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위봉산성&완주 추줄산 위봉사

2022. 2. 18. 07:44바롱이의 쪽지/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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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완주 위봉산성 (完州 威鳳山城) Wibongsanseong Fortress, Wanju]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숙종 원년(1675)~숙종 8년(1682)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벽 둘레는  8,539m, 성벽 높이는 1.8~2.6m 이고 관련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 포루지 13개소, 추정 건물지 15개소, 수구지 1개소가 확인되었다.

일부 성벽을 제외하고는 성벽  성문, 포루, 여장, 총안, 암문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다른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뿐만이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시기 위한 행궁을  내부에 두는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영문 설명]

Embracing a valley, this fortress was built from 1675 (first year of the reign of King Sukjong) to 1682.

It was located in a rough country to serve as refuge for the people in times of war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Joseon Dynasty. The fortress walls have circumference of 8,539m and height of 1.8-2.6m. Facilities include 4 gates, 6 hidden gates, 2 command posts, 13 batteries, 15 supposed building sites, and 1 water gate. 

Except for some parts of the walls, the facilities are well-preserved. Unlike other fortresses that were purely military facilities, this fortress had -- inside its walls -- a royal villa where the portrait of King Taejo, founder of the Joseon Dynasty, could be enshrined in times of emergency. It is a valuable site for the study of late Joseon fortresses.

출처:문화재청


"위봉산성 서문과 비석군"


사적 완주 위봉산성(산성은 전란시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여 외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거나 백성들을 피난시키기 위하여 쌓는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이러한 상식과 감각으로는 좀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산성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위봉산성이 그 예에 든다. 위봉산성은 조선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축성한 산성이다. 겨우 그림 한 폭 때문에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경제력을 쏟아붓고 갖은 악조건을 무릅써가며 커다란 산성을 쌓다니, 우리의 가치관으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지만 사실(史實)이 그러하다. 왕조시대에는 태조 어진이 갖는 비중과 의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거웠던 모양이다. 

위봉산성은 숙종 원년(1675)에 처음 만들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전주읍의 동쪽 4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5,097파(把)이고 성가퀴, 곧 여장이 2,437개이다. 안에는 우물 45곳, 물을 가두는 방죽 9곳, 염산(鹽山) 1곳이 있다. 숙종 원년에 쌓았다”는 글이 실려 있어 성의 위치, 축조 방법, 규모와 시설, 축성 시기 등을 간략히 밝히고 있다. 또 전주의 읍지인 『완산지』(完山誌)에는 “숙종 을묘년 부윤을 겸직하고 있던 권대재(權大載)가 장계(狀啓)로 아뢰어 성을 쌓고 행궁(行宮)을 건립했으며 또 진전(眞殿)을 옮겼다”고 밝혀 위봉산성의 용도를 짐작케 하고 있다. 나아가 『여지지』(輿地誌)의 「위봉진사례」(威鳳鎭事例)에 의하면 행궁은 6칸이었으며, 여기에 더하여 정자각 2칸, 좌익랑 5칸, 우익랑 5칸, 내삼문과 외삼문 각 3칸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밖에 각기 6칸짜리 진장비우헌(鎭將備虞軒)과 연무정(鍊武亭) 등의 건물이 산성 안에 있던 것은 물론, 성의 동·남·북에 문을 두었고 전주를 비롯한 인근 아홉 개 군과 현의 무기를 넣어둔 군기고(軍器庫)와 군량미를 비축한 군향창(軍餉倉)이 성안에 제가끔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위봉산성이 ‘제구실’을 한 적이 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이다. 그때 전주의 경기전에 있던 태조의 어진을 판관 민영승이 가지고 몸을 숨긴 곳이 여기 위봉산성이었음은 ‘경기전’편에서 밝힌 대로다. 만일의 사태에 어진을 봉안하기 위한 목적에서 성을 쌓았는데 하필이면 그 만일의 사태가 제 나라 백성들의 참고 참았던 분노의 폭발이었더란 말인가. 당시의 왕실로 보아서야 산성이 제구실을 톡톡히 한 셈이겠으나,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본다면 백성들의 품 속에서 안전을 구해야 하련만 도리어 그들의 뭇매를 피해 기껏 돌덩이로 쌓은 성에 의지해 연명해야 했던 지배층의 씁쓸한 뒷모습이 어처구니없을 따름이다. 

