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 완주 불명산 화암사

2022. 2. 20. 08:12바롱이의 쪽지/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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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와 복수초"

화암사에 얽힌 설화(옛날 임금님의 딸 연화공주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세상 다 좋다는 약도 공주의 병에는 모두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심이 깊은 임금님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이미 너의 가득한 불심에 감동했노라"고 말하며, 왕의 앞에 조그마한 꽃잎 하나를 던져 주고는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임금님은 그 길로 부처님이 일러준 꽃을 찾기 위해 사방에 수소문했고 마침내 찾아내게 되었는데 그 꽃은 불명산 깊은 산봉우리 바위에 핀 복수초였다. 연못이 아닌 바위에 핀 꽃이라 임금님은 은혜의 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신하들에게 조심스럽게 꽃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신하들이 "누가 이 연꽃을 키우고 있는가를 알아보자"며 지켜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산 밑에 있는 언못 속에서 용 한 마리가 나타나 꽃에 몸을 주고 있는게 아닌가? 이를 목격한 다른 신하는 모두 도망가고 용감한 신하 한명만이 꽃을 꺾어 궁에 돌아왔다. 꽃을 먹게 된 공주는 병이 깨끗이 나았고, 임금님은 부처님의 은택이라 생각하고 그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을 모시게 했다. 그 후로 임금님과 많은 신하들이 이곳에 와 불공을 드리는 한편 이절 이름을 화암사라지었다 한다.)


완주 불명산 화암사 가는 길엔 다른 절과 달리 일주문 등 인공적인 문이 없다. 


"암벽과 계곡사이 좁은 길"


"좌측 화암사 옛길과 우측 철계단길"


화암사 가는 철계단길과 바위벼랑(골짜기 어귀에 바위벼랑이 있다. 계곡물이 흘러내려 폭포를 이룬다. 그 바위벼랑의 허리를 감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으니 폭은 겨우 한 자 남짓이다. 이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닿는다. 예와 달라진 게 없는 건 아니다. 물이 느는 계절에는 폭포로 변하는 ‘수십 길 바위벼랑’이 통행에 너무나 힘이 들었던지 1983년에 그 위로 철제 계단을 놓았다. 영혼을 팔아 편리를 산 셈이라고나 할까. 두 발을 재겨디디며 이따금 손까지 동원해야 오를 수 있는 옛길을 택하든 아니면 차갑고 무표정한 철제 계단을 택하든 그 끝에서 우리는 하나로 만난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고르며 다시 한 구비를 돌면 거기 작은 성(城)처럼 화암사가 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시인 안도현은 "나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라 하였다. 


"우화루 오르는 돌계단"


"자연 암반위 돌담장과 산신각"


완주 불명산 화암사(절을 두고 잘 늙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도 혼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나라의 절 치고 사실 잘 늙지 않은 절이 없으니 무슨 수로 절을 형용하겠는가. 심지어 잘 늙지 않으면 절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심사도 무의식 한쪽에 풍경처럼 매달려 있는 까닭에 어쩔수가 없다. 잘 늙었다는 것은 비바람 속에서도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다는 뜻이며, 그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의 일부로서 지금도 당당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화암사가 그러하다. 어지간한 지도에는 그 존재를 드러내고 밝히기를 꺼리는, 그래서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다. 십여 년 전쯤에 우연히 누군가 내게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화암사 한번 가보라고, 숨어 있는 절이라고, 가보면 틀림없이 반하게 될 것이라고. 출처:잘 늙은 절, 화암사 중에서 - 안도현 시인)


[보물 완주 화암사 우화루 (完州 花巖寺 雨花樓) Uhwaru Pavilion of Hwaamsa Temple, Wanju]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있는 절로 본사인 금산사에 딸린 절이다. 절을 지을 당시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원효와 의상이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으로 조선 숙종 37년(1711)까지 여러번에 걸쳐 수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화루는 화암사 경내에 있는 극락전 정문과 같은 성격의 누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세운 것으로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한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층은 기둥을 세워서 바깥과 통하게 하고, 뒤쪽에는 2층 마룻바닥을 땅과 거의 같게 놓아 건물 앞쪽에서는 2층이지만 안쪽에서는 1층집으로 보이게 한 건물이다.

