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동아대학교 박물관

2022. 5. 20. 07:00바롱이의 쪽지/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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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등록문화재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 (釜山 臨時首都 政府廳舍) Provisional Government Building, Busan]

이 건물은 도청 소재지를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기면서 건립한 경남도청으로, 한국전쟁 당시 임시 정부청사로 사용하였다. 처음 준공할 때는 ‘一’자 모양의 평면으로 구성하였으나, 1960년대 증·개축으로 ‘ㅁ’자 모양, ‘日’자 모양으로 바뀌었다. 정면 가운데에 현관 포치(porch)가 돌출되어 있고, 가운데와 양쪽 끝 부분을 돌출시키고 그 위쪽을 박공지붕으로 구성하는 등 전체적으로 위엄 있는 입면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간직한 역사적인 건물로 구 경상남도지사 관사(지금의 임시수도기념관)와 더불어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근대 공공 건축물이다. 현재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영문 설명]

This building, built as Gyeongsangnam-do Provincial Government Building when the office relocated from Jinju to Busan, was used as the provisional government building during the Korean War. Although it was originally built in flat ‘ㅡ’ shape, expansion and reformation during the 1960s transformed its shape to ‘□’ and ‘日’ shapes. Gate porch protrudes in the middle of building’s front. The overall architectural design exhibits authoritarian atmosphere with protuberance in the middle and both ends and gable roof on the top. This historical building represents the political and social change in Korea’s modern history, and is considered to be a modern representative public building in Busan area together with former official residence of Gyeongsangnam-do governor (presently Provisional Capital Memorial Hall). It is currently used as the Museum of Dong-A University.

출처:문화재청


"제8회 졸업생 기증 학교종"


[보물 도기 말머리장식 뿔잔 (陶器 馬頭飾 角杯) Earthenware Horn Cups with Horse Head Decoration]

도기 말머리장식 뿔잔(陶器 馬頭飾 角杯)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무덤들 중 제7호 무덤에서 출토된 말머리 장식의 뿔잔(각배)이다. 각배란 본래 쇠뿔과 같은 동물의 뿔(각)로 만든 것을 말하지만, 넓게는 흙이나 금속 등으로 뿔잔의 형태를 본떠 만든 것도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라·가야 지역의 무덤에서는 여러 형태의 뿔잔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 뿔잔은 그 중에서도 뛰어난 걸작이다. 이 뿔잔은 큰 것이 높이 14.4㎝, 길이 17㎝, 작은 것은 높이 12.1㎝, 길이 17㎝로 크기가 서로 다르지만, 전체적인 형태와 제작 수법은 거의 동일하다.

뿔잔의 밑부분 끝에 말머리를 빚어 붙이고, 그 뒤쪽으로 조그만 다리를 2개 붙여 넘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말머리의 전체적인 형상은 귀·눈·코 등 말의 특징적인 표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뿔잔의 표면에는 조각칼과 유사한 도구로 깍아 다듬은 자국이 남아있다.

[영문 설명]

These two horn cups with a horse head decoration was excavated from the shell mound in Bokcheon-dong, Dongnae-gu, Busan (Tomb No. 7). Both cups that are actually made with an animal horn and earthenware or metal cups in the shape of a horn are referred to as gakbae (horn cup) in Korean. 

Horn cups of various types have been discovered, in great quantities, in graves located in areas that were former territories of Silla and Gaya. These two horn cups are arguably the best of them and masterpieces of their kind. The larger of them stands 14.4㎝ tall, measuring 17㎝ in length, and the smaller one has a height of 12.1㎝ and length of 17㎝. Aside from the difference in size, the two are overall identical, both in shape and the way they were crafted. 

A horse head is at the tail end of the cup which is held in upright position by two small feet located under the bottom arc. The horse head, although simple and even somewhat crude, expresses well the characteristic features of a horse. There are traces left from the use of a sculpting knife on the surface of the cups.

출처:문화재청


"녹도에 매장된 개"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쌍구장경호 (雙口長頸壺)]

이 토기는 쌍구의 삼국시대 도질토기로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중앙에 중심 아가리가 있고, 한쪽 어깨 면에 보조 아가리가 있다. 바닥이 둥글고 몸통은 원형이며, 주 아가리의 목이 길고 뚜껑받이 턱이 있는 원저장경호이다. 표면 색상은 흑색이고, 주 아가리의 경 부(頸部)에 파상문이 상하 2단으로 시문되었다.