지금은 성안에 있던 시설들도, 성에 담긴 사연도 모두 한 줌 흙과 한 줄기 바람으로 돌아가고 오직 서문터에 홍예문만이 남아 있다. 안팎 두 가닥으로 틀어올린 홍예는 딱히 두드러지거나 못난 점 없이 여느 산성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홍예에서 시작된 성벽은 굼실굼실 한 줄기가 뒷산 숲을 헤치며 등성이를 기어오르고, 다른 한쪽은 찻길을 건너 풀더미와 나무들 사이로 무너진 자취가 꼬리를 감추고 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완주 추줄산 위봉사 일주문"


"사천왕문"


"봉서루"


"하늘 아래 있는 것은 다 마찬가지 이니까..."


"추줄산과 보광명전"


위봉사 전경(『대동지지』(大東地志)에 예전 위봉산성 안에는 열네 곳의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오래 전 모두 스러지고 지금은 단지 위봉사(威鳳寺)만이 남아 있다. 산성이 건재했을 때에는 성을 지키는 역할도 담당했던 위봉사는 오히려 성보다 그 역사가 훨씬 거슬러 오른다. 일설에는 위봉사를 백제 무왕 5년(604) 서암대사(瑞巖大師) 혹은 서응대사(瑞應大師)가 창건했다는 말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물증이나 문헌이 남아 있지 않다. 좀더 믿을 만한 사실은 고려 말부터 나타난다. 1868년 포련화상(布蓮和尙)이 쓴 「위봉사극락전중수기」(威鳳寺極樂殿重修記)에 따르면, 신라 말기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산천을 주유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옛 절터를 찾아 절을 지은 바 있고, 그 뒤 공민왕의 왕사였던 보제존자(普濟尊者), 곧 나옹스님이 1359년 가람을 이룩하였는데 건물이 모두 스물여덟 동, 암자가 십여 군데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도 대규모 불사가 한 차례 있었던 듯하다. 위 중수기에는 나옹스님의 유적(遺跡)을 찾아 이곳에 왔던 포련스님이 화주가 되어 60여 칸을 중수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아마도 이때의 중수는 사세를 탄탄하게 했던 듯, 대략 반세기 뒤인 일제강점기엔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본말사법에 의해 위봉사는 전북 일원의 46개 사찰을 관할하는 본사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세도 잠깐, 1970년대에는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 두세 채만 남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가 1990년대 이후 몇몇 건물을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른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위봉사(위봉산성 안에 있던 열네 곳의 절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곳이다. 전하는 역사는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근래 이루어진 큰 불사로 인해 오랜 고찰이라는 옛맛은 잃었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지장전"


"소나무와 종각"


"반송과 극락전"


[보물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 (完州 威鳳寺 普光明殿) Bogwangmyeongjeon Hall of Wibongsa Temple, Wanju]

위봉사는 백제 무왕 5년(604)에 서암대사가 지었다는 설과 신라말에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절터에서 세 마리 봉황새가 노는 것을 보고 위봉사(圍鳳寺)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려 공민왕 8년(1358) 나옹화상이 절을 크게 넓혀 지었고 조선 세조 12년(1466) 석잠대사가 수리하였다고 한다.

위봉사 보광명전은 건축 수법으로 보아 17세기경에 지은 건물로 추정하며 ‘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 적힌 현판은 조선 순조 28년(1828)에 쓴 것이라고 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불단 위쪽으로 운룡(雲龍)과 여의주 모양의 구슬을 장식한 닫집을 만들어 놓아 불상에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안쪽 뒷벽에 그린 백의관음보살상을 비롯한 여러 불화와 비교적 채색이 잘 보존된 금단청은 차분하고 아늑한 법당 안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우수한 옛 채색기법과 조선시대 목조 불전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영문 설명]

There exist a number of theories regarding the origin of Wibongsa Temple. According to some sources, it was built in 604 (the 5th year of King Mu’s reign of Baekje) by the Buddhist monk Seoam. The name “Wibongsa,” according to another source, was chosen by a late Silla man by the name of Choi Yong-gak who saw three phoenixes at the site of the temple. Wibongsa is said to have been expanded in 1358 (the 8th year of King Gongmin’s reign of Goryeo) by the monk Naong hwasang and repaired in 1466 (the 12th year of King Sejo’s reign of Joseon) by Buddhist monk Seokjam.