[영문 설명]

Hwaamsa Temple is located to the south of Sirubong Peak, Bulmyeongsan Mountain. It originally belonged to the main temple, Geumsansa. Although no specific record remains about the foundation year of this temple, it is believed to have been built before the reign of King Munmu of Silla, based on one record that shows Wonhyo and Uisang practiced asceticism here after studying abroad. Uisangdaesa, a Buddhist grand master, brought the seed of a tree with him when he returned from abroad, and this happened to be reported to the Chinese Tang emperor because of its unique scent. Therefore, an envoy brought the same seed again and it was planted in the courtyard of the palace. This is the story of how the temple has this name, Hwaamsa (hwa means a flower). They say that Seong Dalsaeng rebuilt the temple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the Great after several phases of renovation. Another record, found in 1981, says that it was rebuilt many times up to 1711, the 37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Uhwaru is a kind of Buddhist sanctum inside Hwaamsa and its function is very similar to the main gate of Geungnakjeon.

The pavilion is built on a high hill or on a pedestal piled up with stone or soil, also called nudae. The present building dates from 1611, the third year of the reign of King Gwanghaegun of Joseon, but its appearance has not changed greatly since then even though it has been repaired several times.

Uhwaru is a two story nugak building with three front spaces and two side spaces, and is supposed to be erected in front of the temple. its roofline called matbaejibung, resembles a caret looking from the side. There is a pillar in the first floor making it possible to pass to the outside. In addition it has a very particular structure in that it looks like a two-story building from the front but like a flat building from the inside because its wooden floor on the second story has been set up level with the ground. From the delicate and graceful skill of its carving, it is assumed that Uhwaru was constructed in the early or mid Joseon Dynasty.

출처:문화재청


"사기그릇 파편과 샘물"


"우화루 불명산 화암사 현판과 자연 암반 위 나무기둥"


문간채(‘작은 성’ 화암사는 안마당으로 들어서는 절차도 다소 특이하다. 누각 아래 길이 없으니 당연히 다른 데로 돌아가야 한다. 우화루 왼쪽으로 돌계단이 놓였고 그 위에 문간채가 있다. 문간채는 민가의 그것과 꼭 닮은 3칸 一자집이다. 3칸 가운데 왼편 두 칸은 방이고 제일 오른쪽 한 칸을 ‘대문’으로 쓴다. 절집에 문간채가 있는 것도 새롭거니와 하필 가운데 아닌 옆칸을 문으로 활용하는 것도 새삼스럽다. 절집에 흔치 않은 문간채가 들어선 연유가 필시 있으련만 지금으로선 별로 밝혀진 게 없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문간채 대문(대문은 문턱이 아래로 휘우듬히 휘어졌고 문미(門楣)는 반대로 위로 부드럽게 굽었다. 딱딱하여 눈에 거슬리는 모양새가 아니라 본래 그래야 하는 듯 자연스럽다. 애초부터 수평재를 쓰지 않고 용도에 맞는 나무를 생긴 대로 골라 쓴 결과다. 아마 수평재를 썼다면 드나드는 발길에 닳아 자주 갈아댔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처음부터 적당한 곡율(曲率)을 가진 나무를 사용함으로써 구조적 안정성과 시각적 안정성을 동시에 얻고 있는 것이다. 작지만 소중한, 지혜의 소산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문간채 출입문 검은 개와 우화루"


"화암사 옛 화장과 새 화장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화암사중창비 (花岩寺重創碑)]

화암사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이 절의 중창(重創:원래의 절을 고쳐 새롭게 함)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화암사는 비문의 내용을 미루어 신라 문무왕 이전에 창건되었고, 이후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쳤다 한다.

비는 넓다란 사각받침 위로 비몸을 세운 모습으로, 비문이 많이 닳아 있어 읽기가 힘들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조선 태종 17년(1417)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했던 성달생이 절을 하나 짓고자 터를 찾아다니던 중, 화암사의 자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그의 뜻에 따라 세종 7년(1425)에 주지 해총이 절을 중창하였다. 이외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이곳에 머물러 수도하였다는 기록도 보이며, 이들의 뜻에 따라 절을 잘 지키라는 당부의 내용도 실려있다.

세종 23년(1441)에 비문을 지어 선조 5년(1572)에 비를 세웠다.