이 쌍구장경호는 가야토기에 해당하나 보조 아가리가 있는 점이 매 우 특이하고, 현재까지 유적에서 출토된 예는 알려져 있지 않다. 보조 아가리가 없으면 산청·함양 등지에서 출토되는 유개식 원저장 경호와 유사하다. 삼국시대 가야 유적에서 출토된 일반적인 유개장 경호보다 규모가 크고, 무게가 무거운 대형 토기이다. 

이 토기는 고령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계 토기의 특징이 있지만, 동 부가 횡구형에 가깝고, 파상문의 치구수가 조밀하지 않는 등 전형 적인 대가야 양식 토기는 아니고, 대가야권의 주변부 지역 원저장 경호의 특징으로서 가야토기의 양상을 해명할 수 있는 자료이다.

2개의 아가리가 있는 토기는 출토 예가 드물어 이 시기 가야토기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흑유호 및 흑유정병 (黑釉壺 및 黑釉淨甁)]

흑유호는 회청색의 청자 태토에 기벽을 두껍게 하여 성형한 후 기 면의 안팎으로 흑유를 얇게 입힌 항아리로 내부의 시유상태가 좋은 편이며, 시유된 표면에는 빙렬이 균일하게 나 있다. 산화로 인한 유탈현상을 제외하면 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굽 언저리에 흙물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출토품으로 생각된다. 뚜껑이 있는 항아리 형태로 성형한 후 몸체 부분을 4면 형태로 편평하게 다졌는데, 합각이 되는 곳은 능형처럼 곡을 잡은 형태이다. 또한 몸체 부분 한 면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인물상이 날카로운 도구로 간략하게 음 각되어 있다. 

흑유정병은 어깨 부분(肩部)에 각이 진 짧은 주구(注口)를 지닌 형 태로 청동 또는 청자로 많이 제작되었던 정병의 형태을 지니고 있 다. 다만 이 정병은 자기로서는 선형적 양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즉, 목이 긴 고려시대 일반적인 정병의 형태와는 달리 중 간마디 위의 목이 짧은 편이다. 따라서 12세기에 번조된 흑유자기 의 하나로 추정된다.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흑유호와 흑유정병은 출토지가 같으며 청자 태토로 성형한 후 흑유를 시유한 12세기 고려시대 흑유자기들이다. 특히 흑유호의 경우 몸체 부분 4곳을 편평하게 한 후 합각되는 곳 을 능형으로 처리한 독특한 기형(器形)뿐만 아니라, 몸체의 한 면에 음각기법으로 인물상을 표현하고 있는 등 학술적, 예술적 가치 를 충분히 지닌 유물이다.

출처:문화재청

좌측 사진 흑유호(결가부좌하고 있는 인물상이 날카로운 도구로 간략하게 음 각되어 있다.) , 우측 사진 흑유정병


 

[보물 쌍자총통 (雙字銃筒) Ssangja Chongtong Gun]

쌍자총통(雙字銃筒)는 조선 중기에 사용하던 개인용 소용화기(小用火器)의 일종으로, 총구에 화약과 실탄을 장전, 불씨를 점화하여 발사하는 유통식이다.

총신이 쌍으로 이루어져 한쪽 총신에서 3발을 동시에 장전, 발사할 수 있어 양쪽 6발을 목표에 집중 사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비, 눈, 바람이 있을 때는 거의 사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총신이 짧아 원거리 사격에 적합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총신이 긴 반자동식 조총이 도입되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길이 52.2㎝, 구경 1.7㎝, 손잡이 6㎝인 이 총통의 총구쪽은 2개의 마디(죽절)가 있고, 손잡이 부분은 단순하게 처리하여 세련미를 자아낸다. 총신에는 글이 씌여 있는데, 선조 17년(1583)에 제작되었음과 사용법이 씌여 있다. 사용법에 의하면 탄환을 2개씩 장전할 수 있으므로 총 12발을 발사할 수 있는 희귀한 예이다.

[영문 설명]

Ssangja Chongtong is a small firearm of mid-Joseon. This barreled weapon was loaded with gunpowder or bullets through the muzzle and was manually ignited before firing. 

The gun has two barrels and can shoot six bullets at a time as each barrel takes three bullets. The gun was ill-adapted for rainy, snowy or windy weather, and its range was quite moderate due to the short barrel length. With the introduction of semi-automatic matchlocks with a longer barrel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Ssangja Chongtong gradually fell out of use. 

