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명주군왕릉

2022. 4. 17. 06:09바롱이의 쪽지/강원도

반응형

[강원도 기념물 명주군왕릉 (溟州郡王陵)]

신라하대의 진골 귀족으로 강릉 김씨의 시조인 김주원의 묘소이다. 그가 명주군왕으로 봉해졌기에 왕릉이라고 부른다.

태종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의 5세손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무열왕의 셋째아들인 문왕의 5세손이라고 하며, 선덕왕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자 왕가의 혈족인 그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가 경주로 가는 중에 큰 비가 내려 강을 건널 수 없어 회의에 참석치 못하게 되었다. 이에 신하들은 하늘이 그를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함이니 다른 사람을 뽑자하여 김경신(후의 원성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김주원은 이듬해 선대로부터 인연이 있는 명주(지금의 강릉)로 와서 중앙과 대립하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명주군왕 ’으로 봉해졌으며,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원성왕은 그에게 통천에서 평해까지의 동해안 일대를 식읍(食邑:공신에게 주는 땅)으로 주었다.

현재 묘역에는 봉분 아랫부분에 긴 사각형의 둘레돌을 두른 묘 2기가 앞뒤로 배치되어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가 있다.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 동물석상이 한 쌍씩 세워져 있고, 동네 입구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명주군왕릉 청간사, 숭열전, 숭의재"


[청간사]

청간사는 1769년 종중에서 지은 목조 3칸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1954년에 다시 지었다. 앞면 3칸 단층맞배지봉으로 목조기와집이다. 내부에는 청간사 현액, 위패, 기문, 상량문, 영정 등이 있다.

청간사는 조선조 생육신 가운데 한 분인 김시습을 배향한 사우다. 김시습(세종 17년, 1435 ~ 성종 24년, 1498)은 강릉김씨의 시조 명주군왕 김주원의 23세손이다.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동봉, 시호는 청간, 법명은 설잠이다. 시습이란 이름은 세종 때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지어준 이름인데, 3살 때 시에 능했고, 5살 때에는 중용. 대학에 능통하여 신동으로 불러졌다. 

1455년 삼각산 중홍사에서 공부하던 중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부하던 책들을 태우고 승려가 되어 방랑길을 떠났다. 그는 수양대군의 부도덕한 왕위찬탈에 통분하였으며 자신의 영달을 위해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선비정신을 지향하면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다. 정조 6년1782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숭열전]

승열전은 1978년에 준공하였고, 이듬 해 경주에 있는 태종무열왕릉에서 신주를 연혼하여 본전에다 봉안하였다.

승열전은 강릉김씨의 시조인 명주군왕 김주원의 5대조인 태종 무열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무열왕(604년~661년, 재위 654년~661년)은 응변이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뒤어난 임금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신라의 중대 가 시작 되었다. 그는 왕권의 전제화를 확립 하였고,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군사조직을 강화하여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숭의재]

김주원은 강릉김씨의 시조로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의 6세손이다. 그는 37대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돌아가자 왕위에 오르기 위해 궁성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알천(서라별에 있는 내)이 범람하여 궁성으로 들어가지 못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대신 상대등 김경신이 왕위(원성왕)에 올랐다.

주원은 원성왕 3년에 명주일대를 식읍으로 받으면서 명주군왕에 봉해졌다. 이후 5세손인 영길의 딸이 고려 태조 왕건의 비가 되면서, 태조는 주원의 왕위를 사양한 덕을 칭송하였고, 또 만세지사라 하여 만세사라는 사액을 내려 불천지주로 모시게 하였다. 제수는 관봉으로 지급되었으며, 강릉부사가 주재하다가 1905년 제물 공급이 철회되면서 종중에서 맡았다. 해방이 되고 명주군왕릉이 지방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면서 지방장관이 초현관이 되고, 제수는 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명주군왕비, 숭의재, 숭열전, 청간사"


"명주군왕비와 홍살문"


"삼왕사와 명주군왕릉"


[강릉 명주군왕릉]

명주군왕릉은 강릉 김씨 시조인 김주원의 묘이다. 김주원은 태종무열왕의 5세손으로, 그가 명주군왕으로 봉해지고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된 내력에는 신라 중대에서 하대에 이르기까지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치열한 다툼의 사연이 있다.

785년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이 선덕왕이 죽자 군신들이 의논하여 선덕왕의 친족이며 당대의 실력자로서 여러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김주원을 추대하려 했다. 그러자 선덕왕의 즉위와 더불어 상대등에 올라 세력을 잡고 있었던 김경신이 돌발적인 정변을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원성왕이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김주원은 원성왕에게 위협을 느끼고 멀리 강릉 지방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김주원이 강릉에서 기반을 잡고 힘을 키워 왕권과 대립하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자, 원성왕은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추대하여 지방 세력으로만 묶어둠으로써 중앙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는 회유책을 썼다.

그리하여 강릉에 머물게 된 김주원은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강릉 지방을 중심으로 신라 말까지 지방 호족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신라 말 크게 세력을 확장한 구산선문 중 강릉 일대에 둥지를 튼 사굴산파의 본산 굴산사를 적극 지원하여, 지방의 중요한 정치 및 종교 세력이 되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서울, 곧 경주로 입성하려 하였으나(당시 김주원의 집은 경주 북쪽 20리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북천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지 못하게 되어 대신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원성왕의 변칙적인 즉위를 자연의 신성한 힘에 의한 것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설화라고도 볼 수 있다.

명주군왕릉을 삼왕릉(三王陵)이라고도 하는데, 김주원의 2대손까지 명주군왕직을 세습하였기 때문이다. 명주군왕릉 일대의 관련 건물들로는 능을 수호하기 위해 세운 삼왕사,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숭의재, 능향전, 명왕비각, 그리고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한 청간사 등이 있다. 김시습은 명주군왕의 후손(강릉 김씨)이며, 청간(淸簡)은 김시습의 시호이다.

강릉 일대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는 강릉 김씨 시조의 묘소인지라 규모도 크고 관리에도 소홀함이 없다. 눈썰매 타기 좋게 경사진 비탈에 4개의 장대석을 잇대어 만든 방형(方形)의 군왕 묘가 있고, 비탈에 쌓은 층층의 축대 위에 동자석과 문신석, 망주석, 사자석 등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 병풍을 친 듯 소나무가 묘역을 둘러싸고 있으며, 묘역은 대관령을 향해 있다.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728x90
반응형

'바롱이의 쪽지 > 강원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적 강릉대도호부 관아  (0) 2022.04.19
보물 강릉 대창리 당간지주  (0) 2022.04.18
강릉 명주 원숭이 나무  (0) 2022.04.16
강릉시립박물관  (0) 2022.04.15
강릉 신복사지  (2) 2022.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