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석촌동 고분군

2021. 11. 18. 06:01바롱이의 쪽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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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서울 석촌동 고분군 (서울 石村洞 古墳群)]

석촌동 무덤들은 백제 초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서 일제시대 때 처음 조사되었다. 1호, 2호 무덤은 주민들이 농사짓는 땅으로 이용해서 내부구조와 유물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며, 3호 무덤은 기원전·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 무덤 형식인 기단식돌무지무덤(기단식적석총)이다.

무덤은 높은 지형을 평평하게 하고 밑 테두리에는 매우 크고 긴 돌을 두르고 자연석으로 층단을 이루면서 쌓아올려 3단으로 되었는데, 옛 고구려 지역인 만주 통구에 있는 장군총보다 큰 것임이 밝혀졌다. 5호 무덤은 조사가 완전하게 되지 않아 구조와 유물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무덤 주변에는 무덤을 두르고 있는 돌을 2단으로 쌓았다.

내부구조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는 없고, 이 지역 지배계층의 무덤으로서 주변에 만들어진 무덤의 주인보다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 같고, 독무덤(옹관묘)이나 작은 돌방무덤(석실묘)에 묻힌 사람들 보다는 조금 높은 신분계층의 사람들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

이 무덤들은 가락동·방이동 무덤과 함께 초기 백제의 문화와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영문 설명]

The traditional Goguryeo tomb called Jeokseokchong (stone mound tomb) first appeared in the early days of Goguryeo. To make this kind of tomb, flat square stones are firstly laid down on the ground. Then a wooden coffin is placed on top of the stones, and finally the coffin is once again covered up with stones. The ancient tombs of Seokchon-dong come down from the early years of Baekje. They were first investigate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At the time of their discovery the plot of ground where the two tombs, tomb no. 1 and no. 2, stood was used by local inhabitants as farming land, so it was not possible to discern with certainty what were the inner structures and relics of the tomb. Tomb no. 3 is a stepped stone mound tomb.

This form made its first appearance around the transitional period between B.C. and A.D. To make it, a quite high piece of ground is leveled down, and the edges are framed around with big, long stones. The stones are heaped up in such a way that the tomb is storied, or layered. Tomb no. 3 is a three-story tomb. It is acknowledged to be larger than Janggunchong (Tomb of the General), located in Tonggu, Manchuria, the territory of ancient Goguryeo and present-day China. Due to incomplete investigation, the inner structure of tomb no. 5 and its relics remain obscure to a certain degree. However, it appears to have been a family burial place. Stones with similar composition to those used to build the tomb can be found around the burial ground. Tomb no. 5 is a two-story tomb made with large stones.

Nothing certain is known about the interior, but it is possible to infer that these were family tombs of the local governing class. Their social status seems to be below that of the people buried in large tombs nearby, and above that of the people buried in the jar coffin tomb, or small stone chamber tomb.

Along with the tombs in Garak-dong and Bangi-dong, these tombs disclose something of the culture and history of early Baekje, and so are highly valued.

출처:문화재청


석촌동 고분군 30년만에 1호분 2호분 사이 발굴조사중이다.(2018년)


내원외방형 돌무지무덤(하부의 구조가 대략 가로세로 16m 안팎의 석축 안쪽에 두 줄로 쌓은 타원형의 석렬이 배열돼 있는 돌무지무덤임이 확인되었을 뿐 그 이상의 자세한 내부구조나 형태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석축 안쪽 바닥에 토광적석묘 2기와 돌덧널무덤 3기가 들어 있어 그 위에 돌무지무덤이 축조된 것을 알 수 있으니, 이를 통해 신분과 시대를 달리하는 무덤 형식이 중첩돼 있음을 알 수 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내원외방형 돌무지무덤과 롯데월드타워"


석촌동 제1호분(제1호분은 남분(南墳)과 북분(北墳)이 이어진 쌍분으로, 북분이 먼저 만들어진 다음 그에 덧붙여 남분이 나중에 축조된 것이다. 쌍분이지만 내부구조는 서로 달라 북분은 석축 내부가 점토로 채워진 백제식 돌무지무덤이지만 남분은 내부에 돌덧널을 가진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이다.

