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나주목 관아와 향교

2022. 2. 28. 05:31바롱이의 쪽지/전라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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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나주목 관아와 향교 (羅州牧 官衙와 鄕校) Naju-mok Government Office and Local Confucian School]

나주는 삼국시대 때부터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전근대 사회 동안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고, 고려왕조부터 조선왕조까지 약 1,000년 동안 목(牧)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한 전라도의 대표적 큰 읍치이었으며,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이 그에 상당한 권위를 보여주고 있어 상당한 가치가 있다.

나주 관아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성읍지, 여지도, 나주목지도를 비롯한 고지도 등에서 위치와 건물 구성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으며. 객사 등의 발굴 성과와 옛 사료들을 토대로 조선시대 지방통치 중심지의 구조를 파악하고자 할 때, 현존하는 관아 건물이 좌표축의 구실을 하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

나주 향교는 평지에 들어선 전묘후학의 배치형태를 띠고 있는 전형적인 예이며, 특히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대성전은 그 규모가 대단히 웅장할 뿐 아니라 양식, 격식이 뛰어나 조선후기 향교건축을 대표할 수 있어 건축학적 가치가 크다. 또한 나주향교는 조선시대 교육시설의 규모를 따지면 성균관 다음이라고까지 지칭될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교육과 제사의 고유기능을 간직하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영문 설명]

Agriculture was highly developed in the Naju area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1st century BC- AD 7th century), contributing to the region's affluence throughout the pre-modern times. From the Goryeo (918-1392) to the Joseon (1392-1910) Periods, Naju was the administrative seat of Jeolla-do Province and Naju-mok at the time. The existing Joseon government offices and local Confucian school attest to the remarkable influence of the region over a millennium.

The location and layout of the Naju-mok government offices are described in detail in several ancient books and documents, including Sinjeung dongguk yeoji seungnam (New Augmented Survey of the Geography of Korea), Geumseong eupji (Annals of Naju), Yeojido (Detailed Map), and Map of Naju-mok. Among its various structures, the main office building survives, serving as the coordinate axis for archaeological excavators surveying the local government compound.

The local Confucian school of Naju has an impressive main shrine dedicated to Confucian sages standing in front of a lecture hall. The layout is typical of the Joseon Confucian schools built on flat land. The Daeseongjeon Shrine of this school, designated as Treasure No. 394, stands out in terms of both scale and style. Its prominent architectural value aside, the Naju Confucian school was second only to the Seonggyungwan National Academy in all of Joseon in terms of its importance as a public education institution and a venue for rites to Confucius and eminent scholars of Korea and China of the past ages.

출처:문화재청

나주목 관아와 향교


[보물 나주 금성관 (羅州 錦城館) Geumseonggwan Guesthouse, Naju]

나주 금성관은 조선시대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망궐례를 행하던 객사 건물로서,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각종 기록과 구조양식으로 보아 전체적인 건축물의 규모와 골격은 1617년 중수시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고 추정되며, 목조 가구와 세부 공포형식은 1775년과 1885년 중수시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금성관은 주심포계 양식의 요소를 채용한 익공계 공포 구성이 돋보이며, 1출목 3익공식의 공포형식은 제한된 공력으로 충분한 위계를 드러내고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변형 기법으로 볼 수 있다. 월대와 평면 및 입면 그리고 천장 등을 일반적인 객사와는 달리 궁전의 정전과 유사하게 구성한 점은 금성관만의 고유성을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다. 금성관 정청은 조선시대 객사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서 일반적인 맞배지붕의 정청과 대비되는 희귀성을 갖는다. 이 점은 부근에 위치한 나주향교 대성전이 일반적인 조선시대 향교 대성전의 맞배지붕과 달리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점과 함께 지역적인 특수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영문 설명]

The Geumseonggwan Guesthouse is a Gaeksa, a type of guesthouse where foreign envoys used to stay during the Joseon Period and where wooden plaques containing the Chinese characters “殿” and “闕”, symbols of the king, were kept so that local government administrators could pay their respects there. Based on ancient records and its structural pattern, it is assumed that the overall structure is more or less the same as it was after being renovated in 1617. Indeed, the overall wooden structure and the details of the roof-supporting bracket system display the techniques used at the time of the building’s renovation in 1775 and 1885.  

The structure of its bird wing-shaped bracket supporting eaves that adopts a system using brackets only on columns looks particularly conspicuous. The use of a roof-supporting bracket system with three bird wing-shaped brackets supporting the eaves with only one arm appears to have been chosen to embellish the hall with limited resources. Its platform, plane, elevation, and ceiling resemble those of the main hall of a royal palace rather than those of an ordinary gaeksa. As for the main hall, it is larger than any other gaeksa structures of the Joseon Period and has a hip-and-gable roof, rather than a gable roof (“八”-shaped from the side) like those of other main halls. Given that the nearby Naju Hyanggyo Daeseongjeon Hall (where sacrificial rites were performed for Confucius and the great Confucian scholars) also has a hip-and-gable roof, it appears that this kind of roof was a local development.

출처:영문 설명


"보물 나주 금성관"


"금성관 보호수 수령 650년 은행나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금성토평비 (錦城討平碑)]

고종 31년(1894) 동학농민운동이 터졌을 때, 관군이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거북을 새긴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받침돌은 땅 속에 파묻혀 그 윗부분만 보이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농민운동이 일어나 나주에까지 동학군이 쳐들어오게 된 과정과 당시 나주목의 수령이던 민종열 목사가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치밀한 방어계획을 세웠던 사실, 그리고 관군과 동학군이 나주목에서 싸우는 과정등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동학군에 반대했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짐작되며, 비문은 기우만이 짓고 송재회가 글씨를 써서 고종 32년(1895)에 세웠다.