출처:문화재청


"중창비 위 산등성이에서 바라본 전경"


"화암사 중창비 언덕에서 바라본 화암사"


극락전 앞에서 바라본 화암사 전경(안마당을 중심으로 둘러선 네 건물은 상호 소통하는 구조를 가짐으로써 지붕의 유무에 상관 없이 단일한 공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둘 또는 그 이상의 공간이 단일한 공간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그만큼 독립된 공간들 사이에 수직적 위계가 뚜렷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요컨대 안마당과 우화루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듯이 화암사의 전각들은 수직적 위계가 아닌 수평성으로 서로 만나고 있다 하겠다. 수평성, 바꿔 말해 평지성이 백제계 건축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때, 우리는 지형상 평지와는 거리가 먼 화암사에서 백제계 건축의 면면한 전통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우화루는 화암사에 남은 백제계 건축 요소의 인식을 환기시키는 촉매이자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시간의 계단이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우화루 내부와 목어(우화루 한켠에 걸려 있는 투박한 조각의 목어이다. 단청도 벗겨지고 먼지도 많이 쌓여 있지만 정감 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적묵당(적묵당은 두 날개채를 가진 ㄷ자 평면의 승방이다. 별다른 건축적 특징은 없지만 기능성은 퍽 뛰어난 편이다. 안마당 쪽으로는 길게 툇마루를 달아 생활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몸채와 두 날개채가 교차하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뒷마당은 적묵당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사생활을 유지하는 공간이 된다. 억지를 부리지 않아도 저절로 거기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호해주는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옛 절집이라면 으레 있게 마련이던 이런 공간들이 대부분 사라져버린 지금, 화암사 적묵당에서 우리는 생활과 밀착된 공간의 고전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불명당((한편 이 작은 공간에서 폐쇄성에서 오는 답답함보다 오히려 차단성의 부족으로 안정감이 흩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기도 한다. 동쪽의 요사(寮舍) 불명당 때문이다. 불명당은 3칸짜리 홑집이다. 별 특징도 없거니와 안마당을 둘러싼 다른 건물들에 비해 유난히 작고 낮다. 그래서 지붕 위와 옆으로 너무 많은 배경을 노출시키게 되고, 그것이 안마당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을 다소 흐트러뜨리는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본래 이 자리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조사전(祖師殿)이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 규모라면 극락전에서 우화루로 연결되는 안마당의 동편을 꽉 메울 정도의 건물이었다고 생각된다. 모르긴 해도 그만한 조사전이 있었던 때라면 화암사 안마당의 안정성이 지금보다 더욱 뛰어나지 않았을까.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사리탑과 철영재(화암사를 중창 불사한 사육신 성상문의 조부 성달생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극락전과 적묵당 사이에서 바라본 전경"


"적묵당과 우화루 사이에서 바라본 전경"


"우화루와 불명당 사이에서 바라본 전경"


불명당과 극락전 사이에서 바라본 전경으로 우화루와 적묵당 지붕이 연결되어 있다.


[국보 완주 화암사 극락전 (完州 花巖寺 極樂殿) Geungnakjeon Hall of Hwaamsa Temple, Wanju]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있는 절로 본사인 금산사에 딸린 절이다. 절을 지을 당시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원효와 의상이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은 1981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선조 38년(1605)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며 소박하고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칸 뒤쪽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으며, 그 위에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용을 조각하였다.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인 하앙식(下昻式) 구조이다. 하앙식 구조란 바깥에서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근세까지도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영문 설명]

As a branch temple of Geumsansa Temple in Gimje, Hwaamsa is believed to have been founded during the reign of King Munmu of Silla based on records that Buddhist monks Wonhyo and Uisang stayed here for further enlightenment after studying in Tang China. The Geungnakjeon Hall of this temple appears to have been built in 1605, according to records found during the reconstruction in 1981. It measures three kan (unit of measurement referring to the distance between two columns) at the front and three kan on the side and has a hipped-and-gabled roof. This hall shows a unique structure not found anywhere else in Korea. Additional members support the eaves like a lever; thus allowing the eaves to extend further.

출처:문화재청


"완주 화암사 극락전&먹거리"

 

완주 화암사 극락전&먹거리

"대한민국 유일 하앙식(下昻式) 구조 건축물" [국보 완주 화암사 극락전 (完州 花巖寺 極樂殿) Geungnakjeon Hall of Hwaamsa Temple, Wanju] 화암사는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있는 절로 본사인 금산사에 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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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상과 극락전 내부의 닫집(내외7출목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닫집 내부에는 여의주를 문 우람한 비룡이 꿈틀거리고 있으며 주변에는 봉황과 동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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