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지만 시끄럽지 않은 절집, 부안 능가산 내소사

2022. 2. 13. 06:47바롱이의 쪽지/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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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기념물 내소사일원 (來蘇寺一圓)]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소래사(蘇來寺)라 하였다가 내소사로 바뀌었다. 바뀐 까닭은 확실하지 않으며 그 시기만 임진왜란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대웅보전(보물 제291호)과 설선당, 보종각, 부안군 벽산면의 실상사터에서 옮겨 세운 연래루가 있다. 특히 대웅전은 조선 인조 2년(1633)에 청민대사가 지은 건물로 건축양식이 정교한데 단충과 보상화를 연속적으로 조각한 문을 눈여겨볼 만하다.

그 밖에도 고려시대에 제작된 동종(보물 제277호)과 3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등이 남아있다.

출처:문화재청


"장승"


[내소사 석포리.입암(내소사) 당산제]

역사와 배경

입암(내소사) 당산제의 역사는 문헌상 명확히 정립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역사를 가늠하가가 사실상 불가능 하지만, 신목으로 모시고 있는 느티나무의 수령이 각각 1,000년과 700여 년이 되었기 때문에 고려시대를 즈음해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는 설과, 조선시대 민속신앙이 기층민들의 생활 깊숙이 전파되었을 때부터 시작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입암(내소사) 당산제의 원형은 민간주도에 의해서.전승되어진 것이 아닌, 사찰(내소사)의 주도하에 오래토록 전승되어 왔으며, 불교신앙과 민간신앙의 결합에 의한 복합신앙의 형태를 띠고 있다.이는 토속신앙을 받들고 있는 기층민들을 사찰 내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임으로서 불교신앙의 입지를 강화하면서 포교를 병행하는 형태였다. 원형적인 부분에서 기존의 당산제와는 그 형식과 의식이 다소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며, 제례의식과 굿의 형태는 불교적인 의식을 따랐다.

현황

입암 당산제는 정확한 표현에 의하면 내소사 당산제로 불리워지다가 현재 마을단위로 당산제를 지내게 되면서부터 입암 당산제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당산은 들당산과 날당산이 있으며, 각기 사찰 안에 있는 할머니당산과 사찰입구 마을 북쪽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으로 불리고 있다.

입암리에는 종래에·당산제를 치러오던 웃뜸 서낭당이 있었으나, 큰 길이 나고 토속신앙이 퇴색해지는 근래의 여러 영향에 따라 1940년대에 이르러 더이상 마을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있었으며, 그 후 웃뜸 서낭당 당제보다 그 역사가 오래된 입암(내소사) 당산제에 자연스럽게 합류되었고 1990년 이후 사찰에서 당산제를 마을로 이관함에 따라 할아버지 당산을 마을 주신으로 받들고 있타..

웃뜸 당산제를 치루고 있을 당시에도 사찰에서 치루는 당산제에 근동의 마을주민들이 다수 참여해 길흉화복을 빌었던 것으로 보이며, 입암(내소사) 당산제는 음력 1월 14일, 웃뜸 당산제는 음력 1월 15일 각기 치러졌다 한다. 웃뜸 당산제를 통하여 갖추어진 종래의 의식이 당산제 폐지에 의해 전승이 끊겼다가 입암(내소사) 당산제를 통하여 재현됨과 동시에 마을에서 모시던 신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보이며, 그 의식과 신앙의 형태가 더욱 굳건히 다져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소사 일주문 수령 700년 느티나무"

할아버지 당산(날당산)


"부안 능가산 내소사 일주문"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길"


[전나무 숲 이야기, 위기, 극복 그리고 희망]

전나무는 곧게 자라며 가지와 잎이 주로 나무 윗쪽에 있고,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는 특성상 무게중심이 위에 있기 때문에 강풍에 약하다. 이러한 이유로 2012년 태풍 볼라벤의 영향을 받아 전나무 30여 그루가 넘어졌고, 10여 그루는 줄기가 꺾여 나갔으며, 부러진 전봇대처럼 반 토막만 남은 전 나무들은 고사했다. 현재는 이끼와 버섯이 자라고, 곤충과 새의 집으로 사용된다. 또한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키 작은 나무가 자라나 새로운 생태계가 이루어졌다.