학자들은 제1호분을 부부 합장묘로서 북분은 토착계 부인의 무덤이고 남분은 고구려계 남편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먼저 죽은 부인의 무덤을 만들면서 내부는 부인의 출신에 따라 전통적인 널무덤계로 하되 외부는 나중에 고구려계 남편의 무덤과 쌍분을 만들 계획 아래 돌무지무덤으로 만들어, 뒷날 축조한 남편의 고구려식 돌무지무덤과 합친 것이 아닌가 여긴다. 사실에 정확히 부합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관찰이라 하겠다.

제1호분은 이미 파괴된 상부의 구조는 알 수 없고, 현재 남은 하단 부분만 대강의 규모와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남분은 동서 9.6m 남북 9.8m 크기의 정방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석축을 쌓았으나 내부까지 돌로 채워졌으므로 그 두께는 따로 구별할 수 없으며 현재 남은 석축의 높이는 0.3~1.1m 정도이다. 북분은 동서 9.9m 남북 8.9m의 긴 네모꼴 석축을 두께 1.4m 높이 1m로 쌓고 그 내부는 깨끗한 갈색 점토로 채웠다. 늦어도 3세기 중·후반 무렵에 축조되었으리라 추정한다.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석촌동 제5호분(제5호분은 공원의 가장 남쪽에 치우쳐 있다. 겉모습만 보면 좀 큰 흙무덤으로 보인다. 무덤의 주인공은 특이하게 여럿이며, 이들은 하나의 단일한 봉토로 덮어나가다가 봉토 중간에 마치 지붕을 덮듯이 돌로 한 겹 봉토를 덮고 다시 그 위에 흙을 얹어 봉분을 마무리하였다. 이것을 한자말로 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이라 하는데 가락동과 석촌동 등 한강 유역 초기 백제 무덤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학자들은 봉토 중간을 돌로 덮은 이런 형식의 무덤을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영향을 받은 토착민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동시에 무덤의 규모로 보아 주인공은 상당한 지위나 신분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면서 여러 사람을 동시에 매장한 점을 들어 혹시 가족묘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제3호 움무덤(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 무덤구덩[墓壙]이 얕고 작아 한눈에 보잘것없는 신분의 인물이 주인공임을 짐작케 한다. 발굴을 통해 석촌동 고분군에는 이와 같은 움무덤들이 다수 존재하며, 시대적으로는 돌무지무덤 이전부터 한성백제가 끝난 뒤까지도 줄곧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들 움무덤의 주인공들은 이주세력이 이 지역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여기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이고, 그들은 낮은 신분 탓에 정치적인 격변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한성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한동안 이곳에서 삶을 영위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석촌동 고분군 보호수 수령 250년 회화나무"


석촌동 제2호분(제4호분의 남쪽에 위치한 제2호분 역시 백제식 돌무지무덤인데, 처음부터 외부에 석축을 먼저 쌓은 다음 그 내부를 점토로 메우는 방식으로 축조한 것이 제4호분과 다르다. 같은 백제식 돌무지무덤이면서도 제4호분에 비해 한걸음 더 진전된 형식으로 고구려 돌무지무덤과 토착세력의 흙무덤의 온전한 융합이라 하겠다.

제2호분은 발굴했을 당시에는 제1단 석축과 내부의 점토부만 3.8m 높이로 남아 있었다. 이를 기초로 하여 3단 정도의 석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복원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제1단은 동서 17.4m 남북 16.2m 높이 1m 폭 2m이다. 제2단은 사방의 길이가 각각 4m씩 줄어들었을 뿐 높이와 폭은 동일하며 그 위로 중심부 높이가 0.8m 되는 봉분이 솟았다. 3세기 말쯤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석촌동 제4호분과 롯데월드타워"


석촌동 제4호분(제3호분 남쪽에 위치한 제4호분 역시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제3호분에 비해 크기가 작다. 제1단의 석축은 길이 17.2m, 높이 0.52m, 폭 2m이며, 제2단은 길이 13.2m, 높이 0.95m 폭 2m, 제3단 석축은 길이 9.2m 높이 0.45m 폭 2.5m이다. 흙무덤으로 추정되는 네모진 흙기둥이 제2단 석축 안에 있으며, 그 상부인 제3단의 석축 내부는 흙으로 채웠고, 마지막으로 제3단 석축과 내부를 덮어주는 둥그스름한 봉분을 0.7m 높이로 쌓아 마무리함으로써 무덤 전체 높이는 3m가 채 되지 않는다. 축조 시기는 늦으면 5세기 전반 무렵까지 내려올 것으로 추정한다.

