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봉미산 신륵사

2022. 1. 25. 07:10바롱이의 쪽지/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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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봉미산 신륵사]

 

신륵사는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유적들을 간직 하고 있으며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고려 우왕 2년 (1376년)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신륵사를 일명 "벽절" 이라 부르게 한 다층 전탑이 묵묵히 여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江月軒)에서는 그 옛날 시인 묵객들이 시 한수를 읊고 있는 것 같다.

 

신륵사는 남한강변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에 위치함으로서 대중과 접하고 구도의 기회를 넓힐 수 있는 곳이다.

 

절 이름 신륵사(神勒寺)에 얽힌 두 가지 설화가 있다.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서 자주 용마가 나타나는데 매우 거칠고 사나워 누구도 다룰 수가 없었다. 그때 신륵사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 신력(神力)으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다는 설이 그 하나이고, 미륵 혹은 나옹선사가 이들 사나운 말에게 굴레를 씌워 용마를 막았다는 설이 다른 하나이다. 늑(勒)자가 말[馬]을 통어하고 다스린다는 뜻이니 말과 관련이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출처:여주시청,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불이문"


"스님과 누각"


"여강과 황포돛배"


"보호수 수령 600년 신륵사 은행나무"


"은행나무 관세음보살 형상"


구룡루(나옹선사가 아홉 마리의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의 누각)


[경기도 유형문화재 신륵사극락보전 (神勒寺極樂寶殿)Geungnakbojeon Hall of Silleuksa Temple]

 

‘극락보전’은 불교의 여러 보살과 부처 중에서 서쪽의 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불전으로 신륵사의 중심 불전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무량수전, 보광전, 아미타전 등이 있다. 이후 고려 말 나옹 선사 혜근스님이 1376년에 이곳에서 돌아가신 후 왕실의 후원을 받아 크게 다시 지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이 인근으로 옮겨지면서 왕릉을 수호하고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는 능침사찰이 되어 1472년에 다시 크게 수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크게 수리가 이뤄지면서 1678년에 지금의 극락보전이 다시 세워졌다. 극락보전은 이후 1797년부터 1800년까지 다시 수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모습을 보면 평지에 길게 다듬은 화강암을 3단으로 쌓아 기단을 만들었고, 주춧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그대로 사용하였다. 둥근 기둥을 사용하고 지붕은 옆에서 보면 ‘八(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네 모서리에는 길게 뻗은 지붕 끝을 받치기는 가느다란 기둥 4개를 설치하였다. 지붕과 기둥 사이에는 지붕 무게를 골고루 받아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공포가 설치되어 있는데 기둥 위 뿐 만 아니라 그 사이에도 2개씩 빼곡히 설치하였다. 건물 앞쪽에는 문을 달고 옆과 뒤쪽은 흙벽을 쌓고 그림을 그려 넣었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고주(高柱;바깥의 다른 기둥보다 높게 실내에 설치하는 기둥)를 세우고 불단을 그 앞쪽에 두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다른 사찰의 불전과 비교했을 때, 규모는 작지만 공포를 높고 화려하게 두면서 여기에 비례하여 지붕도 크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왕실의 보호를 받고 왕릉을 지키는 역할에 따라 건물의 격식도 높이는 조선 시대 불교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驪州 神勒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Wooden Seated Amitabha Buddha Triad of Silleuksa Temple, Yeoju]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보살상의 보관과 대좌가 후보(後補)된 것을 제외하곤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주존인 불상을 좌상으로 하고 협시상을 입상으로 한 구성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전통이다. 불상과 보살상들은 모두 상호와 상체가 긴 편인데, 특히 불상의 육계는 유난히 길게 조성되어 이색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불상의 큼직큼직한 나발과 단순하게 처리한 법의 자락은 조선초기부터 내려오던 특징이다.