This item is 52.2㎝ long and measures 1.7cn in muzzle diameter and 6cm in stock length. The barrel has two rings shaped like a bamboo joint near the muzzle. The stock, tastefully simple in design, gives this gun a refined look. The inscription on the surface of the barrel indicates that the gun was made in 1583 (the 17th year of King Seonjo’s reign), providing also brief instructions for its use. According to the instructions, this gun can fire twelve bullets, as two bullets, instead of one, can be loaded at a time; which makes it a rare item.

출처:문화재청


"괴수연와"


[보물 감지은니 묘법연화경 권3 (紺紙銀泥 妙法蓮華經 卷三) Transcription of Saddharmapundarika Sutra (The Lotus Sutra) in Silver on Indigo Paper, Volume 3]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3(紺紙銀泥妙法蓮華經 卷三)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한 묘법연화경을 저본으로 1422년(세종 4)에 비구 덕명(比丘 德名)이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위해 발원하여 감지에 은니로 쓴 7첩 중 ‘권3’과 ‘권7’의 2첩에 해당된다.

표지에는 보상화문(寶相華紋) 네 송이가 장식되어 있으며, 화문(花紋)은 금니로, 화경(花莖)은 주로 은니로 그려져 있다. 권수(卷首)에는 금니로 변상도를 그리고 변상도 다음에 권두 서명과 구마라집의 역자(譯者) 표시가 보인다. 서체는 사경체(寫經體)의 특징인 조맹부체(趙孟頫體)로 썼다.

사경의 후면에는 묵서(墨書)와 주서(朱書)의 ‘광덕사(廣德寺)’ 사찰명이 쓰여져 있다. 이로 보아 이 사경은 천안의 광덕사에서 사성되었거나 혹은 복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면에 ‘광덕사’라는 사찰명이 주서되어 있고 이 사경과 크기·체제·경문의 글씨가 동일한 사경으로 보물 “감지은니 묘법연화경 권1”과 보물 “광덕사 고려사경” 중 ‘감지은니 묘법연화경 권2·4·5·6’이 있다. 기존에 지정되어 있는 것에 동아대학교 소장본인 권3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인 권7을 합하면 완벽한 “1질”을 이루게 되며, 이는 전래된 사경 가운데 전질이 밝혀진 것이 드문 예로써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영문 설명]

This is part of a Buddhist sutra version made by Monk Deokmyeong in 1422 (the 4th year of King Sejong’s reign) based on the one translated into Chinese by Kumaraju to pray for the peace of the spirit of his deceased mother.

The sutra is composed of seven volumes. The cover is adorned with four sets of Palmette patterns. The overall flower pattern is drawn in gold powder, whereas the stalks are done in silver powder.

The sutra painting at the beginning of the book is drawn in gold powder. It is followed by the title of the book, and then the name of the translator, Kumaraju. The characters are written in Zhao Mengfu-style handwriting. Written on the backside of the sutra is the name Gwangdeoksa Temple in black and red.

Vol. 3, which is kept at Dong-a University, Vol. 7, which is kept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coupled with Vol. 1 with the same size, format, and handwriting (Treasure No. 269), and Vols. 2, 4, 5, and 6 (Treasure No. 390) comprise a complete 7-volume set. This is a rare case of an original Buddhist sutra whose complete set has been found.

출처:문화재청


[보물 영산회상도 (靈山會上圖) Painting of the Vulture Peak Assembly]

Ο 전체 높이 : 세로 227.0cm, 가로 188.5cm 

 - 이 그림은 가로로 7매를 이어 만든 삼베바탕에 주(朱)를 전면에 칠한 후 백색안료와 황토로 각 상의 윤곽과 문양 등 세부를 그린 불화이다. 중앙상단의 본존불이 외형상 하품중생인을 짓고 있어 아미타불로 볼 수 있으나, 하단의 화기에 󰡒…靈山會…󰡓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영축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영산회상 중의 석가모니불로 여겨진다.

화면구성은 가운데 석가여래가 보단(寶壇) 위에 가부좌하였고 그 좌우에 동수(同數)로 열 구의 보살과 십대제자 그리고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묘법은 백색안료와 황토로 각 상의 윤곽과 문양 등 세부를 표현하였는데 각 존상의 신체부는 황토를 연하게 칠하고 윤곽은 먹선으로 잡았으며 머리카락은 군청을, 눈썹에는 녹청을 사용하였다. 

