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강원도의 수부, 원주 강원감영

2021. 10. 15. 07:05바롱이의 쪽지/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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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강원도의 수부"

[사적 원주 강원감영 (原州 江原監營)]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의 26개 부, 목, 군, 현을 관할하던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조선 태조 4년(1395)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됨에 따라 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했던 곳이다.

감영의 규모는 선화당(정청)을 비롯하여 재은당(내아), 포정루(정문), 4대문, 객사 및 부속건물 등 31동 건물이 있었으나 원주시 청사, 재향군인회관 등이 생기면서 그 모습을 잃어 버려 현재는 선화당, 포정루, 청운당 등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 2000년 발굴조사 결과 중삼문터, 내삼문터, 공방고, 책방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포정루에서 중삼문터와 내삼문터를 거쳐 선화당으로 이어지는 보도, 선화당을 중심으로 하여 외곽으로 둘러쳐진 담장터, 행각터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선화당 뒤편에 있는 연못터인 방지의 호안석축 등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잘 남아 있다. 

강원감영지는 선화당, 포정루, 청운당 등 당시의 건물이 원래의 위치에 잘 남아 있고, 중삼문, 내삼문, 공방고터, 책방고, 보도, 담장, 행각 등이 있던 흔적과 같은 관련 유구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또한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의 건물터 등이 그 아래층에 그대로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관아 건물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영문 설명]

Gangwongamyeong, the provincial office of Gangwon-do, was the center of administrative affairs in the province covering 26 administrative units large and small. It was established in 1395 (4th year of the reign of King Taejo) and operated for 500 years until 1895 (32nd year of Gojong) when the eight-province system was abolished and the country was divided into 23 administrative districts (bu) instead.

The provincial office originally consisted of 31 buildings such as Seonhwadang (main office), Jaeeundang (residence), Pojeongnu (front gate), four main gates in the four directions, and guesthouse as well as other facilities. When other buildings such as Wonju City Hall and headquarters of the Korea Veterans’ Association were constructed nearby, however, the provincial office began to lose its original appearance; today, only a few buildings remain such as Seonhwadang, Pojeongnu, and Cheongundang (residence). An excavation of the site in 2000 revealed relatively clear traces of the sites of structures assumed to be the inner gates, workshop, and bookstore as well as vestiges of the path leading from the front gate to the main office, Seonhwadang, walls surrounding Seonhwadang, and corridors. In addition, the retaining walls of the pond site remain in relatively good condition.

Thus, the provincial office site features several of its original buildings in their original locations, and the remains of building sites and other structures are in relatively good condition. In addition, since the building sites of the Wonjumok district office remain just below, it is a site providing important information for the study of government office buildings in Korea.

출처:문화재청


[강원도 유형문화재 포정루]

조선 태조 4년(1395) 원주에 설치된 강원감영은 강원감사의 집무처로 70여 칸의 규모였다. 임진왜란(1592) 때 부서져 다시 건물을 세웠으나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현재는 관찰사 집무처였던 선화당과 정문인 문루만 남아있다. 문루에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강원감영문루’라는 현판이 달려있었으나 『여지도서』등의 문헌을 근거로 하여 1991년에 ‘포정루’로 고쳐 달았다.

출처:문화재청

포정루(포정루는 강원감영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출입문이다. ‘포정’ 이란 어진 정사를 베푼다는 의미로 중국 명나라의 지방관청인 포정사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원래 있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다시 세운 것이다. 고종 32년1895 강원감영이 폐지된 이후, 원주 진위대가 강원감영을 사용했을 때는 ‘선위루’라 하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강원감영문루’ 라고 하였다. 「여지도서」 등의 문헌에 근거하여, 1995년 조선시대 때 강원감영 정문의 명칭인 포정루로 편액을 바꿔 달았다.)


중삼문(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으로 출입하는 진입공간에는 포정루· 중삼문.내삼문이 있다. 중삼문은 진입공간의 배치상 가운데 위치한 문으로 포정루를 지나온 사람들은 중삼문에서 재차 본인의 신원과 방문 목적을 밝혀야 했다. 중삼문은 ‘관동관찰사영문’ 이라는 고유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강원감영의 관찰사를 만나기 위해 들어서는 문을 의미한다.)


관찰사 및 목사 선정비(강원감영의 중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총 17기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때 강원감영과 원주목 관아에서 관찰사와 목사로 재직하였던 관인들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선정비는 관찰사와 목사에게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되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나 목사를 경계하는 의미도 깃들어 있었다.

