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독립문&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2021. 11. 11. 07:15바롱이의 쪽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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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서울 독립문 (서울 獨立門)]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건양(建陽) 원년(1896년)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광무 2년(1898년) 완성하였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앞에는 영은문주초(사적) 2개가 남아있다.

원래 남동쪽으로 70m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영문 설명]

Dongnimmun, or Independence Arch, was built in the final years of the 19th century as the symbol of the nation's commitment to independence and to build up national strength through self-reliance.

Symbolically enough, it was erected right at the site of the Yeongeunmun Gate where Chinese emissaries were received in ancient times. Yeongeunmun was torn down as part of the country's resistance to foreign intervention.

Two of its stone pillars, designated as Historic Site No. 33, stand in front of Dongnimmun. The construction of Dongnimmun was first suggested by Dr. Seo Jaepil in the wake of the 1894 political reforms and was readily agreed to by King Gojong (1863~1907).

It was patterned after the Arch of Triumph in Paris. Made of granite, Dongnimmun has the rainbow-shaped Hongnyemun Gate at the center of the structure with a staircase leading to the top at the left. There is a plaque over Hongyemun where plum blossoms -- the symbol of the Yi Dynasty -- are carved in relief.

The national flag of Korea is also carved on each side of the letters "Dongnimmun" written in both Korean and Chinese. It was moved to its present location in 1979 due to the construction of Seongsan Bridge.

출처:문화재청


독립문(독립문의 건립은 서재필에 의해 주도되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10여 년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그는 1895년 12월 귀국하여 곧바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이 협회의 이름으로 독립문 건립을 발의하여 애국지사와 국민의 광범위한 호응을 받는다. 그리하여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의 정초식(定礎式)이 이루어지고, 만 1년 후인 1897년 11월에 완공을 보게 된다. 설계는 당시 독일 공사관에 근무하던 스위스 기사가 하였으며1), 공역(公役)은 한국인 기사 심의석이 담당하였고, 노역은 주로 중국인 노무자를 동원했다고 한다.

외형은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했으나 그보다는 훨씬 축소된 모습이다. 기법상으로는 직육면체로 다듬은 1,850개의 화강석을 쌓아올린 조적식(組積式) 수법을 구사하였다. 전체의 모양은 높이 14.28m 너비 11.48m 두께 6.25m의 직육면체인데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꼭대기에는 네 귀에 있는 탑 모양의 사각기둥을 연결하는 난간이 돌려져 있으며 홍예문 왼편 안쪽으로는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홍예의 이맛돌에는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문의 앞면과 뒷면 이맛돌의 바로 위 현판석에는 각각 ‘독립문’과 ‘獨立門’이라 음각하고 그 좌우에 태극기무늬를 새겨넣었다.

독립문은 1917년과 1928년에 수리를 한 바 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 일부가 파괴되어 1966년에 보수공사가 있었고, 그 뒤에도 1969년과 1971년에 보수한 바 있다. 1979년에는 성산대로의 고가도로 공사로 말미암아 원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70m 떨어진 곳으로 이전되어 오늘에 이른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하나는 독립자강의 상징이고 하나는 사대외교의 표상인 두 구조물이 나란히 서서 우리를 굽어보는 곳이 여기 독립문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사적 서울 영은문 주초 (서울 迎恩門 柱礎)]

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주춧돌이다.

개화기에 우리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다짐하는 의미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면서 그 기둥을 받치던 밑돌인 주초만 남게 되었다. 모화관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처음 세우고 모화루라 하였는데 그 뒤 세종 12년(1430)에 모화관이라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상징적인 의미의 홍살문을 세웠다. 중종 32년(1537)에 홍살문보다 격식을 갖춘 형식의 문을 만들고 ‘영조문’이라 하였다가 중종 34년(1539)에는 중국 사신의 건의로 영은문이라 이름을 고쳤으며, 연주문·연은문이라고도 하였다.

중종 때 만들어진 문은 1칸 규모이며 두 개의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우진각지붕을 얹었는데, 지붕은 청기와로 덮고 각종 동물 모양을 조각한 잡상을 배치하였다. 남아 있는 2개의 주초는 2단의 사각형 받침돌 위에 기둥처럼 길게 세워져 있다. 위에 놓인 받침돌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1896년 독립문이 세워지면서 주초만 그 앞에 세워두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독립문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영문 설명]

Erected in front of Mohwagwan Hall, this is the plinth of the Yeongeunmun Gate where Chinese emissaries were received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was torn down since it was considered symbolic of the country's theretofore flunkeyism to foreign policy. Two of its stone pillars stand in front of Dongnimmun, the Independence Gate. Erected in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Taejong (1407), Mohwagwan was originally called Mohwaru but was renamed "Mohwagwan” in the 12th year of The Great King Sejong (1430). Hongsalmun Gate, a red arrow gate with arrow-shaped decoration on top, was erected in front of it. A new gate was built in the 32nd year of the reign of King Jungjong (1537), supposed to be named Yeongjomun but was renamed Yeongeunmun two years later at the advice of a Chinese emissary.