이 불화는 16세기의 선묘불화들이 모두 금선(金線)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백색 또는 황토를 사용하고 있고 화기(畵記) 역시 먹으로, 그것도 난필(亂筆)로 매우 형식적으로 쓰여 있다. 그러나 1565년 이라는 절대연도를 가지고 있고 국내에 있는 조선전기 불화가 불과 3, 4점(지정은 1점)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하겠다.

또한 이 그림은 백색과 황토선에 의한 현존 最古의 작품이며 궁정관련 인물의 발원에 의하여 제작된 그림과는 또 다른 화풍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당시의 불화화풍의 다양성을 짐작하는데 아주 좋은 자료로 짐작된다.

[영문 설명]

This scroll painting depicts the Historic Buddha's famous sermon on Mount Grdhrakuta, or Vulture Peak.

The Buddha is seated on a jeweled throne surrounded by ten bodhisattvas, ten disciples and the Four Guardian Kings on either side. From his hand gesture, the main Buddha may be seen as Amitabha, but in view of the colophon near the bottom containing an account about Mount Grdhrakuta, he is assumed to be Sakyamuni preaching on Vulture Peak.

The scroll consists of seven horizontal pieces of hemp cloth covered with a layer of vermillion pigment, upon which the images of Buddha, bodhisattvas, arhats and the Four Guardian kings as well as decorative patterns are expressed with outlines in white and loess colors.

Their bodies are lightly colored with loess powder and outlined with ink, while their hair is colored navy blue and eyebrows greenish blue. Only a few Buddhist paintings dated to the early part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still exist. While other 16th-century Buddhist paintings were executed with gold outlines, this has white and loess-colored outlines and the colophon was perfunctorily written in rough brushwork. It is clearly dated 1565 and is the largest among a few Buddhist paintings of the early Joseon Dynasty that remain today.

This is also Korea's oldest extant painting rendered with white pigment and loess powder. It differs in style from paintings executed under the commission of royalty and hence is important for the study of diverse styles of Buddhist painting in early Joseon.

출처:문화재청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목조보살좌상 (木造菩薩坐像)]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목조보살좌상은 허리부터 서서히 구부려진 자세에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고 왼손은 무릎 위에 두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하생(中品下生)의 수인을 취하였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고 무릎은 낮은 편이며, 양손은 별도로 제작하여 끼웠다.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목조보살좌상은 전체적으로 화려함이 배제되었으나,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돋보이는 우수한 작품이다. 특히 보관의 정면에 부착되었던 수정으로 만든 장식물과 통견의 착의법 등은 조선 후기 불상에서는 보기 드문 표현 기법들이다. 더욱이 통통한 얼굴과 후덕해 보이는 인상, 섬세한 보발의 표현, 귀 및 귀걸이 등의 표현에서 사실성이 드러나며, 큼직하고 대담하면서 볼륨감 있는 옷주름의 표현 등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목조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인 17세기에 제작된 불상 중에서도 작품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다양한 17세기 목조불상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석조관음보살좌상 (石造觀音菩薩坐像)]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석조관음보살좌상은 부드러운 재질의 석재로 제작한 것으로 보이며, 팔꿈치 양측, 군의 등에 호분과 같은 백색의 안료가 남아 있고, 부분적으로 검은색의 칠과 금빛이 확인되어 원래는 도금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 면 중앙에는 복장공이 노출되어 있는데, 복장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오른손을 왼손 위에 얹은 변형된 선정인의 수인을 하고, 머리에는 화불이 있는 원통형 보관을 쓴 단정한 모습의 석조관음보살좌상은 좁은 어깨, 어깨와 비슷한 너비로 전체가 사각형에 가까운 하반신의 신체 비례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은 우리나라에는 많이 전하지는 않지만 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유형이며, 수인의 형태는 고려시대 작품인 통영 안정사 소장 금동여래좌상 등 다수의 사례들이 남아 있다.

