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좌수영성지

2022. 5. 22. 06:09바롱이의 쪽지/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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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복장군 사당]

안용복 장군은 조선 숙종(1675~1720)때 동래출신( 수영구 수영동 부근)어민으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의 수군인 능로군이었다. 당시 왜인들이 우리의 울릉도와 독도 를 죽도라 부르면서 자주 침범하자, 동료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땅임을 확인시키고, 일본의 에도막부로 부터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았다. 그는 울릉도와 독도 수호에 큰 업적을 세워 후세 사람들에 의해 장군이란 칭호를 받으신 분이다. 장군의 업적을 후세에 오래도록 기리고자 부산 시민의 뜻을 모아 이곳에 사당과 동상을 건립하였으며, 1967년 건립된 수영공원 정상의 충혼탑을 함께 이전하여 새로이 단장하였다.


[천연기념물 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 (釜山 左水營城地 푸조나무) Muku Tree at Jwasuyeong Fortress Site, Busan]

푸조나무는 서해안을 따라 경기도에 걸쳐 따뜻한 지방에만 자란다. 곰솔, 팽나무와 함께 소금기가 섞인 바닷바람을 잘 견디기 때문에 해안에 심어 바닷바람을 막아 주는 방풍림에 적당하다. 팽나무와 비슷해서 곳에 따라서는 개팽나무 또는 검팽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수영공원 동쪽 비탈에서 자라고 있는 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는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1.08m 높이에서 남,북으로 기운 가지는 6.30m, 위로 솟은 가지는 3.88m로 마치 2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모습이다. 이 나무는 전체적으로 옆으로 기울어져 자라는데, 줄기에는 상처의 흔적이 있고 혹이 발달해 있다. 줄기의 끝은 죽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위엄있는 모습이다. 이 나무의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고, 마을을 보호해 주는 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에 할머니의 넋이 깃들어 있어 나무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부산 좌수영성지의 푸조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왔으며, 민속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천연기념물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 (釜山 左水營城地 곰솔) Black Pine at Jwasuyeong Fortress Site, Busan]

곰솔은 소나무과로 잎이 소나무 잎보다 억세고, 소나무의 겨울눈은 붉은 색인데 반해 곰솔은 회백색인 것이 특징이다.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해송으로도 부르며, 또 줄기 껍질의 색이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이라고도 한다. 바람과 염분에 강하여 바닷가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나 방조림으로 많이 심는다.

부산 좌수영지의 곰솔은 나이가 4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3.6m, 둘레 4.50m로 현재 수영공원 안에 있다. 땅에서부터 가지가 갈라지는 부분까지의 길이가 7.0m에 이르며 껍질은 거북의 등처럼 갈라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좌수영(左水營)이 있었는데 그 당시 군사들은 이 나무를 군사를 보호해주고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로 여겨 나무에게 자신이 무사하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옆에는 신을 모셔 놓은 당집과 장승이 서 있고, 앞쪽에는 곰솔 한 그루가 더 있다.

부산 좌수영지의 곰솔은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민속적·문화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구 수영고당 터와 천연기념물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경상좌수영성 남문 (慶尙左水營城 南門)]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성(慶尙左道 水軍節道使營城)의 남문으로 아치형 석문(石門)이다.

 원래 수영성 남문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옛 수영초등학교(현 신익아파트 자리)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 왔다. 1962년 6월 30일 수영초등학교가 이전한 후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대 말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위치인 수영사적공원 입구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에는 무관인 정3품의 경상좌도수군절도사(약칭 경상좌수사)가 주재하였으며, 낙동강의 동쪽에서 경주까지의 바다를 방어하는 총 책임을 맡고 있었다.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1692년(숙종 18) 경상좌수사 장우상(張宇相)이 경상좌수영성을 중수할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좌수영성에는 동문(영일문, 迎日門), 서문(호소문, 虎嘯門), 남문(주작문, 朱雀門), 북문(공진문, 拱辰門)의 사대문이 있었으며 사대문에는 각각 문루가 있었다. 성문은 일정한 시각에 폐문루(閉門樓)와 관해루(觀海樓)에 달아둔 북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열고 닫았다고 한다.

경상좌수영성 남문의 현재 상태는 앞뒤의 홍예(虹霓, 성문, 수문, 다리 등을 무지개 모양으로 쌓은 것)와 홍예기석(虹霓基石, 홍예석을 쌓기 위해 가장자리에 기둥처럼 놓은 돌)이 남아 있고, 홍예기석과 같은 높이의 성벽이 좌우 10m 정도 남아 있다. 