"고사목과 신발"

전나무 숲길 고사한 전나무 밑둥에 쌓인 돌탑과 꼬마 신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에 이르기까지 600m 가량이 전나무 숲길로 이어진다. 잘 자라 터널을 이룬 전나무 아래로는 드문드문 산죽이 깔려 더욱 청신하다. 침엽수 특유의 맑은 향을 맡으며 이 길을 걷는 동안 웬만큼 속이 시끄러운 사람이라도 마음이 누그러질 듯하다. 일주문에서 경내에 이르는 거리는 마음의 먼지를 떨고 부처의 세계로 가는 마음을 가다듬는 데 필요한 만큼이라고들 하는데, 이 길이야말로 그 말을 실감하게 한다. 천왕문 바로 앞에는 잠시 단풍길이 이어진다. 단풍나무가 시작되는 곳에서 길은 왼쪽으로 조금 꺾이고, 되돌아보면 일주문도 전나무 숲길에서 약간 비스듬히 앉았다. 이 작은 꺾임들이 있음으로 해서 길은 몇 배나 더 그윽해졌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전나무 숲 이야기]

전나무는 사계절 늘 푸른 침엽수로 피톤치드가 많이 분비된다. 피톤치드는 식물을 의미하는 피톤(Phytho)과 살균력을 의미하는 치드(Cide)가 합성된 말로, 나무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뿜는 자연항균물질을 말한다. 피톤치드의 주성분은 '테르펜'이라는 물질로 이는 숲 속의 향긋한 냄새를 만들어내는 물질이다. '테르펜'은 식물에게는 살충 및 항균효과가 있고, 사람에게는 중추신경의 흥분을 완화시키는 진정효과와 스트레스 감소, 혈압강하, 아토피치료 등 광범위한 효과가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길" 


[부안 내소사 해우소]

제15회 [아름다운화장실대상] 동상을 수여한 부안 내소사 여운이 넘치는 해우소다. 해우소 뒤로 승가산의 푸른 숲과 암석이 보인다.


"내소사 옛 해우소"


[내소사 전경]

사람들은 안의 것과 밖의 것을 가르고 밖의 것을 밀쳐내려고 담을 쌓곤 하지만, 내소사 천왕문 좌우의 야트막한 돌담은 단절감이 아니라 오히려 따뜻한 끌어안음을 느끼게 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천왕문"


"사천왕상, 가족 관람객, 벚나무 길"


"내소사 벚나무길"


[보호수 수령 1000년 할머니 당산 느티나무]

절 안은 야트막한 축대와 계단이 몇 차례 거듭되면서 조금씩 높아진다. 두번째 계단을 올라서면 만나게 되는 수령 1000년 된 나무는 입암마을의 할머니 당산으로, 일주문 바로 밖에 선 할아버지 당산나무와 한짝을 이룬다. 임진왜란 이후 불교가 중흥하면서 칠성각, 산신각 등 민간신앙들이 절 안으로 끌어들여지지만 당산나무까지 들어온 것은 매우 드문 예다. 해마다 정월 보름에는 할머니 당산나무 앞에서 내소사 스님들이 제물을 준비하고 독경을 하며 입암마을 사람들과 함께 당산제를 지낸다. 해방 전까지는 줄다리기를 하고 그 줄로 당산나무에 옷을 입히기도 했으나 지금은 인줄만 쳐놓고 제를 지낸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부안 내소사 수령 300년 보리수 나무와 열매"


"나무속 동자상과 보종각"


"보종각"

고려 동종은 본래 청림사 종이었으나 조선 철종 4년(1853)에 이곳 보종각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보물 부안 내소사 동종 (扶安 來蘇寺 銅鍾) Bronze Bell of Naesosa Temple, Buan]

부안 내소사 동종(扶安 來蘇寺 銅鍾)은 고려 시대 동종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종으로 높이 103㎝, 입지름 67㎝의 크기이다.

종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에는 덩굴무늬 띠를 둘렀고, 어깨부분에는 꽃무늬 장식을 하였다. 종의 어깨 밑에는 사각형의 유곽이 4개 있고, 그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유두가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는 연꽃으로 장식했고, 종의 몸통에는 구름 위에 삼존상이 새겨 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좌·우 양쪽에 협시불이 서 있다. 종 정상부에는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과 큰 용머리를 가진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가 있다. 고려 고종 9년(1222)에 청림사 종으로 만들었으나, 조선 철종 원년(1850)에 내소사로 옮겼다.