또한 옷 주름은 간략하고 대칭적이며, 양손 아래로 반원형으로 늘어진 옷자락이 특징적인데, 이와 같은 반원형 옷 주름은 통일신라시대 후기부터 등장하지만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다시 나타나는 특징이다.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석조관음보살좌상은 하반신이 사각형에 가까운 신체 비례를 가진 점 등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에 이르는 시기의 불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고려적인 얼굴과 조선 초기를 전후에 표현된 승각기 또는 군의만 남아있는 가슴 표현 등을 고려하면 조선 초기를 넘지 않은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보살상의 신체적 특징은 드문 사례로 고려 석불 등에서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 불상 양식의 계승과 조선 초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보살상은 우리나라 불교조각의 양식사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의령 보리사지 금동여래입상 (宜寧 菩提寺址 金銅如來立像) Gilt-bronze Standing Buddha from Borisa Temple Site, Uiryeong]

의령 보리사지 금동여래입상(宜寧 菩提寺址 金銅如來立像)는 1948년 5월 경상남도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도굴산에 있는 보리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1981년부터 동아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마치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 같으며, 원만한 얼굴에 비해 입은 매우 작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가슴부분에서 리본 모양의 매듭을 지었고 배에서 밑으로 반원형의 무늬가 가늘게 그어져 있다. 오른손은 옆에서 허리까지 내리고 왼손은 수평으로 들었는데 모두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다. 8각 대좌(臺座)는 앞면과 뒷면을 완전히 뚫어서 모양을 냈다.

전체적으로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문 설명]

This gilt-bronze standing Buddha was excavated from Borisa Temple at Dogulsan Mountain (in Gabeul-ri, Garye-myeon, Uiryeong-gun, Gyeongsangnam-do) in May 1948, and has been kept by Dong-A University since 1981.

The Buddha’s hair is expressed as a small usnisa (a protuberance symbolizing supreme wisdom, resembling an over-turned bowl) on the top of his head. He has a round face and a relatively small mouth. The Buddha’s robe covers both shoulders and is knotted with a bow at the chest, and features semicircular patterns expressed in thin lines below the stomach. His right hand hangs down, while the left arm is held upward, and both palms are facing outwards.

The statue’s octagonal pedestal exhibits a design made by cutting a full hole from the front to the rear side. This standing Buddha, preserved more or less in its original form, is assumed to have been made toward the end of the Unified Silla period in view of its skilled carving.

출처:문화재청


[보물 안중근의사 유묵 - 견리사의견위수명 (安重根義士 遺墨 - 見利思義見危授命) Calligraphy by An Jung-geun]

「안중근의사유묵-견리사의견위수명(安重根義士遺墨-見利思義見危授命)」은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1910년 3월 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ㆍ지정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일괄 지정된 이 작품들은 1910년 2월과 3월에 쓴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庚戌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掌印)을 찍었다.

글씨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 교훈적인 것이 많으며, 자신의 심중을 나타낸 것, 세상의 변함을 지적한 것, 일본에 경계하는 것, 이밖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유묵 대부분은 당시 검찰관,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그중 "안중근의사유묵-욕보동양선개정계시과실기추회하"는 러일전쟁 때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여순감옥에서 근무했던 사람[오리타타다스(折田督)]이 받은 것으로, 8ㆍ15 광복으로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카[오리타간지(折田幹二)]에게 넘겨주었고, 그것이 1989년 2월 20일 단국대학교에 기증되었다. 또 "안중근의사유묵-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는 안의사 수감 당시 여순감옥에서 경관을 지냈던 이의 손자[야기마사즈미(八木正澄)]가 2002년 10월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것이다. 또 "안중근의사유묵-국가안위노심초사", "안중근의사유묵-위국헌신군인본분"는 앞쪽에 “야스오까 검찰관에게 증여한다(贈安岡檢察官)”라고 적었듯이 당시 관련했던 검찰관에게 써준 것이다.

Ο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 (일신상의) 이익을 당하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함에 처하면 목숨을 바친다

[영문 설명]

An Jung-geun (1879-1910) left a series of autographs during his five-month stay in a jail of Lushun, from his assassination of Ito Hirobumi at Harbin Railway Station (October 26, 1909) to his death on March 26, 1910. These autographs are together designated as a Treasure, as a group. Most are from February to March 1910. The date and place are written on the left side of each autograph, along with his name and nationality, followed by his palm mark. 

Many of the calligraphies are maxims and aphorisms taken from Lunyu (Analects of Confucius) or Shiji (Historical Records). Some of them are his own compositions, either expressing his thoughts and sentiments on themes including the fleeting nature of the world, or voicing his wariness of Japan. 

There are even calligraphies of house names written at the behest of others. Most of them were written for Japanese prosecutors and prison guards. Item No. 569-21, for instance, was written for Orita Tadasu, who fought in the Russo-Japanese War and later worked at Lushun Prison. When Orita Tadasu returned to Japan upon the liberation of Korea on August 15, 1945, he gave this calligraphy to his nephew Orita Kanji. Decades later, on February 20, 1989, it was donated to Dankook University. Meanwhile, Items No. 569-22 and 23 have a dedication that reads “For Prosecutor Yasuoka.” 