동학항쟁 당시 나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여 동학농민운동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문화재청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사마비 (駟馬碑)]

옛 나주군청에 서 있는 비로, 원래는 과원동 사매기 (‘사마교’의 음이 잘못 전하여 생긴 말인듯함)의 한 민가 담 옆에 있던 것을 1968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고려 현종 2년(1011) 거란이 쳐들어오자 왕은 수도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이곳 나주에서도 10여일 동안 머무르는 일이 있었다. 왕이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지나갔는데, 그 때부터 이 다리를 ‘사마교’라 불렀으며, 조선시대에 와서 고을 현감이 이 다리를 수리한 후 그 기념으로 비를 세워 놓았다.

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받침돌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둘렀고, 머릿돌에는 구름무늬를 가득 새겼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사마교비’라는 비의 명칭을 가로로 새겼고, 앞뒷면에 걸쳐 비문을 새겨 놓았는데,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문에 의해 조선 효종 4년(1653)에 비를 세웠음을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이곳으로 물이 흐르지 않아 다리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출처:문화재청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정수루 (正綏樓)]

조선 선조 36년(1603)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우복용이 지은 것으로, 나주의 관아문 구실을 했던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며, 1층 양 옆은 벽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은 개방하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2층에는 한때 시간을 알리기 위해 매달아 놓았던 북을 다시 복원해 놓았다.

출처:문화재청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나주목사내아 (羅州牧使內衙)]

조선시대 나주목에 파견된 지방관리인 목사(牧使)의 살림집으로, 건물의 이름은 ‘금학헌’이었다.

목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동헌의 정문이었던 정수루에서 서쪽으로 약 65m 떨어진 곳에 있다.

언제 지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대문 옆에 있는 문간채를 고종 29년(1892)에 만든 것으로 보아 살림집 역시 19세기에 지은 건물로 여긴다.

앞쪽에 퇴칸을 둔 ㄷ자형 집으로 앞면 3칸 규모이며, 현재 본채와 문간채만 남아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일제시대 이후 군수의 살림집으로 사용하면서,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이다.

나주목사 내아는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리던 객사와 아문루가 함께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 관아건축의 원래 모습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나주 목사내아 금학헌 벼락 맞은 팽나무]

목사내아 금학헌에는 오백년 세월동안 묵묵히 이곳을 지켜주는 벼략 맞은 땡나무가 있다. 1980년대 어느 날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지고, 천둥 번개가 내리치던 밤 목사내아 금학헌 팽나무는 벼락을 맞고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금학헌 팽나무는 뿌리 깊은 나무의 강한 생명력으로 기적처럼 살아나 여전히 목사내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나주시민들은 영험한 금성산 기운을 받은 명당이자 천년동안의 나주목사 금학헌 기운이 팽나무를 다시 살린 것으로 믿고 있다.


[나주향교 (羅州鄕校)]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나주향교는 태조 7년(1398)에 지었으며, 내부에 계성사라는 사당이 있는데 이곳에는 공자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로 인해 향교의 배치방법이 다른 향교와 다르다. 대부분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배움의 공간을 앞에 두고, 뒤에 제사공간이 있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계성사가 있기 때문에 대성전과 명륜당의 위치가 바뀐 전묘후학을 따르고 있다.

호남지방의 향교 중 계성사가 있던 다른 향교는 전주향교와 함평향교 등이 있다. 나주향교의 대성전은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갖춘 건물로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책 등을 지급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제사만 지낸다.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책은 이 지방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나주향교 대성전 (羅州鄕校 大成殿) Daeseongjeon Shrine of Naju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에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나주향교는 태조 7년(1398)에 세워 제사와 교육기능을 수행하다가 신학제 실시 이후로는 제사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다.

대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교육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주향교는 공자의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사가 있어 명륜당과 대성전의 자리가 바뀌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인데, 기둥 사이에는 꽃모양의 받침을 만들어 위에 있는 부재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뼈대가 다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평면과 세부기법에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향교 대성전 양식을 찾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며, 서울문묘·강릉향교·장수향교와 더불어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중요한 향교문화재이다.

[영문 설명]

A hyanggyo is a local Confucian school established by the government to provide education and to hold memorial ceremonies for Confucius and other sages. Naju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was established in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Taejong (1407). However, since the modern school system was introduced, it has only performed memorial services.

The Daeseongjeon Shrine is the place where memorial services were held and is generally located at a higher location than the Myeongnyundang Hall, the education hall, but Najuhyanggyo has a Gyeseongsa Shrine in which to perform services for the father of Confucius, and in this case, the locations of the two halls are switched.

With five kan (a unit of measurement referring to the distance between two columns) in the front and four kan at the side, the building has a hip and gable roof called paljakjibung. The decorated column-heads made to support the weight of the roof rest only on the pillars. This is called jusimpo style. Partly however, the building also uses the wing construction technique in which a base is built between the pillars, which means that it was constructed in an eclectic way. The inside of building is floored, and the ceiling is made up to leave the frame visible.

With its detailed technique and large scale, this is a good example of the typical style of Daeseongjeon Shrine in mid Joseon, and along with Munmyo Confucian Shrine in Seoul, and Gangneunghyanggyo and Jangsu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s, it is an important cultural asset.

출처:문화재청


"나주향교 명륜당, 보호수 수령 500년 비자나무, 대성전 후면"


"나주향교 은행나무"


[나주향교 비석군]

나주향교 운영 관리와 관련하여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여 놓은 비들이다. 특히 충복사유허비는 정유재란 내 향교 우두머리 김애남이 위패를 안전하게 보호한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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