It is also called Yeonjumun or Yeoneunmun. With the hip roof, its column stands based on two, long cornerstones. The roof is composed of blue tiles and decorated with japsang, a set of decorative roof tiles on the roof over an angle rafter. Two cornerstones are erected on the two-tiered square foundation. Two pairs of ansang design, a flower-shaped one, are carved on the foundation. It was moved to this place in 1979.

출처:문화재청


영은문 주초(독립문 앞에는 사적 제33호인 영은문 주초(柱礎) 두 개가 서 있다. 옛 사진 자료에 의하면, 영은문은 기다란 주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창방을 건너지른 위에 6틀의 공포를 짜올린 다음, 다시 그 위에 마루마다 양성을 하고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얹은 우진각지붕집이었다. 그러던 것이 1895년 영은문이 헐릴 때 지금처럼 주춧돌만 남게 되었고, 그 뒤 독립문을 이전할 때 함께 옮겨진 것이다. 두 개의 주초는 긴 사각기둥 형태인데, 이중의 사각 대석(臺石) 위에 네 모서리의 모를 죽인 사각기둥이 점차 폭이 좁아지면서 길게 솟았다. 상대석에는 면마다 안상을 두 개씩 새겼으며 꼭대기에는 기둥을 고정시켰던 홈이 남아 있다. 독립문과 영은문의 주초, 하나는 독립자강의 상징이고 하나는 사대외교의 표상인 두 구조물이 나란히 서서 우리를 굽어보는 곳이 여기 독립문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영은문(중국의 사신을 영접하던 문으로 서재필을 비롯한 독립협회 사람들이 국민의 성금을 모아 이 문을 밀어내고 독립문을 세웠다. - 글, 사진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서재필동상과 독립문, 3.1운동기념탑


독립관, 순국선열추념탑


[사적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서울 舊 西大門刑務所)]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1907년 인왕산 기슭에 일본인이 설계하여 건립한 근대적인 감옥이다.

약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560여 평의 목조건물을 짓고 ‘경성감옥’이라 불렀다. 종로의 감옥에서 500여 명을 데려와 수용하고 광복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고문과 박해를 하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은 곳이다. 애국인사들이 늘어나자 1912년 일제는 마포구 공덕동에 감옥을 또 지어 경성감옥이라 하고, 원래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이라 불렀다. 1923년 서대문감옥은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고 1944년에는 2,890명이 수용되었다. 18세 미만의 소녀들과 10년 이상을 선고받은 자, 그리고 무기수까지 수용하였으며, 김구선생·강우규·유관순 열사 등이 이곳에 수감되었었다.  유관순 열사는 이 곳에서 목숨을 다하였다.

1946년 광복 직후에는 경성형무소·서울형무소로 바뀌고,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들이 수용되었다.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1967년에는 서울구치소로 바뀌었고,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와 같은 정치적 변동으로 인해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1988년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독립의 역사를 지니며 그후로는 민주화와 정치적 변화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서 후손들에게 민족의 자존과 자주정신을 일깨워주는 산 교육장으로 매우 뜻깊은 곳이다.

[영문 설명]

Gyeongseong Prison was designed and built by the Japanese on Inwangsan Mountain in 1907 in order for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which seized sovereignty of our country, to cement its control over our country.

As a wooden building measuring approximately 560 pyeong (about 1.4 m2), it can accommodate about 500 prisoners. About 500 prisoners were moved from Jongno Prison to this place, and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had arrested and imprisoned many fighters for national independence to torture, abuse, and execute them till 1945 as the Independence Year. The increasing number of people imprisoned prompted the Japanese Government to build a prison in Gongdeok-dong, Mapo-gu in 1912, naming it Gyeongseong Prison; the original Gyeongseong Prison was renamed Seodaemun Prison and Seodaemun Criminal Prison in 1923. This prison accommodated 2,890 prisoners in 1944, including girls less than 18 years, prisoners sentenced to jail terms of 10 years or more, and those with life sentences; Martyr Yu Gwan-sun died for national independence here.

It was renamed Gyeongseong, and then Seoul Criminal Prison in 1946 immediately after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and the pro-Japanese group and those who betrayed the country were put in prison. It was renamed Seoul Prison in 1961, and then Seoul Detention House in 1967. Many activists were imprisoned here in relation to political situations such as 4.19 Revolution, 5.16 Military Coup, etc. It was moved to Uiwang-si, Gyeonggi-do in 1987 and designated as historical remains in 1988. Independence activists including Kim Gu, Gang U-gyu, etc., were detained here.

It carries meaning as a historic place of national independence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and later as a place with traces of democratization and political change. This is a very meaningful site for educating descendants to instill national pride and spirit of independence.

출처:문화재청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사형실, 통곡의 미류나무, 인왕산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 그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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