원주지역 곳곳에는 강원도 관찰사와 원주목사의 선정비가 많이 세워졌으나, 대부분 사라져 찾기가 어렵고 강원감영을 복원하면서 일부 남아있던 선정비를 옮겨왔다. 이중 2기의 비석은 후원 권역에 있던 원주우체국을 철거하면서 찾은 것이다.)


원주시 제50주년 기념식수와 공방고 터(조선시대 감영에는 지방의 행정업무를 수행하던 육방이 있었는데, 그 중 공방은 공용지를 관리하고, 건축물 짓거나 보수하는 역할을 했다. 공방고 터는 공방이 있던 자리로 고는 창고보다는 기관을 뜻하는 것으로 심작된다. 당시 강원감영은 원주목과 같은 관아를 사용했는데, 공방고 또한 원주목과 함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당시, 바닥에서 온돌시설 일부가 드러나 공방고에 난방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삼문(내삼문의 고유한 이름은 징청문 으로, 포정루 중삼문을 지나 관찰사의 집무공간인 선화당과 직접 연결되는 문이다. 내삼문은 강원감영의 진입공간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으며, 방문자는 이곳에서 관찰사를 만나기 전 마지막 신원확인 절차를 거쳤다. 징청문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방문자는 문을 들어서면서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이는 관찰사를 만나러 온 방문객뿐만 아니라 관찰사를 포함하여 이 문을 들어서는 모든 관인들이 새겨야 할 덕목이었다.)


원주 강원감영(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이다. 

조선왕조는 1395년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라 하고, 강원도의 수부를 원주로 정하여 강원감영을 설치하였다. 강원감영의 건물들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1634년 원주목사 이배원이 재건하기 시작한 후, 여러 목사와 관찰사들이 계속 건설하였다. 

강원감영은 선화당을 비롯하여 포정루, 보선고, 내아, 비장청, 호적고 등 40여 동에 달하는 웅장한 모습으로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 간 강원도 역사창조의 중심역할을 하였으나, 1895년 조선 8도 제도를 23부 제도로 개편함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1896년 이후 강원감영 건물은 원주 진위대 본부로 사용하였고, 1907년 진위대가 해산된 후에는 원주군청으로 사용되었다. 40여동의 화려한 건물로 이루어졌던 강원감영은 1895년 이후 대부분의 건물들은 없어지고 선화당을 비롯하여 포정루, 내아 등 몇 동의 건물만 남게 되었다. 

강원도와 원주시는 500년 강원도의 수부로서 강원도를 관할하였던 귀중한 문화 유산인 강원감영을 복원하기로 하고, 2000년부터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2005년까지 선화당, 포정루, 중삼문, 내삼문, 내아, 행각 등 강원감영의 일부만을 복원하였다.

출처:원주시청)


강원감영 선화당 권역(강원감영 선화당 권역은 감영의 각종 업무가 이루어지던 공간이다. 선화당 권역 안에는 중심건물인 선화당, 진입공간에 해당하는 포정루 · 중삼문. 내삼문, 그밖에 내아 · 공방고 터· 행각 · 책방 등이 있다. 감영의 본청인 선화당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선화당 권역은 진입 공간과 집무 공간으로 나뉘는데, 강원감영의 진입 공간은 포정루에서 시작해서 중삼문· 내삼문으로 연결되는 삼문구성을 이루고 있다. 강원감영을 찾아온 손님들은 각 문을 지날 때마다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 쳤다. 중삼문에서 꺾 어서 내삼문으로 들어가면 선화당이 정면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방식은 경기 · 전라· 황해감영에서도 볼 수 있다.

집무공간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은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관찰사는 이곳에서 강원도에 속한 각 지역의 행정· 농정· 조세· 민원· 군사· 재판 등에 대한 업무를 수행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고, 17세기 중반부터 선화당을 비롯하여 관찰사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집무실과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도시화 과정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졌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선화당]

감영의 자리에 군청이 들어섰지만 선화당은 그대로 남아있다. 임진왜란 이후 1667년에 다시 지은 선화당은 앞면 7칸·옆면 4칸의 1층 건물로 문루와 같은 팔작지붕인 평범한 관아 건물이다. 대청쪽과 앞면, 오른쪽 등은 특이하게 띠살문으로 처리하였다.