 

불상의 눈언저리에 보이는 다크서클 같이 처리한 음영 기법이나 아래 입술을 도톰하게 만들어 처지게 표현한 것 등은 조각승 인일(仁日)과 수천(守天)의 조형 미감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보살상들은 조성발원문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조선시대 1610년에 조성되었는데, 1620년의 약수선원 보살입상(현 동국대박물관 소장)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들 보살상 중 좌협시보살상은 천의식으로, 우협시보살상은 대의식으로 법의를 착용하고 있다. 한편 좌협시보살상의 양쪽 어깨 위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의 표현법과 하반신 중앙에 타원형을 그리며 드리워져 있는 화려한 장엄, 우협시보살상의 보발이 귀 밑에서 정리되는 표현법 등은 가장 중요한 특징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협시보살상의 보발 장식은 경기도 광주 수도사 보살상과 서울 보문사 관음보살상과 유사한데, 이들 보살상 역시 17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조성자와 조성시기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인일이라는 새로운 조각승의 이름이 확인되어 향후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작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驪州 神勒寺 多層石塔)Multi-story Stone Pagoda of Silleuksa Temple, Yeoju]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물결무늬와 비룡문]

 

석탑에 비룡을 조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예이다. 유독 신륵사 탑에서 그 섬세한 기교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신륵사 설화 속에 등장하는 용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리석질이라는 고급스런 소재에 이들 섬세한 조각을 곁들여 탑의 격조를 한층 높여준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조사당과 보호수 수령 600년 향나무"


[보호수 수령 600년 신륵사 향나무]

 

조사당 바로 앞에 늘푸른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썩 괜찮은 경관을 이뤄내고 있다. 무학대사가 스승 나옹화상을 추모하며 심었다고 하니 이 향나무의 수령은 적어도 600년이 넘었겠다. 스승을 그리워하는 제자의 마음이 그토록 청청한 것일까.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보물 여주 신륵사 조사당 (驪州 神勒寺 祖師堂) Josadang Shrine of Silleuksa Temple, Yeoju]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절로, 원래는 신라시대에 지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지공을, 그 좌우에는 무학과 나옹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칸·옆면 2칸으로 세웠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앞면은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옆면은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이다.

 

출처:문화재청


[경기도 문화재자료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

 

본 삼화상진영은 신륵사의 중요 인물인 나옹화상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작품으로 현재 전국 사찰에 전하는 1,000여점의 진영 가운데 데 삼화상 진영은 매우 드물어 자료적인 측면에서는 희귀하나, 조사들의 성품을 부각시키는 전신성이 약하고 제작연대도 불분명하다.

 

출처:문화재청

 

[경기도 유형문화재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 (驪州 神勒寺 乾隆三十八年銘 銅鐘) Bronze Bell Engraved with “38st year of Emperor Qianlong” in Silleuksa Temple, Yeoju]

 

신륵사 대웅전에 소장된 종으로, 한국 전통형 종보다는 중국 종의 양식이 많이 반영된 작품이다. 종의 몸체 위에 솟아있는 정상부에는 하나의 몸체로 연결된 굵고 힘에 넘친 쌍룡의 용뉴(龍鈕)가 조각되었으며 음통은 보이지 않는다. 이 두 마리의 쌍룡은 머리를 천판에서 띠어 앞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으로서 불거진 눈과 벌려진 입 안에 날카로운 이빨과 갈기까지 생동감 넘치게 묘사되어 생동감이 넘친다. 하대 위의 종의 몸체 여백을 돌아가며 군데군데 오려 붙인 듯한 방형의 명문곽(銘文廓)을 만들고, 그 안에 양각의 명문을 새겼다. 명문 중에 종의 제작자로 기록된 ‘도편수(都片手) 이만숙(李萬叔), 이영길(李永吉), 이영산(李永山)’ 과 같은 장인 집단은 18세기 중엽 이후 후반까지 충청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이만돌(李萬乭)에서 그 계보를 찾을 수 있다. 이 종을 만든 장인을 건축 장인에서 쓰이는 도편수(都片手)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음이 흥미롭다. 조선 후기 이씨파에 의해 만들어진 범종 가운데 주조기술이나 문양 등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경기도 유형문화재 여주신륵사팔각원당형석조부도 (驪州神勒寺八角圓堂形石造浮屠) Octagonal Base Stone Stupa of Silleuksa Temple, Yeoju]