- Gyeollisaui gyeonwisumyeong (見利思義 見危授命): ‘Abide by justice in the face of advantages and give your life in the face of danger.’

출처:문화재청

단지한 안중근의사의 손바닥을 실제 크기로 재현하였다.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대원군 초상화 (大院君 肖像畵)]

이 작품은 몸을 약간 왼쪽으로 튼 채 손으로 자주색 함을 받들고 선 大院君 李昰應(1820-1898)의 전신상이다. 의복 등에서 이국적인 풍모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화면 우측에 ‘大院君之肖像’이라는 묵서가 적혀 있어 대원군의 초상임을 밝히고 있다. 이 초상화는 서예가 오세창의 제자인 원충희(元忠喜)가 소장하던 것을 동아대박물관에서 인수한 것이다.

현재 알려져 있는 대원군의 초상화는 동아대학교 소장본을 포함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작자미상 금관조복본, 서울역사박물관의 이한철과 이창옥의 합작본(1880년), 서울대학교 소장의 작자미상 반신상 등 총 4점이다. 그 가운데 가장 늦게 제작되어 대원군의 노년의 모상을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이다. 복식 등으로 미루어 이 초상화는 대원군이 1882년 임오군란의 책임자로 청국으로 연행되어 바오딩(保定)에서 3년간 유폐된 생활을 겪었을 당시를 전후하여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제작된 작품으로 보인다. 

인물의 안면은 약간 붉은 빛이 도는 살색으로 채색하고, 여러 개의 가는 선을 겹쳐 인물의 윤곽을 매우 세밀하게 표현하면서 자연스런 음영을 만들었다. 몸은 얼굴에 비해 매우 간단하게 표현되었으며 신체비례로 보아 입상인지 좌상인지 단언하기는 힘들다. 의복의 옷주름도 도식적이며 붉은 색 술이 달린 검은 모자도 청나라의 것에 가깝다. 따라서 이 작품은 대원군의 얼굴을 중심으로 정확히 그리고 나머지는 다 그리지 못하고 마감한 미완성의 형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작당시는 서양화법, 명암법 등 새로운 화풍이 알려진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초상화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 작품은 조선말기의 초상화이지만 전통기법을 제작되어 근엄한 인품을 반영하면서도 음영법과 입체감 등에 의한 사실성을 보여준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자수 초충도 병풍 (刺繡 草蟲圖 屛風) Folding Screen of Embroidered Chochungdo (Grass and Insects)]

자수 초충도 병풍(刺繡 草蟲圖 屛風)은 검은색 비단에 풀과 나비, 잠자리같은 곤충을 수 놓아 만든 병풍이다. 한 폭당 가로 40㎝, 세로 64㎝로 여덞폭으로 구성되었다.

여성의 정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자수병풍에는 민들레·패랭이꽃·맨드라미·벌·나비 등 무려 20여종의 풀과 벌레가 확인될 뿐만 아니라, 구도나 기법이 독특하다. 초충수병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자수기법을 응용한 초충도수병 중에서도 수작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병풍으로 추측되며, 고상하고 우아하면서도 사실적이어서 궁중이나 양반댁에서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영문 설명]

This eight-panel folding screen displays images of grass and insects embroidered on black silk. The folding screen is 40㎝ by 64㎝ per panel. 

Some twenty different varieties of plants and insects are depicted in this feminine-themed folding screen, including dandelions, China pinks, cockscombs, butterflies and bees. The screen is highly original in composition and style. This lavishly-detailed folding screen depicts the beauty of nature in a highly realistic fashion. The item, realized using traditional Korean embroidery techniques, is a masterpiece of a grass-and-insect folding screen. 

The folding screen is dated to sometime during the 18th century or later. The elegant and realistic embroidery suggests that this item was probably used in the royal palace or in an upper-class home.

출처:문화재청


[국보 동궐도(1995) (東闕圖(1995)) Donggwoldo (The Eastern Palaces)]

본궁인 경복궁 동쪽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것으로 동궐도(東闕圖)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궁궐그림 1점이다.