포정루 및 선화당은 조선시대 감영의 형태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선화당(선화당은 강원감영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고종 32년1895 강원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관찰사가 강원도의 정무를 보던 집무실인 정청이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강원도에 속한 각 지역의 행정· 농정 조세 민원·군사·재판 등에 대한 업무를 수행했다. 

선화당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현종 6년 1665 이만영 관찰사가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67년 이후산 관찰사 때 완공되었다. 선화당은 한때 일본군수비대, 원성군청, 강원도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이곳 선화당을 거쳐 간 관찰사는 500여명으로, 황희, 정철 등도 이 선화당에서 백성을 살폈다.)


내아(내아는 관찰사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공간이다. 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건물로, 오랫동안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여지도서」의 기록에는 ‘대은당’으로, 「관동지」 에 실린 강원감영지 기록에는 내아로 기록되어 있다. 내아는 17세기 후반에 관찰사가 감영에 머물면서 강원도의 다른 지방을 살펴보던 유영필쓸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생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은당: 영조 35년(1759) 내아에서 관찰사의 노모와 가족들을 함께 생활할 수 있게 하여, 임금의 은덕과 은혜를 기리는 뜻으로 '대은당 이라는 편액을 지었다.)


강원감영사료관.행각(강원감영 사료관은 조선시대 500년간 (1395, 태조 4~1895,고종 32) 국가의 지방통치기구였던 강원감영의 역사를 살펴보는 공간이다. 원주에 강원도를 관할하던 감영이 설치된 역사적 배경, 감영에서 실제 일하던 구성원들의 모습, 관찰사의 역할과 임무, 일제시기 사진자료에 실려 있는 감영의 옛 모습, 그리고 1887년 4월 오횡묵 정선군수가 생생하게 묘사한 당시의 감영 전경 등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또한 2000년 감영터를 발굴할 당시 출토된 많은 유물들 중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상평통보, 비녀와 수저, 나막신과 쌍육 및 기와류, 백자접시와 토기향로를 비롯한 자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 사료관은 옛 감영의 건축물 중 행각 건물에 해 당한다. 행각은 일반적으로 궁궐, 관아,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건물 옆에 세우는 보조건물로 감영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이나 일꾼들이 대기하거나 물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강원감영 출토 유물"


"강원감영 출토 유물"


"강원감영 출토 유물"


강원감영 역대 관찰사 명단(조선시대 각 도에 파견된 지방장관이며, 감사라고도 한다.

13도에 각 1명씩 두었으며,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의 무관직을 거의 겸하고 있었다. 고려 말기에는 안렴사, 관찰출척사라 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안렴사, 관찰사, 관찰출척사 등의 이름으로 자주 바뀌었으며 관찰사로 굳어진 것은 7대 세조 때부터였다.

중요한 정사에 대해서는 중앙의 명령을 따라 실행하였지만, 자기 관하의 도에 대해서 민정, 군정, 재정, 형정 등을 통할하여 지방행정상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관아의 수령을 지휘 감독하였다. 

관찰사의 관아를 감영이라고 하며, 관원으로는 도사, 판관, 중군 등 중앙에서 임명한 보좌관이 있고, 일반 민정은 감영에 속한 이, 호, 예, 병, 공, 형의 6방에서 행하고, 이를 지방민에서 선출된 향리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였다. 강원도 감찰사로는 조선 개국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512명이 재임하였고, 후대까지 이름을 알린 이로는 정철, 황희, 신희만, 윤사국 등이 있다. 

출처:원주시청)


작은 도성 감영(강원감영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포정루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먼저 감영 외곽에 세워져 있는 4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방위에 따라 동·서· 남. 북에 세워져 있는 4대문은 각각 수명문(동문), 취적문(서문), 진남문(남문), 공북문(북문)이라 했는데, 이 4대문의 경계가 곧 강원감영에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이 되고, 여기를 지나 관찰사가 일하는 감영의 정문인 포정루에 도착하게 됩니다.