 

‘여주 신륵사’는 남한강 변에 있는 사찰로 고려 후기에 나옹선사가 입적하자 크게 중창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세종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어 보수와 신축이 이루어졌으며, 그 이후에도 중수가 계속되어 오늘날까지 법등을 잇고 있다. ‘팔각원당형 석조 부도’는 신륵사 서편에 있는 낮은 능선 아래에 세워져 있다. 원래는 조사당 북쪽 구릉 너머에 있었는데 1966년 11월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옮길 당시 상대석 상면과 탑신석 하면에서 사리함이 발견 수습되었다. 이 부도는 연화문이 새겨진 사각형의 지대석을 마련하여 그 위에 낮은 중대석을 올렸다. 상대석은 두툼하고 큼직한 연화문을 장식하였으며, 상면에는 별도의 팔각홈을 마련하여 그 위에 놓이는 탑신석이 견고하게 고정되도록 했다. 탑신석은 팔각으로 2면은 자물쇠, 4면은 부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사천왕을 상징하는 범자가 새겨져 있다.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은 낙수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굵은 마루부 끝에 귀꽃을 높게 돌출시켜 장식하였다. 상륜부는 간략하게 원형의 복발석과 보주석을 올렸다. 

 

이 부도는 전체적인 조형과 양식, 수습된 사리함 등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신륵사에서 머물다가 입적한 승려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경기도 문화재자료 여주신륵사원구형석조부도 (驪州神勒寺圓球型石造浮屠) pherical Stone Stupa of Silleuksa Temple, Yeoju]

 

‘여주 신륵사’는 남한강 변에 있는 사찰로 고려 후기에 나옹선사가 입적하자 크게 중창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세종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어 보수와 신축이 이루어졌으며, 그 이후에도 불사가 계속되면서 오늘날까지 법등을 잇고 있다. ‘원구형 석조 부도’는 신륵사의 서편 낮은 능선 아래에 세워져 있다. 원래는 조사당 북쪽의 구릉 너머에 있었는데 1966년 11월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이 석조부도는 지대석 겸 하대석을 사각형으로 마련하여 중대석을 올렸다. 중대석은 모서리에 연주문 기둥을 세우고, 면석부에는 가운데 부분에 연주문을 가로로 배치하여 상하로 구분한 다음, 그 안에 안상을 표현하였다. 상대석은 8엽으로 구성된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탑신석은 표면에 명문이나 문양이 없는 원구형 부재로 마련하였다.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은 하부에 받침을 새겼으며, 상부에는 기왓등과 마루부를 마련하고 그 끝에는 용 머리를 장식하였다. 상륜부는 복발석과 보주석이 간략하게 올려져 있다.

 

신륵사 원구형 석조부도의 전체적인 구조와 양식은 조선 후기에 성행한 다른 지역의 부도들과도 친연성을 보인다. 다만 중대석 표면에 연주문을 새겨 안상을 장식하였으며, 옥개석에 목조건축물처럼 기왓등과 마루부를 마련하였으며, 그 끝에 수호적 의미의 용머리를 새긴 점이 특징적이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보제존자석종과 땅에 쓰여진 죽음"


[보물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 Stele for Buddhist Monk Boje at Silleuksa Temple, Yeoju]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다.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Bell-shaped Stupa of Buddhist Monk Boje at Silleuksa Temple, Yeoju]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앞 石燈) Stone Lantern in Front of the Stupa of Buddhist Monk Boje at Silleuksa Temple, Yeoju]

 

신륵사 서북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飛天像)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화사석]

 

8면의 각 면마다 돌출된 원기둥에 생동감 있게 용을 부조하고 시원스럽게 화창(火窓)을 내었다. 열어놓은 화창은 완만한 곡선의 사라센 계통 화두창(化頭窓)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화두창 위 넓은 간지에는 돌출이 심한 비천상이 아름답다. 납석재를 사용한 화사석이었기에 섬세한 고부조가 더욱 용이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붕돌]