한국 종의 전통을 잘 계승한 종으로, 그 표현이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고려 후기 걸작으로 손꼽힌다.

[영문 설명]

The bell shows well the features of bronze bells made in the Goryeo Dynasty. 103cm tall and 67cm wide, the top and bottom parts of the bell have a band of vine while the shoulder part is adorned with a floral pattern. Under the shoulder of the bell there are four square panels with nipple-like protrusions.

The dangjwa, which is the part of the bell to be struck, is engraved with lotus flowers and the body of the bell with Buddha Triad on clouds.

The main Buddha in the middle sits on a lotus flower in full bloom with two Bodhisattvas standing on either side. At the top of the bell are sound knobs and yongnyu (dragon ring) in the shape of a large dragon head which is used to hand the bell. The bell was originally made for the Jeongnimsa Temple in 1222 (the 9th year of the reign of King Gojong of Goryeo) but was moved to the Naesosa Temple in 1850 (the 1st year of the reign of King Cheoljong of Joseon).

This bell is a prime example of traditional Korean bells, and it’s regarded as a masterpiece of the later Goryeo Dynasty for its elaborate and realistic design.

출처:문화재청


[봉래루]

봉래루의 주춧돌들은 높았다 낮았다 높이가 일정하지 않은 채 윗부분만 다듬어 기둥을 얹은 것들이라 그에 따라 기둥도 짧았다 길었다 한다. 우리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있는 그대로에 꼭 필요한 손질만을 가해 가져다쓰는 천연덕스러운 사고방식이 여기서도 보인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내소사설선당과요사 (來蘇寺設禪堂과寮舍)]

내소사는 변산반도 남단에 있는 절로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지었으며, 소래사라 하였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것에 대한 사료적 근거는 없지만, 중국의 소정방이 이 절을 찾아와 시주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인조 11년(1633)에 다시 짓고, 고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소사 경내에 있는 설선당과 요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건물이다.

설선당은 인조 18년(1640)에 청영대사가 지은 것으로 앞면 6칸·옆면 3칸의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오른쪽 1칸은 마루이고, 앞면에서 남쪽 2칸은 난방을 위한 부엌으로 큰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요사는 설선당과 함께 인조 18년(1640)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앞면 6칸·옆면 2칸의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2층 맞배지붕집이다. 현재 1층은 스님들의 방과 식당,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2층은 마루로 식료품이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도록 각 칸의 벽면에 환기창을 설치하였다. 

설선당과 요사는 4면이 연결되어 중앙 내부에 마당과 우물이 둔 回자형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범종각"


[보물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扶安 來蘇寺 大雄寶殿) Daeungbojeon Hall of Naesosa Temple, Buan]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세운 절로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다고 한다.

이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신 불전으로 조선 인조 11년(1633) 청민대사가 절을 고칠 때 지은 것이라 전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짜은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포개진 모습은 우리 옛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앞쪽 문에 달린 문살은 꽃무늬로 조각하여 당시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면 벽체 윗부분에 있는 부재 끝을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보머리에는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 건물의 화사함을 더해 준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맞추어 지붕 윗부분을 가리고 있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불상 뒤쪽 벽에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 가장 큰 ‘백의관음보살상’이 그려져 있다.

공예로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과 독창적인 장식물 등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 양식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영문 설명]

The Naesosa Temple is believed to have been built and named the Soraesa Temple by a Buddhist monk named Hyegu in 633 (the 24th year of the reign of King Mu of Baekje).

It is uncertain when the name was changed. The Daeungbojeon Hall housing a Buddha statue was built when monk Cheongmin repaired the temple in 1633 (the 11th year of the reign of King Injo of Joseon).

The hall measures 3 kan (a unit of measurement referring to the distance between two columns) by 3 kan under a hip and gable roof. The column heads decorating the top of each pillar are also designed to support the weight of the roof. This is called dapo (multiple column-heads) style in which beams are columns are laid on top of each other at the end, which is a common feature in the architectural works of the Joseon Dynasty. The front lattice doors are carved with a floral pattern, which demonstrates the wood carving skills of the time.

The column heads in the hall are engraved with a lotus bud pattern, and each tip of the beam is engraved with a dragon with a fish in the mouth. The ceiling beams are criss-crossed and clearly visible, except the center which is covered with wooden boards. The mural behind the Buddha statue is called the ‘Avalokitesvara Bodhisattva in White Robe', which is the largest of its kind still preserved in Korea.