크기는 가로 561㎝, 세로 273.5㎝로 16첩 병풍으로 꾸며져 있다. 오른쪽 위에서 비껴 내려 보는 시각으로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두 궁의 전각과 다리, 담장은 물론 연꽃과 괴석 등 조경까지 실제와 같은 모습으로 선명하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배경이 되는 산과 언덕에 대한 묘사는 중국 남종화의 준법을 따르고 있으나, 건물의 표현과 원근 처리에 있어서는 서양화 기법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또 다른 그림도 똑같은 형식과 기법, 크기를 하고 있으나 채색을 하고 검은 글씨로 건물의 명칭을 써 넣은 점이 다르다.

그림에 들어있는 건물들의 소실여부와 재건된 연대 등으로 짐작하여 순조 30년(1830) 이전에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점의 그림은 회화적 가치보다는 궁궐 건물 연구에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평면도인 궁궐지나 동궐도형보다 건물 배치나 전경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어 고증적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보물 헌종가례진하도 병풍(1982) (憲宗嘉禮陳賀圖 屛風(1982))

Folding Screen of Heonjong garye jinhado (King Heonjong’s Wedding Celebration)]

<헌종가례진하도 병풍(憲宗嘉禮陳賀圖 屛風)>은 헌종(재위 1834∼1849)이 효정왕후와 혼인할 때의 모습을 그린 병풍으로 크기는 각 폭 가로 115㎝, 세로 51㎝이며 비단에 채색 되었다. 

헌종의 첫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가 헌종 9년(1843)에 죽고 이듬해 10월 효정왕후와 가례를 올렸는데 이 때 그려진 것으로 모두 8폭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폭은 예식을 맡아보던 예문제장 조병구가 쓴 축하의 글이 실려 있고 제8폭에는 선전관청에 있는 사람들의 관등·성명·본관 등을 기록한 글이 있다. 그리고 제3∼7폭까지는 혼례를 치르는 장면과 함께 창덕궁 인정전을 비롯한 궁궐내의 모습이 질서정연하면서도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140여년 전 궁중혼례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회화로서 뿐만 아니라 역사자료로서도 가치가 있으며 보관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영문 설명]

This folding screen depicts scenes from the wedding of King Heonjong (r. 1834-1849). It is made of silk and measures 115 cm in width by 51 cm in length.

This eight-panel screen depicts the wedding ceremony of King Heonjeong and Queen Hyojeong, whom he married after the death of his first wife, Queen Hyohyeon of the Andong Kim clan, in 1843 (the 9th year of the reign of King Heonjong). The first panel contains some words of celebration written by Jo Byeong-gu, the master of ceremonies at the wedding, while the eighth panel contains the names, titles and family clans of the participating officials. The wedding scenes and the interior of Changdeokgung Palace, including Injeongjeon Hall, are painted in magnificent fashion on the third to seventh panels.

This well-preserved folding screen is considered both an extremely valuable artwork and an important historical material as it features scenes from a royal wedding held in the 19th century.

출처:문화재청

보물 헌종가례진하도 병풍(<헌종가례진하도 병풍(憲宗嘉禮陳賀圖 屛風)>은 헌종(재위 1834∼1849)이 효정왕후와 혼인할 때의 모습을 그린 병풍으로 크기는 각 폭 가로 115㎝, 세로 51㎝이며 비단에 채색 되었다. 헌종의 첫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가 헌종 9년(1843)에 죽고 이듬해 10월 효정왕후와 가례를 올렸는데 이 때 그려진 것으로 모두 8폭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폭은 예식을 맡아보던 예문제장 조병구가 쓴 축하의 글이 실려 있고 제8폭에는 선전관청에 있는 사람들의 관등·성명·본관 등을 기록한 글이 있다. 그리고 제3∼7폭까지는 혼례를 치르는 장면과 함께 창덕궁 인정전을 비롯한 궁궐내의 모습이 질서정연하면서도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140여년 전 궁중혼례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회화로서 뿐만 아니라 역사자료로서도 가치가 있으며 보관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 문화재청)


[보물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 (趙大妃 四旬稱慶陳賀圖 屛風) Folding Screen of Jodaebi sasun chinggyeong jinhado (The 40th Birthday Celebration of Queen Dowager Jo)]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趙大妃四旬稱慶陳賀圖 屛風)>은 조선시대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1808∼1890)의 40세 생신을 축하하는 잔치모습을 그린 병풍이다. 조대비는 순조 19년(1819)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어 왕비는 되지 못하고, 후에 그의 아들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후에 왕대비가 되었다. 

