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종남산 송광사

2022. 2. 19. 07:56바롱이의 쪽지/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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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종남산 송광사]

송광사는 종남산 아래 널찍하게 펼쳐진 수만 평 대지 위에 터를 잡고 있다. 이른바 평지사찰이다. 평지사찰로서의 특징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일주문 앞에 서기만 해도 금세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의 중심축이 일직선상에 있어 이들 각 건물의 문들이 틀을 만들며 점차 작아지다가 열어놓은 대웅전 어간문 안의 어둠 속으로 수렴된다(다만 현재는 1998년 완공한 대웅전 앞 석탑이 대웅전 어간 일부를 가리고 있다). 엄정성을 읽을 수 있는 정연한 구조이다. 산지사찰과는 판이하게 다른 진입방식이요, 가람배치이다. 당연히 평지라는 지형적 특성이 십분 고려된 것이겠지만, 옛 백제지역 사찰들이 보여주는 평지성의 면면한 전통을 여기서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 송광사진입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송광사일주문 (松廣寺一株門)]

종남산 기슭에 있는 송광사는 867년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체징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사의 입구에 세워 속세와 불계의 경계역할을 하는 상징물인 일주문은 조선시대에 지은 것이다.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절의 영역이 작아져서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건물은 2개의 원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간결한 맞배지붕을 올렸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공포는 용 머리를 조각하는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엿볼 수 있다. 기둥의 앞뒤로 연꽃무늬를 장식한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송광사 일주문은 전체적인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단정하고 원숙한 비례감을 느끼게 하는 조선 중기의 일주문이다.

출처:문화재청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송광사금강문 (松廣寺金剛門)]

종남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보조 체징선사에 의해 지어졌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14년(1622)에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인조 14년(1636)까지 대대적으로 중창되었다.

송광사 금강문은 금강역사를 모시는 문으로 일주문 다음에 있는 문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 천장을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 천장이다. 앞면 3칸 중에 가운데칸이 출입구이고, 양 옆칸에는 금강역사와 사자·코끼리를 타고 있는 동자상 2구씩을 배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금강문은 새날개 모양으로 장식된 익공양식의 공포와 지붕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어 규모도 작고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이 건물은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처리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금강문과 일주문"


"천왕문"


[보물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 (順天 松廣寺塑 造四天王像) Clay Four Guardian Kings of Songgwangsa Temple, Suncheon]

순천송광사소조사천왕상은 흙으로 조성한 것으로 송광사 천왕문의 좌우에 2구씩 모두 4구가 안치되어 있다. 사천왕상의 배열은 천왕문의 향 우측으로 비파를 든 북방 다문천왕과 검(劍)을 든 동방 지국천왕이, 향 좌측으로는 당(幢)을 든 서방 광목천왕과 용·여의주를 든 남방 증장천왕이 각각 시계방향으로 북→동→남→서방의 순서로 안치되어 있다. 

네 상 모두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로 전형적인 분노형 얼굴에 머리에는 용(龍) · 봉(鳳) · 화(花) · 운문(雲紋)이 장식된 관을 쓰고 갑옷을 입은 무인상(武人像)이며 각기 오른발은 악귀를 밟고 있는데 비해 왼 발은 악귀들이 받쳐 든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얼굴 모습은 표정이 분노형으로 강한 인상이기는 하나 볼륨감이 뛰어나 입체적인 면이 돋보일 뿐 아니라 다소 해학적인 면도 나타난다. 

대형의 상임에도 불구하고 신체 각 부의 비례가 어긋나지 않고 적당하며 부피감과 함께 사실적 기법이 돋보인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장흥 보림사 사천왕상(16세기 초반)과 완주 송광사 사천왕상(1649)에 비하여 결코 뒤지지 않는 조형성이 뛰어난 작품이라 하겠다. 이와 더불어 서방 광목천왕상의 지물 중 보탑 대신 새끼호랑이가 등장하는 등 새로운 도상을 보여주어 학술적 자료로서도 그 가치가 크다 하겠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조선시대 1628년(인조 6)에 다시 만들었다(重造)는 묵서명과 송광사사고(松廣寺史庫) · 사지(寺誌) 등의 자료가 남아있어, 정유재란으로 훼손된 상을 1628년에 다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영문 설명]

These clay statues of the Four Guardian Kings of Songgwangsa Temple are placed in pairs on each side of Cheonwangmun Gate (the temple gate dedicated to the Four Guardian Kings). The four guardians represent the four cardinal directions, and are arranged in the order of north, east, south and west in a clockwise direction. On the right-hand side of the gate stand the Guardian King of the North and the Guardian King of the East, holding a lute and a sword, respectively, while on the left-hand side of the gate stand the Guardian King of the West, holding a flag, and the Guardian King of the South, holding a dragon and a yeouiju (jewel ball).