This hall has lattice doors elaborately carved with patterns that are considered to be of both artistic and historical value.

출처:문화재청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내소사삼층석탑 (來蘇寺三層石塔)]

내소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3층 석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급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둥근 형태의 크고 작은 석재 2개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1층 탑신에 비해 2층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규모가 작은 탑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른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조선 인조 11년(1633)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낮은 기단과 거의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집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 성행한 다포계 건물로서 공포는 외 3출목, 내 5출목으로 복잡하게 짜여 있으며 밖으로 삐져나온 제공의 쇠서들이 겹겹으로 중첩되어 매우 장식적이다. 법당 내부의 제공 뒤뿌리에는 모두 연꽃 봉우리를 새겨, 우물 반자를 댄 천장에 가득한 꽃무늬 단청과 더불어 법당 안에 화사함을 뿌린다.

이 건물은 못을 쓰지 않고 나무토막들을 깎아 끼워 맞춰 세운 것으로 그 공력과 기술에는 탄복할 수밖에 없다. 전설에 따르면, 청민선사가 절을 중건할 당시 대웅전을 지은 목수는 3년 동안이나 나무를 목침덩이만하게 토막 내어 다듬기만 했다고 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사미승이 그중 한 개를 감추자, 나무깎기를 마치고 토막 수를 헤아려 본 목수는 자신의 실력이 법당을 짓기에 부족하다면서 일을 포기하려 했다. 사미승이 감추었던 나무토막을 내놓았지만 목수는 부정 탄 재목을 쓸 수 없다 하여 끝내 그 토막을 빼놓고 법당을 완성했다. 그래서 지금도 대웅보전 오른쪽 앞 천장만 왼쪽에 비해 나무 한 개가 부족하다고 한다.

엄숙함이나 장중함보다는 다정함 쪽에서 바라보아야 할 이 건물은 보물 제2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웅보전 현판"

조선후기 학자 이광사가 동국진체로 쓴 현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내소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내소사<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화재이후 대대적인 중창이 진행되었을 18세기에 조각승 상정과 계초에 의해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며, 상정과 계초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조각승으로 함께 조각한 불상은 아직 없고, 조각승 계초의 경우 현재까지 단 2구 뿐으로 내소사의 삼존상은 계초의 불상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내소사 대웅보전 건축 전설속 이야기]

법당 내부를 장식한 단청에도 한 군데 빠진 곳이 있는데, 여기에도 전설이 한자락 물려 있다. 법당 건물이 완성된 후 한 화공이 찾아와 단청을 하겠다고 자청하면서 100일 동안 아무도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부탁했다. 99일째 되는 날, 이번에도 사미승은 궁금증을 못 이기고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법당 안에서는 금빛 새 한 마리가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다가 사미승이 보는 것을 알고는 그냥 날아가버렸다. 그래서 법당 좌우에 쌍으로 그려졌어야 할 용과 선녀 그림이 오른쪽에는 그려지지 못했다고 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웅보전 후불벽화 백의관세음보살좌상"

불상 뒤편 벽에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큰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다.


"대웅보전 물고기와 여의주를 문 용조각"


[내소사 대웅보전 꽃살문]

내소사 대웅보전은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모두 나무로만 깎아 끼워 맞추었으며, 장식이 매우 화려하고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건물양식을 띠고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단청은 모두 퇴색되어 나무결이 그대로 드러났음에도 그 특유의 고풍스러움과 화려함을 여전히 느낄수 있다. 꽃살문은 연꽃, 국화 등의 꽃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데 그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선조들의 섬세함을 엿볼 수 있다.

 

대웅보전에서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역시 정면 3칸 여덟 짝의 문살을 장식한 꽃무늬일 것이다. 연꽃이며 국화꽃이 가득 수놓인 문은 그대로 화사한 꽃밭을 이룬다. 원래는 채색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비바람에 씻기고 나뭇결만 남아, 오히려 하나하나 새기고 파서 절집을 장엄하려 한 간곡한 정성만이 오롯이 드러난다. 꽃무늬는 간살 위에 떠 있으므로, 법당 안에서 문을 보면 꽃무늬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단정한 마름모꼴 살 그림자만이 정갈하게 비쳐든다. 이 또한 ‘화려하지만 시끄럽지 않은’ 내소사의 한 면모인 듯하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내소사 대웅보전 꽃살문"


"큰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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