Bogwangmyeongjeon Hall, meanwhile, is dated to circa 17th century, based on its architectural style. The name tablet above the entrance is said to date from 1828 (the 28th year of King Sunjo).

This building, extending three kan (a unit of measurement referring to the distance between two columns) on the front and three on the side, is surmounted by a hipped-and-gabled roof. Columnar bracket sets supporting the eaves are present both at the top of the columns and between the columns. The sanctuary inside has a coffered ceiling. The Buddha statue sits under a stately canopy, adorned with cloud and dragon motifs and beads shaped like cintamani. The gold decorative painting on the woodwork is still quite vivid and not at all faded. The altarpiece, a painting of Avalokitesvara clad in white, contributes, along with a series of other Buddhist paintings next to it, to the solemn and serene atmosphere of this place of worship.

The building sheds important light on the wooden Buddhist architecture of Joseon, and more particularly on the decorative painting techniques of this period.

출처:문화재청


"보광명전"


"보광명전 계단 코끼리와 원숭이상"


"입 막고 귀 막고 눈 가린 원숭이상"


위봉사(추출산위봉사’라고 적힌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위봉사 경내로 들어선다. 깊은 산속의 사찰인데도 마당이 평탄하고 널찍하다. 심산의 품속이어서 그런가. 편안하다. 보광명전 앞에 서 있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고찰의 품격을 말해준다.

비구니들만의 도량인 위봉사는 한눈에 보아도 정숙한 중년 여인의 자태처럼 단아하다. 사찰 내부 건축물의 배치나 공간 구성 어디에도 과장이나 허세가 보이지 않는다. 가히 절제의 미학이다. 팔작지붕으로 유명한 보광명전 지붕의 용마루와 위봉산의 부드럽고 완만한 능선 자락의 조화가 절묘하다.

절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다 극락전 앞 삼층석탑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 옆에 노랗고 붉은 튤립 몇 송이가 수줍게 피어 있는 곳, 고요와 위무가 있는 사찰이 위봉사다.

출처:완주군청)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위봉사요사 (威鳳寺寮舍)]

주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위봉사는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통일신라말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세 마리의 봉황이 절터를 에워싸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위봉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고종 5년(1868) 포련선사가 60여 칸의 건물을 지을 당시만 해도 큰 규모의 사찰이었으나,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해 지금은 그 규모가 매우 축소되었다. 현재는 보광명전과 칠성각·시왕전·요사채 정도의 건물만이 남아있다. 요사는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하는데, 위봉사의 요사채는 앞면은 극락전으로 뒷면은 요사로 사용되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위봉사에는 『묘법연화경판』과 『동국여지승람목각판』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동국대학교박물관과 전주시립박물관에 30여 쪽이 보관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관음전 위봉사 편액(법당을 바라보는 쪽에 편액이 하나 걸려 있다. 보통 글씨만 있는 것과 달리 가운데 ‘威鳳寺’라 횡서하고 그 양옆으로 대나무와 난초를 한 폭씩 친 편액이다. 일제강점기 각기 글씨와 그림으로 꽤나 이름을 날리던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 1868~1933)과 죽농 서동균(竹農 徐東均, 1902~1978)은 서로 짝을 이루어 팔도를 돌며 그림과 글씨가 함께 하는 편액을 31본산에 모두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그 가운데 하나인 모양이다. 글씨나 그림은 모르겠으되, 괴짜들이 사라져 맹탕 같은 요즈음엔 차라리 그 치기만만한 호기가 그립고 즐겁다. -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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