제4호분의 중심부에 채워져 있는 흙은 석축을 쌓은 뒤 채워넣은 것이 아니라 먼저 네모진 흙기둥을 만든 후 이를 보강하기 위해서 석축을 쌓은 것임이 밝혀졌다. 학자들은 이를 기존의 흙무덤을 깎아내고 그 주변에 석축을 보강함으로써 흙무덤이 돌무지무덤으로 바뀐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제4호분은 전형적인 고구려식이 아닌 백제식 돌무지무덤이라고 하겠는데, 그렇다면 굳이 이렇게 흙무덤을 돌무지무덤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한강 유역 초기 백제의 무덤은 크게 돌무지무덤 계열과 흙무덤 계열로 대별되고, 각기 그 아래 다양한 갈래를 갖는다. 이 가운데 돌무지무덤 계열은 고구려 계통 이주세력의 무덤 형식이고, 흙무덤 계열은 토착세력의 무덤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근거로 제4호분은 토착민이었던 무덤 주인공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손 가운데 유력자가 나와 전통적인 흙무덤에 묻힌 선조의 무덤을 돌무지무덤으로 바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통해 내부는 전통적인 널무덤 계열이되 외부는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이라는 이중적 무덤 형식을 가진 백제식 돌무지무덤의 존재를 알 수 있으며, 한성백제시대 이주세력과 토착세력의 결합 관계, 지배계급의 변화 따위를 짐작해볼 수 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석촌동 제3호분과 롯데월드타워"


석촌동 제3호분에 고양이가 보인다. 처음엔 죽은 줄 알았는데 인기척에 깬다. 오래된 사람의 무덤 위에서 단지 짐들어 있었을 뿐이었다.


석촌동 제3호분(공원의 가장 북쪽에 있는 제3호분은 전형적인 고구려 무덤 형식의 기단식 돌무지무덤이다. 축조 방식은 평탄하게 정지작업을 한 터에 40~50㎝ 두께의 진흙을 깔아 다지고 그 위에 한 겹 얇게 돌을 깔아 기초를 만든 다음, 얇은 판석과 불규칙하게 깬 산돌을 이용하여 차츰 좁게 층단을 이루면서 네모지게 쌓아올린 것이다. 제1단은 동서 50.8m 남북 48.4m 높이 0.9m이고, 제1단의 바깥면에서 4.7m 안쪽에 쌓은 제2단도 높이는 0.9m이며, 제2단의 바깥면에서 마찬가지로 4.7m 안쪽에 쌓은 제3단은 높이가 1.8m이다. 제3단의 높이는 다른 단의 두 배인데, 처음부터 그런 모양이었는지 아니면 윗단의 돌이 흘러내려 그만한 높이가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 위로도 얼마간의 돌들이 쌓여 있어 현재 전체 높이가 4.5m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제3단 위로 한두 단 정도가 더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정확한 층단의 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전면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제3호분의 내부구조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불분명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조에 “욱리하(郁里河: 한강)에서 큰 돌을 주워 곽을 만들고 아버지의 뼈를 묻었다”고 하여 한성백제시대 왕릉 축조 방식이 돌무지무덤임을 암시하고 있고, 출토 유물들이 4세기쯤의 것이라 하여 이 무덤을 백제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던 근초고왕(375년 사망)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왕릉급 무덤이라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흔히 석촌동 제3호분을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만주 퉁거우(通溝)의 장군총과 비교한다. 장군총은 하단의 한 변이 30m, 층단이 일곱 단에 전체 높이 11.28m에 이르는 장대한 무덤이다. 그에 비해 제3호분의 하단은 장군총보다 훨씬 커서 50m에 달하는 반면 높이는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 웅장하기보다는 늠름하고, 상승감보다는 안정감이 두드러진다. 그런 자태에 어딘지 모르게 전아한 기품이 감돈다. 백제의 미감이다.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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