All four figures are seated on the edge of a chair. They look like noble warriors, each clad in armor and wearing crowns decorated with dragon, phoenix, flower, and cloud designs. Their right feet are depicted crushing evil spirits, while their left feet are supported by evil spirits. They are imposing figures characterized by ferocious looks and large, voluminous bodies that convey a solid weighty presence, yet they appear comical at the same time. Despite their huge size, their physical features are depicted proportionately and realistically.

In this respect, the statues reveal a degree of artistic excellence comparable to that of Wooden Four Guardian Kings of Borimsa Temple in Jangheung (c. early 16th century) and Clay Four Guardian Kings of Songgwangsa Temple in Wanju (c. 1649), both of which are designated as treasures. The statues are also of great academic value as they present new images of the guardian kings, most notably that of the Guardian King of the West, who is depicted holding a baby tiger rather than a pagoda.

The records and archives at Songgwangsa Temple indicate that these Four Guardian Kings were recast in 1628 (the 6th year of the reign of King Injo of the Joseon Dynasty), suggesting that they has been destroyed during the Jeongyujaeran (the second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7).

출처:문화재청


[보물 완주 송광사 종루 (完州 松廣寺 鍾樓) Bell Tower of Songgwangsa Temple, Wanju]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1622) 응호·승명·운정·덕림·득순·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큰 절로 번창하였다.

종을 달아 놓은 종루는 십자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십자각은 열 십(十)자 모양을 하는 2층형 누각이다. 종이 걸려 있는 중앙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1칸씩 덧붙여 이루는 모양인데, 지붕 역시 중앙에서 모아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북·운판은 돌출된 칸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 마루 밑의 기둥들은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으며, 위에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 놓았다.

조선시대의 유일한 열 십(十)자형 2층 누각으로 그 가치가 크다.

[영문 설명]

Songgwangsa Temple was first built by Master Doui in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Gyeongmun (867) of the Unified Silla Dynasty. After the progressing deterioration of the temple, State Preceptor Jinul, who was a virtuous Buddhist monk of the mid-Goryeo Dynasty, asked his disciples to build a temple at the site, but his wish had not been honored until monks Eungho, Seungmyeong, Unjeong, Deongnim, Deuksun, and Hongsin built a temple at the site in the 14th year of the reign of King Gwanghaegun of the Joseon Dynasty (1622). The temple went through subsequent renovations and expansions until the 14th year of King Injo’s reign (1636) and grew into a big temple.

Sipjagak is a cross-shaped, two-story bell tower for hanging a temple bell. Centering on the center space where the bell is hung, an additional space is extended in four directions -- north, south, east, and west; the roof covering each extended space also converges toward the center, forming a splendid shape. With the temple bell at the center space, the wooden fish, temple drum, and cloud-shaped gong are kept in the extended space. The pillars built under the floor have a round shape or a square shape, whereas those above the floor all have a round shape.

This bell tower is the only cross-shaped, two-story pavilion ever built during the Joseon Dynasty; hence its great value.

출처:문화재청


송광사 범종루(우리나라 건축물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십자형 평면을 가진 건물로 부재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매우 섬약하나 수많은 기둥과 처마밑의 빼곡한 공포로 인하여 현란하고 화사한 느낌을 준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송광사동종 (松廣寺銅鐘)]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107㎝, 입 지름 73㎝의 종이다.

종을 메다는 고리는 용이 여의주를 갖고 있는 형상이며, 옆으로 소리 울림을 도와 주는 음통이 있다. 종 윗부분에는 꽃무늬로 띠를 두르고, 아래 구슬 모양의 돌기가 한 줄 돌려 있다. 밑으로는 8개의 원을 양각하여 그 안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몸통의 중심에는 머리 뒤에 둥근 광배를 두르고 보관을 쓴 보살 입상과 전패(殿牌)가 있고, 보살 입상 사이에는 사각의 유곽을 배치하였다. 유곽 안에는 9개의 꽃무늬로 된 유두가 있다. 종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덩굴무늬를 두르고 있다.