 

화사석 위로 두꺼운 지붕돌이 올려져 있는데 처마와 전각의 반전이 경쾌하여 둔중한 느낌을 다소 덜어주고 있다. 중앙에는 복발형 장식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위로 2단의 층급을 마련하고 연봉형의 보주를 얹어 완성하였다. 전체적으로 아담하고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고려 말기 석등의 귀중한 유산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삼성각 앞 전각 지붕 새 조형물"


[보물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Multi-story Brick Pagoda of Silleuksa Temple, Yeoju]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신륵사는 벽돌로 쌓은 탑으로 인하여 고려시대부터 벽절이라고도 불려왔다. 탑의 건립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탑 북쪽에 있는 수리비에는 영조 2년에 세워졌다고 쓰여 있는데 이때 탑을 수리하고 비를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두 면에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당초문을 새겨 놓은 벽돌과 방위를 표시하는 돌출 석재


[보물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 (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 Stele for the Construction of Daejanggak Depositories of Silleuksa Temple, Yeoju]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출처:문화재청


[대장각기비]

 

신륵사의 사격(寺格)을 가늠하는 중요한 사료 중 하나가 금석문이다. 보제존자 석종비와 대장각기비가 그것이다. 조선의 억불정책 속에서도 지리적인 여건과 뛰어난 풍광 덕에 신륵사는 문장가나 묵객들의 발길이 잦았다. 대장각 짓기를 발원한 이가 이곡(李穀)이었고, 그 원을 성취한 이가 이곡의 아들 목은 이색(李穡)이다. 나옹선사 석종비보다 4년 늦은 1383년에 세워진 대장각기 비문은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권주(權鑄)가 해서로 썼다.

 

이 비는 보제존자 석종비와는 또 다른 맛을 주는데 신라시대 이래 건립되던 비의 형식과 차이가 많다.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대석을 놓고 비좌를 마련했으며, 여기에 장방형의 홈을 파서 비신을 꽂아 앉히고 그 위에 지붕돌을 얹었다. 애당초 귀부와 이수의 형태가 생략된 상태에서 복련대석으로 귀부를, 지붕돌로 이수를 대신하고 있을 만큼 대폭 간소화된 형태가 주목을 끈다. 종래의 화려한 비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투박함 그대로다. 이는 고려 말에 보이는 새로운 형식으로, 조선시대 석비 양식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더욱 주목하게 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장각기비 앞면 비문과 후면 비문"


[다층전탑 수리비]

 

'숭정기원지재내우중추일입'(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기록이 조선 영조 2년(1726)에 세워졌음을 일러준다. 이때 탑을 수리하고 비를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강월헌과 여주신륵사삼층석탑"


[경기도 문화재자료 여주신륵사삼층석탑 (驪州神勒寺三層石塔) Three-story Stone Pagoda of Silleuksa Temple, Yeoju]

 

단층 기단을 갖춘 평면 방형의 3층 석탑이다. 기단은 1매의 석재로 조성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와 탱주를 모각했다. 갑석 역시 1매의 석재로 놓았는데, 각 면 3구씩 그리고 모서리에 1구씩 모두 복엽 16판의 복련을 표현하였다. 중앙에는 낮고 높은 각형 2단의 받침을 만들어 탑신부를 놓았다. 탑신석과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은 각각 1석으로 조성되었다. 매 층 탑신석에는 양 우주를 모각했는데, 1층 탑신은 2층에 비해 3배 정도 높게 조성했다.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되었다. 옥개석은 3층 모두 남아 있다.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해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하면에는 1·2층은 각형 3단, 3층은 각형 2단의 받침이,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마련되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다. 

 

이 석탑은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에 언급되어 있는데, 기록으로 볼 때 나옹스님을 장례 한 장소가 전탑과 삼층석탑이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수습된 사리로 부도를 조성하고,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통적인 가람 배치법에 의해 건립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기념탑이면서 여강의 지세를 바로잡기 위한 비보탑의 성격을 갖는 고려 후기 석탑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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