는 각자가 남아 있다.

교각 상판은 2.5m×0.3∼0.9m 규모의 화강석과 청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총 10개이며, 석주는 1.3m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판의 장대석(長臺石)은 장축을 남북으로 하여 2매씩 연결하여 놓고 동서로 5매씩 연접하여 마루식으로 만들었다. 남북 장축 중간에 동서로 교각이 받치고 있으며, 석재의 크기는 일정치 않다. 또한 석재(石材)는 거친 다듬하였으며, 석주(石柱)를 갖춘 시렁교이다.

이 석교는 역사도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충청북도 내에서도 옥천청석교, 진천농교, 청주 남석교(南石橋)와 함께 몇 기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석교이다.

석교의 구조는 하부에 석주를 세우지 않고 통돌을 사용하여 교각의 역할을 하고, 멍에석을 가구하고 상부에 넓은 석판재로 덮어 마감하였다. 특히 청주 남석교보다 훨씬 고식기법을 사용하였으며 형태는 매우 안정되어 보이고 구조적 균형감이 잡혀 있어 문화재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중심부 교각 아래 을(乙)각자"


"오창 학소리 유적"


"대청호 조각공원과 대청호미술관"


"애국지사 일곱분의 상"


"가족 - 사랑, 이창림"


"바라보기 3, 임종찬"


"바다를 기억하며, 최성열"


"꿈마중 - 호수, 김경숙"


"사랑으로..., 이기수"


"망루"


"풍요로운 내일, 이상필"


"야! 신난다, 강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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