'포정'이란 원래 중국 명나라에서 각 지방을 통치하는 기구였던 포정사에서 연유한 말이지만 여기에 깃들어 있는 의미는 관찰사가 강원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좋은 일을 하고, 또 한 해의 농사가 어려워지면 도와주는 등 뭇 사람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포정루 건립과 함께 17세기 후반부터 강원감영에는 선화당과 관풍각, 감사를 보좌하는 사람들의 집무실, 창고들이 설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감영의 규모는 점차 늘어나 1750년에는 31동 509칸, 1870년에는 33동 454칸, 1875년에는 43동 459칸, 1891년에는 55동 670칸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감영 내에 지어진 많은 건물들은 각기 고유한 기능과 용도가 있었는데, 각 건물은 당.사.각.누.청.방.문.창.고등의 명칭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왕을 상징하는 전궐패를 모시고, 손님이 묶었던 객사, 관찰사의 주거공간으로 사용되었던 내아, 후원에 있던 봉래각과 부평각, 관풍각, 환선정, 군사시설인 중영, 화약고, 군기고, 군향고등과 죄인을 매질하거나 잡아오던 나장이 일하는 군뇌방, 곡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근무하던 사창이 있었습니다.)


책방(책방은 도서와 출판 업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책방에는 감영에서 수집한 도서자료 외에, 강원도 각 지역에서 올라온 인구· 세금· 날씨 등에 대한 보고자료, 분쟁 갈등에 대한 소송관계 문서 등이 보관되었다. 대구경상감영의 사례로 볼 때, 강원감영에서도 도서의 수집 보급, 인쇄 출판 등이 책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관찰사의 수행비서격인 책사가 선화당과 가까운 거리인 책방에 근무하면서 관찰사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강원감영 후원 권역(강원감영의 후원 권역은 관찰사의 사적인 공간으로, 후원에는 연못을 조성하여 봉래각 · 영주관 등을 건립하고 손님 접대와 연화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연못 가운데와 한쪽 끝에는 정자를 세워 연못을 내려다보며 후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원감영의 후원에서는 다른 감영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연못 안에는 전설의 신산인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을 만들어 전각을 짓고, 모두 신선 세계의 이름을 부여하였다. '봉래산' 인 금강산을 관할했던 강원감영의 후원에 이에 어울리는 신선 세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관찰사들은 후원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스스로를 '봉래주인', 즉 신선세계의 주인이라 칭했다.

강원감영의 후원은 일제강점기까지는 유지되었으나 이후 후원 자리에는 한때 원주우체국이 자리했으며, 2018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이 완료되어 아름다운 후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삼신산=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 이라고 믿는 세 신산으로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을 봉래, 지리산을 방장, 한라산을 영주로 일컬었다.)


"강원감영 후원 권역"


"보호수 수령 600년 원주 강원감영 느티나무"


봉래각(봉래각은 강원감영 후원의 건물들 중 가장 먼저 지어졌다. 1684년 관찰사 신완이 연못 북쪽에 처음으로 봉래각을 세웠다. 그러나 물이 넘쳐 누각이 여러 차례 허물어지자, 1704년에 관찰사 흥만조가 기존 봉래각을 헐어내고 섬을 견고하게 만들어 그 위에 봉래각을 새로 지었다. 봉래각을 처음 건립한 관찰사 신완은 「봉래각상량문」에 '봉래'가 강원도에 있으므로 강원도를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 하였다.)과 보호수 수령 600년 느티나무


채약오(채약오는 신선이 먹는 불로초를 캐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봉래산을 비롯한 삼신산에는 영험한 약인 불로초가 있다는 신선세계의 전설을 따른 것이다. 1771년 관찰사 서명선이 연못 속에 6개의 기둥을 세워 건립하였다.)


영주관(영주관은 신선이 산다는 세 개의 산중 하나인 '영주산' 에서 따온 이름이다. 1897년 정선군수로 부임한 오횡묵이 남긴 「정선총쇄록」에 의하면 밖에는 '관풍각', 안에는 '영주관'이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관풍각은 풍속을 자세히 살펴본다는 뜻의 관풍찰속에서 따온 이름이다. 연못 가운데 있는 영주관을 드나들기 위하여 건물 동쪽과 서쪽에 각각 무지개 다리를 설치하였다. 아치형 다리를 놓은 것은 뱃놀이를 즐기기 위한 것이다.)


조오정(조오정은 전설에 나오는 '자라를 낚는 정자'라는 뜻으로, 신선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여섯 자라는 바다에서 다섯 산을 떠받치다가 거인 용백에게 잡혀 죽었다는 신선세계의 전설에 나오는 자라다.)


김금원의 여행일기(1817년 ~ 1853년), 박인자

원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여성시인이자 여행가이다. 호는 금원이다. 이 작품은 김금원이 14세 때 남장을 하고 첫 여행지인 금강산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디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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