가로 458㎝, 세로 169㎝의 8폭으로 된 병풍으로 7폭은 전각, 나무, 산수를 채색하여 그렸고 마지막 1폭은 도총관 조기영 등 9명의 관등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헌종 13년(1847) 정월 초하루 창덕궁 인정전 앞뜰에서 거행된 잔치에는 400여명이 참석했는데, 관직에 따라 서로 다른 관복을 입은 문무백관과 행사에 참여하는 인물 그리고 창검을 들고 도열해 있는 군관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당시 궁중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화려한 색깔의 진채를 사용하여 그린 전각, 나무, 산수 등과 인물들의 섬세한 표현에서 도화서의 일류급 화원들이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회화사에서뿐만 아니라 당시 복식연구와 130년 전의 궁중풍속을 볼 수 있는 기록화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영문 설명]

This folding screen depicts scenes from the 40th birthday celebration of Queen Dowager Jo (1808-1890), the mother of King Heonjong of the Joseon Dynasty. She was invested as the crown princess in 1819 (the 19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unjo), but as the crown prince died before ever becoming king, she became the queen dowager upon her son’s (King Heonjong) ascension to the throne.

This eight-panel screen measures 485 cm in width by 169 cm in length. The first seven panels contain color paintings of the royal palace, trees, and landscape, while the last (eighth) panel contains the titles and names of nine officials, such as Dochonggwan (a title) Jo Gi-yeong. The queen dowager’s 40th birthday party was held on the first of January 1847 (the 13th year of the reign of King Heonjong) in the garden of Injeongjeon Hall at Changdeokgung Palace. The painting depicts some 400 civil and military officials who participated in the party, each of them wearing a distinct official uniform according to their rank and title. The military officials are also shown standing in a line with spears and swords in their hands. As all of the scenes are depicted realistically, it is assumed that first-rate painters of the Dohwaseo (a government office in charge of paintings) produced this picture as they used splendid colors and delicate brushwork to portray the palace, trees, and landscape.

It is regarded as a very valuable artwork for studies not only on the history of painting but also on the history of clothing styles and Royal Court customs and manners of the period.

출처:문화재청


"고종어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동래 고지도 (東萊 古地圖)]

이 지도는 19세기 동래성을 중심으로 동으로 청사포, 서로 낙동강, 남으로 몰운대, 북으로 두구·반송동을 경계로 한 옛 동래군을 한지에 수묵담채로 그린 조감도형식의 채색 회화식 지도이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지도로는 조선전기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보이는「부산포도(富山浦圖)」가 있을 뿐이고, 조선중기까지는 별다른 지도가 없으며, 조선후기에서 말기로 접어들수록 정밀한 지도의 제작이 많아졌다. 현재 부산 중심의 지도로는 대략 150여점 확인되고 있다. 

조선후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지방 단위의 정밀 지도는 지방통치 목적으로 홍문관에서 만든 홍문관계열지도, 군사적 목적에서 비변사에서 만든 비변사계열지도, 왕실에서 재원 파악을 목적으로 만든 규장각계열지도, 지방에서 읍지 발간과 지방사정 파악으로 만든 지방군현계열지도가 있다. 이 지도는 지방군현계열지도로서 국립중앙도서관소장의『동래부산고지도』와 1872년경 제작된 규장각 소장의 『동래군현지도』와 같은 형식이나 산맥의 줄기를 강조되어 있으며, 도로와 주요 하천이 조감도처럼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가장 정밀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내용면에서는 동래부 관내의 모든 관아시설을 망라하고 있으며 이밖에 사찰 ,경승지, 정자 등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행정단위로는 중심지인 읍내면을 비롯하여 북면, 서상면, 동상면, 동하면, 사상면, 사하면, 남촌면, 부산면, 동평면 등이 표시되어 있다.

1868년(고종 5)에 동평면은 동평면과 부산면으로, 사천면은 사상면과 사하면으로 분리된 사실로 보아 이 지도는 적어도 1868년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또한 감천리가 기재된 것으로 볼 때 향토지지 가운데 1899년의 편찬된『동래부읍지』에서만 이 지명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지도 제작의 시기는 대체로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는 전반적으로 산과 하천, 성곽과 관아, 방파제와 선박 등이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당시의 부산 지역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전형적인 회화식 지도이다. 조감도의 시점을 이용하여 지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상단부의 육지와 하단부의 바다를 대각선으로 구획한 화면구성은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의 특성을 잘 살리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후기부터 말기까지의 정선일파의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부재"


"등록문화재 등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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