동종에 씌여있는 글을 통해 숙종 42년(1716)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졌으며, 그 뒤 영조 45년(1769)에 보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종루와 대웅전"


[보물 완주 송광사 대웅전 (完州 松廣寺 大雄殿) Daeungjeon Hall of Songgwangsa Temple, Wanju]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1622) 응호·승명·운정·덕림·득순·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큰 절로 번창하였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전·의창군서’라고 쓰인 현판도 있는데, 의창군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현판은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을 세운 시기를 아는데도 참고가 되고 있다. 다른 건물에 비하여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고, 문 위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 안쪽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함께 모셔 놓았다.

[영문 설명]

Songgwangsa Temple was first built by Master Doui in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Gyeongmun (867) of the Unified Silla Dynasty. After the progressing deterioration of the temple, State Preceptor Jinul, who was a virtuous Buddhist monk of the mid-Goryeo Dynasty, asked his disciples to build a temple at the site, but his wish had not been honored until monks Eungho, Seungmyeong, Unjeong, Deongnim, Deuksun, and Hongsin built a temple at the site in the 14th year of the reign of King Gwanghaegun (1622) of the Joseon Dynasty. The temple went through subsequent renovations and expansions until the 14th year of King Injo’s reign (1636) and grew into a big temple.

The Daeungjeon (Main Buddha Hall) is the center of the temple. According to a record, it was rebuilt by State Preceptor Byeogam in the 14th year of King Injo’s reign (1636) and completed by Master Jebong in the 8th year of King Cheoljong’s reign (1857).

The hall measures 5 kan (unit of measurement referring to the distance between two columns) on the front side and 3 kan on the lateral side. It has a hip and gable roof with “八”-shaped sides. The bracket sets supporting the eaves of the roof are built both above and between the columns in the style of dapo or multi-cluster bracket system.

The calligraphy on the hanging board of Daeungjeon was written by Prince Uichang, King Seonjo's 8th son and King Gwanghaegun's younger brother. The inscription on the monument, which was erected in the 14th year of King Injo’s reign (1636) in celebration of the temple's renovation, was also written by Prince Uichang. The board seems to have been written at that time, so it gives a clue as to the construction date of Daeungjeon. Compared to other buildings in the temple, the center space is relatively narrow, and a painting is drawn on the wall above the door as a relatively unique feature.

Enshrined inside the building, on the left and right sides of the Sakyamuni statue, are the statues of Amitabha Buddha and Bhaisajyaguru Buddha, respectively.

출처:문화재청


대웅전 의창군서 현판(의창군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현판은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을 세운 시기를 아는데도 참고가 되고 있다. - 출처:문화재청)


[보물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完州 松廣寺 塑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腹藏遺物) Clay Seated Sakyamuni Buddha Triad and Excavated Relics of Songgwangsa Temple, Wanju]

신라 경문왕 7년(862) 도의선사가 창건한 송광사에 모셔져 있는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m)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양식에 걸맞는 표현기법을 보여준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존불에서는 삼불의 조성기와『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고 역사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불상과 함께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영문 설명]

Songgwangsa is a temple founded by Monk Doui Seonsa in 862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Gyeongmun of Silla). The Buddha Triad at this temple is composed of Shakyamuni Buddha at the center, Amitabha Buddha to the right, and Medicine Buddha to the left. This one (height: 5m), along with the image of Amitabha Buddha (height: 5.4m) in Muryangsa Temple, is the tallest clay-made Buddha image in the country. It displays a well-proportionate body.

The solemn, well-rounded faces and thick robes appear to show expressions fit for Buddha images. The turban shell-shaped hairs of the heads look very unique, characteristic of the style that emerged in the late Joseon Period. From the image of Lord Buddha, many articles were produced including a record concerning how the triad was made, several Buddhist scriptures like Saddharma-Pundarika (Lotus Sutra of the Wonderful Law), and a casket for such articles.

The record tells us that the triad was made in June 1641 (the 5th year of King Injo’s reign) to pray for the long life of the King and the Queen and early return home of Crown Prince Sohyeon and Prince Bongnim from the Qing Dynasty of China, where they were taken hostage after Qing’s invasion in 1636. The triad was a result of the best efforts made in connection with the need to overcome the crisis situation following the 7-year invasion of the Japanese and invasion of Qing. Researchers regard the triad as a precious material, an object providing clear information as to when it was made and reflecting the historical consciousness of Koreans.

The triad, along with the 12 relics found from its inside, 3 records on how the triad was made, and 3 caskets for the relics, was designated as Treasure No. 1274.