전면 홍예기석 앞에는 같은 크기의 사각형 돌기둥 위에 박견(拍犬) 한 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있다. 이러한 박견 형태의 석물이 성문 옆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는 다른 지역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독특하다. 전면 좌측에는 수령 이하는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오랜 세월에 홍예석이 조금씩 침하되어 붕괴될 우려가 있어 1993년 8월 해체․보수하였다.

출처:문화재청

경상좌수영성 남문 박견과 하마비


"부산 좌수영성지 선정비"


[부산광역시 기념물 경상좌수영성지 (慶尙左水營城址)]

좌수영성은 경상좌도 수군의 총 지휘자가 머물던 진영(鎭營)으로, 원래는 부산포에 있었다가 세조때(1459) 울산 개운포(開雲浦)로 옮겼다가 다시 임진왜란 직전에 동래 남촌(수영동)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인조13년(1636) 사천(絲川, 수영천)의 홍수로 선창의 수로가 매몰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아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감만이포는 왜관과 가까워 군사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다 하여 효종 3년(1652) 다시 부산포로 옮겨져, 고종 31년(1894) 군제개혁으로 수영이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성을 처음 쌓은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것은 숙종 18년(1692) 감만이포에서 남촌으로 다시 이건(移建)되면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좌수영성은 石城으로, 둘레는 약 2,785m, 높이는 4m이며, 우물 4개, 성문 4개, 수구 4개,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 바깥에 쌓는 옹성(3곳)과 치성(6~7곳)이 있었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종군이 있었으며, 7개의 진이 소속되어 모두 65척의 전투선과 45척의 나룻배가 경상도 동쪽 해안을 방어하는데 힘썼다.

일제시대 때 관리를 소홀히 하여 대부분이 무너졌고, 현재는 성벽과 남문(홍예)만이 남아 있다.

출처:문화재청


[부산광역시 기념물 25의용단 (25義勇壇) Altar of the twentyfive heroes]

임진왜란 때 수영성을 지키며 왜적과 장렬히 싸우다 순절한 25명의 의로운 충절을 기리고 있는 제단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수사로 있던 박홍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때 수병(守兵)과 성민(城民) 25인이 성문 밖의 선서바위에 모여 피로써 맹세한 후, 바다와 육지에서 적을 상대로 7년간 대항하였다. 이러한 사연은 광해군 원년(1609) 지방민들의 청원으로 알려지게 되어, 동래부사 이안눌이 이 때의 일들을 모아『정방록』을 만들고, 이들의 집 문에 ‘의용(義勇)’이라는 두 글자를 써붙여 그 뜻을 기리도록 하였다. 순조 때에는 동래부사 오한원이 이들의 후손들에게 역(役)의 의무를 면제시키고 글을 지어 포상하였다.

철종 4년(1853) 경상좌수사 장인식이 비를 세우고, ‘의용단’이라 이름하였으며, 제실·의용단을 설치하여 음력 3월과 9월 말정일(末丁日) 두 차례에 걸쳐 제향을 봉행하였다. 제사는 원래 경상좌수사가 주관하였으나 고종 31년(1894) 관제개혁으로 좌수영이 폐지되면서 수영면의 면장이 이를 맡아하였고, 일제시대에 일본 면장이 부임한 이후에는 수영기로회에서 주관하였다. 현재는 수영고적민속보존회와 수영향우회에서 주재하여 음력 9월 말정일에만 제향을 봉행한다.

[영문 설명]

In 1592, when the Japanese invaded Korea and captured the fortresses of Dong-nae and Busanjin, a national summons was issued to all soldiers and sailors to repel the invasion. Nevertheless, the commander of the Gyeongsang chwado naval forces was abandoned the Suyeongseong fortress and fled in a hurry in order to save his own life. However, 25 naval seamen and civilians left behind swore to fight against the aggressors to the death. These brave wqrriors delivered hit-and-run attacks to the invaders on land and sea, at the risk of their lives. Their heroic deeds were made known to the government in 1609 by civilians who lived in this area. Lee An-nul, the Dongnae Magistrate at that time, published a book about their deeds which was entitled Jeongbangrok. and ennoble their exploits by inscribing the charaters of “Ui-yong” meaning “righteous and heroic” on the gates of their houses.

In appreciation for their services, the regional government under King Sunjo(1800-1834) exempted their descendants from the duty of labor services, Jang In-sik, the commander of the Gyeongsangchwado naval forces, erected a stele and Uiyongdan(“Altar of Heroes”) to their memory. Since that time, special memorial rituals have been performed here every spring and autumn. Right now the rituals are only held in autumn.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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