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1. 06:44ㆍ바롱이의 쪽지/강원도
[철원 토성리 지석묘군&철원 갈말읍 토성]
토성교와 토성리 마을표석
[강원도 기념물 철원지석묘군 (鐵原支石墓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에 있는 이 고인돌군은 탁자식으로, 남대천의 강변을 따라 같은 형태, 같은 방향, 일정한 간격으로 일직선상에 만들어졌다. 원래는 7기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2기만 남아있다. 2기 중 제1호는 돌방을 이루었던 4개의 받침돌 가운데 1개가 없어져 내부가 드러나고 있으며, 그 위에는 타원형의 덮개돌이 올려져 있다. 돌방의 크기에 비해 거대한 덮개돌은 길이 4.02m, 너비 3.05m이다.
고인돌 부근에서 석기류와 토기류 등의 유물 20여 점이 발견되어 부장품이 함께 묻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근처 토성(土城)에서 토기 조각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청동기시대 무덤 및 당시의 사회구조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철원지석묘군(한탄강의 상류 남대천(南大川)을 따라 평야지대에 분포돼 있던 이곳 고인돌들은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14기나 있었다는데, 전쟁통에 대개 파괴되고 지금은 2기뿐이다. 이곳과, 마을을 조금 지나면 밭 가운데 또 하나가 있다.
토성리 고인돌은 북방식으로 그 규모가 웅장하다. 길고 넓적하지만 다소 약해뵈는 받침돌에 비해 그 위에 얹은 타원형의 둥근 덮개돌은 대패로 밀어낸 듯이 평평하고 크면서 두께는 20㎝ 정도로 얇은 잘생긴 돌이다. 시신은 덮개돌 아래 돌로 세운 다리 사이에 두고, 돌촉·돌칼 등 부장품도 함께 넣어 또 다른 생명의 연장을 기원하면서 양쪽 공간을 막는다. 이런 고인돌은 생김새가 책상과도 같다 해서 탁상식이라고도 한다.
고인돌 바로 옆에 동네 아이들 놀이터가 있는데다, 이 돌무덤 덮개가 하도 넓고 평평해서 아이들이 올라가 놀기엔 그만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놀이터를 제쳐두고 이 고인돌 위에 올라앉아 공기도 하고 땅뺏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논다. 고인돌을 이렇게 방치하는 한 뾰족한 방법이 없을 듯싶다. 바로 옆엔 버스가 다니는 큰길이고 고인돌상회·고인돌식당 등도 있어 이 고인돌의 유명도를 짐작할 만하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석묘 부근 강아지
토성리 벽화
철원 토성리 초원목장 옆 지석묘 제4호(고인돌상회를 지나 북쪽으로 1㎞쯤 가면 밭 가운데 또 하나의 고인돌이 있다. 역시 북방식으로 덮개돌도 두툼하고 의젓한데 보호가 엉망이다. 고인돌이 밭 가운데 뙤똑하게 돌출된 곳에 올라앉아 가뜩이나 안정감이 없는데다 고인돌을 보호한다는 철난간이 고인돌의 키를 훌쩍 넘어설 만큼 크고 너무 바짝 쳐져 있어 답답하다. 그 안에 옹색하게 갇힌 고인돌의 신세가 따분하게만 여겨진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남대천과 철새떼, 토성리 마을
[강원도 기념물 철원 갈말읍 토성 (鐵原 葛末邑 土城)]
토성리 마을의 밭을 둘러 싸고 있는 흙으로 쌓은 성과 군탄리 마을의 옛 풍전역터에 놓여 있는 직육면체의 석조물이다.
점토를 이용해 직사각형으로 쌓아올린 이 성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탄한 곳에 설치되어 있다. 원래는 제법 큰 규모의 성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3면의 성벽이 없어지고 한쪽면의 성벽만 남아있다. 성안에는 당시의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 흔적이 남아 있고, 무늬없는 토기조각이나 석기 등이 발견되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의 장군 마부대와 용골대가 하룻밤 사이에 이 성을 쌓았다고 하나 전혀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일 뿐이다.
받침대 위에 놓여 있는 직육면체의 석조물은 옆의 4면에 ‘□□□순찰사 이공호민 익영대(□□□巡察使 李公好敏 益詠臺)’라는 글씨를 큼지막하게 새겨 놓아, 이호민을 기리고 있는 표석으로 보인다. 이호민은 조선 순조 1년(1801) 과거에 급제하여 그 이듬해에 어사가 되었고,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참의를 지냈던 인물로, 순조 11년(1811) 강원관찰사에 임명되어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는 부패된 정치와 어지러운 민심으로 곳곳에서 난이 일어나고, 흉년까지 겹쳐 어려움을 당하던 때로, 이 관찰사는 힘을 다하여 민심을 살펴 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고루 구제하는 등 많은 업적을 베풀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생전의 그의 은혜를 잊지 못하던 이 고장 사람들은 서울과 서북을 통하는 중요한 길목인 이곳에 그를 기리는 표석을 세워두었는데, 오늘날까지도 이렇듯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호민의 생애로 보아 1800년대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이며, 지금은 비각을 세워 그 안에 모셔두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토성 석조물
철원 갈말읍 토성(다시 토성초등학교 앞으로 돌아나와 들길로 내려가면 너른 밭 한복판에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있다. 사각형으로 흙을 쌓아올려 구축한 보기 드문 중국식 토성으로, 둘레 1㎞, 높이 10m, 성벽 아랫부분의 두께 10m, 윗부분은 4m에 달했으나 지금은 원형의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높이 5~6m, 길이 70~80m 정도만 남은, 그 잘생긴 토담 같은 성축을 볼 수 있다.
이 토성에 대한 기록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토성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왔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나라 장군 마푸타[馬夫大]와 룽쿠타[龍骨大]가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을 침략하러 가던 중 김화 오성산 진터골에 진을 쳤다. 이때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洪命耉)와 병마절도사 유림(柳琳) 장군이 포위하자 마푸타군은 이곳 토성리 들판으로 후퇴, 단 하룻밤 사이에 성을 쌓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6년 8월 성터에서 사람이 살았던 주거 흔적과 민무늬토기편, 석기류를 비롯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조사·분석한 결과 이 토성은 적어도 삼한시대 무렵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지역은 남대천 하류 부근에 위치하는 청양분지(淸陽盆地)의 중심이며, 동·서·남쪽의 세 방향으로 뚫린 협곡의 중심부이다. 삼한시대에 벌써 이 요충지에 토성을 쌓았던 것이다. 청나라 군사는 예전부터 있었던 이 토성을 이용하여 속임수를 썼을 것인데,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서는 또 하룻밤 사이에 토성을 하나 뚝딱 쌓을 수 있다는 청나라의 위세에 얼마나 간담이 서늘했을까. 이 토성은 우리나라에 이런 형식의 성터가 흔치 않아 초기의 축성이 어느 계통인가를 살피는 데 귀중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24호이고, 마을 이름 토성리도 이 토성에서 비롯됐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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