출처:문화재청


"대웅전 목조삼전패, 세자 전패"


"대웅전 목조삼전패, 왕 전패"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송광사목조삼전패 (松廣寺木造三殿牌)]

대웅전 삼존불 사이 앞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3점의 패(牌)이다. 전체적인 만든 방법과 형태는 같으나 부분적으로는 차이를 보인다.

그중 하나는 높이 2.28m로 앞면에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씨가 있고, 뒷면에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 때 조성된 것이란 제작연대가 있다. 다른 2점은 높이가 2.08m로 같으며, 뒷면에 정조 16년(1792)에 수리하였음을 검은 글씨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보살의 명칭을 적은 다른 위패들과는 달리 왕, 왕비, 세자로 조성한 2m가 넘는 대작이다. 여러 장의 목판을 엮어서 만든 것으로 구름과 용을 뚫어새긴 것이 특징이다.

조각이 정교하고 크기가 크며, 조성된 연대와 수리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으로, 대다수 연대를 알 수 없는 불교 목공예의 시기을 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대웅전 목조삼전패, 왕비 전패"


대웅전 천장(안으로 들어가 보면 천장의 꾸밈새가 다채롭다. 천장은 가운데 3칸은 우물반자를 치고 나머지 외진부는 경사진 빗천장을 꾸몄다. 불상 위 천장에는 간단한 운궁형 보개를 씌웠으며, 우물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 하늘을 나는 동자, 반자틀에 붙인 갖은 물고기·게·거북 혹은 자라 따위 바다짐승 등 온갖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개중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론가 바삐 줄지어 가는 자라, 새끼를 등에 업고 네 활개를 젓는 거북도 눈에 띈다. 빗천장에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추는 모습의 비천도 20여 장면이 천장화(天障畵)로 그려져 있다. 19세기 중건 당시에 완성된 것들로 생각되는데, 비교적 색채도 선명하고 활달한 동세가 구김살없이 표현되어 눈을 즐겁게 한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송광사사적비 (松廣寺史蹟碑)]

송광사 뒷뜰에 놓여 있는 비로, 절의 개창(開創:절을 처음으로 세움)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리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의 앞면에는 비 이름과 비문이 새겨 있는데, 고려 보조국사가 전주 종남산을 지나다가 절터를 잡아놓고 제자들에게 절을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는 내용과 보조국사에서 벽암대사에 이르는 스승과 제자의 계보가 주된 내용이다. 뒷면에는 송광사를 짓는데 참여했던 스님 가운데 한 분이었던 승명의 말을 인용하여 절을 짓게 된 경위 및 벽암대사의 제자와 시주한 사람, 개창 당시 기술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세운 비로, 신익성이 비문을 짓고, 선조의 여덟번째 아들인 의창군 광이 글씨를 썼다.

출처:문화재청


송광사 부도밭(돌각담이 정겨운 부도밭은 너무 넓은 탓인지 아늑한 맛은 없다. 뒷줄에 열둘, 가운데 둘, 그리고 앞줄에 둘 해서 모두 열여섯 기의 부도와 두 개의 비가 세 줄로 나란히 서 있다. 부도들은 모두 석종형으로 별다른 특징은 없고, 다만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여러 점 눈에 띈다. 푸근한 맛은 없지만 세월을 벗하며 서 있는 부도들이 맑은 바람 속에서 해바라기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송광사벽암당부도 (松廣寺碧庵堂浮屠)]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이 부도는 송광사 대웅전 뒤쪽의 부도밭에 자리잡고 있는 10여기의 부도들 중 하나로, 이 절의 주지이면서 승병장으로 유명하였던 벽암대사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형태는 둥글게 다듬은 바닥돌 위로 종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사각의 지붕돌을 얹어놓은 모습이다. 바닥돌 윗면에는 16잎의 연꽃무늬를 새겨 둘러 놓았다. 탑신에는 ‘벽암당(碧巖堂)’이라는 승려의 호를 새겨 그 주인공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지붕돌은 다소 투박해 보이나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약간의 가벼움을 실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지붕을 축소한 듯한 작은 지붕돌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돌을 올리고 있어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벽암대사가 조선 현종 원년(1660)에 이 절에서 돌아가셨다고 전하고 있어 부도를 세운 것도 그 즈음으로 추측된다. 기록을 남겨 두어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고 보존상태 또한 좋은 편이어서 충분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연지와 완주 종남산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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