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를 물리치는 영험한 비, 삼척척주동해비 및 평수토찬비

2022. 7. 31. 07:00바롱이의 쪽지/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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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항]

바닷물이 육지 안쪽까지 들어오고 좁은 수로를 따라 작은 배들이 조심스럽게 오가며, 선창에는 고요히 찌를 드리운 낚시꾼들의 모습이 보인다. 예전에 삼척항은 어시장과 횟집이 들어선 정취 있는 항구로 이름을 떨쳤지만, 지금은 그런 정취도 없고 또 왁자지껄하지도 않다. 커다란 시멘트 공장이 들어선 이래 풍경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왜침을 막기 위한 수군기지였으며, 한때는 동해안의 중심 항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역할들을 동해시의 여러 항구에 내주고 조그마한 어항이 되어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비석군]

육향산 입구 계단 옆에 7개의 돌비석이 서 있다. 가운데 있는 것이 이곳 관찰사를 지낸 홍상국의 비인데, 비석머리에 새겨진 무늬가 퍽 재미나다. 마치 산과 일렁이는 파도를 그린 듯 율동감 있는 곡선이 아래위로 새겨졌고, 가운데에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가 불규칙하게 그려져 있다. 몹시 서툰 그림 솜씨처럼 보이지만 이 돌비석에 어떤 의미를 새기고자 일부러 그려놓은 추상 문양일 것이다. 척주동해비를 보러 육향산에 올라가는 길에 건너뛰지 말고 꼭 챙겨 보아야 할 돌비석머리이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육향산 입구 홍상국 비석 머리"

순박한 추상 문양이 새겨져 있는 돌비석이 눈길을 끈다.


"삼척포진성지"


"육향정"


[강원도 유형문화재 삼척척주동해비및평수토찬비 (三陟陟州東海碑및平水土讚碑)]

조선 현종 2년(1661) 때 삼척 부사를 지낸 허목(1595∼1682) 선생과 관련이 있는 2기의 비이다. 허목 선생은 성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제자백가와 경서연구에 전념하였고 특히 예학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한다.

척주동해비는 정상리 육향산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정라진앞 만리도에 세워 놓았던 것을 비가 파손되자 숙종 36년(1710)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당시 이 지방은 파도가 심하여 바닷물이 마을까지 올라오고 홍수가 지면 주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이 신비한 뜻이 담긴 글을 손수 짓고 독특한 필체로 비문을 새겨 이 비를 세웠는데, 신기하게도 바다가 잠잠해지고 그후로 주민들의 피해도 없었다고 한다. 문장이 신비하면서 물리치는 능력도 지녔다 하여 ‘퇴조비’라고도 불리우며, 전서체(篆書體)에서 동방의 제1인자로 불리우는 허목 선생의 기묘한 서체로 인해 더욱 유명한 비이다.

평수토찬비는 척주동해비와 조금 떨어져 있으며 동해비와 같은 의미로 세운 것이다. 중국 형산의 우제가 쓴 전자비(篆字碑)중 일부를 허목이 목판에 새겨 보관하던 것을, 고종 광무 8년(1904) 왕의 명에 의해 칙사 강홍대 ·삼척군수 정운석 등이 돌에 그대로 새겨 넣은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대한평수토찬비]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와 함께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된 이 비는 웅혼한 필치와 문장으로 자연을 다스린 한 위인의 신비한 예술품이 아닐 수 없다.

대한평수토찬비는 허목이 삼척 부사로 있을 때, 중국 형산(衡山) 우제(禹帝)의 비석 글씨 중에서 48자를 골라 나무판에 새겨두었던 것을 240년이 지난 고종 41년(1904) 9월에, 돌에 새겨 현위치에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옛날 하후 씨가 이 글씨로써 치산치수하니 중물(衆物)이 제압되었다는 등의 내용으로 그 역할이 동해송을 적은 척주동해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삼각칼로 글씨를 파놓은 듯 가늘고 구불구불한 글씨가 색다르기는 하지만 척주동해비의 글씨가 워낙 뛰어나 기가 죽고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척추동해비]

삼척항이 잘 바라다보이는 곳이 정라동(현: 정상동)의 육향산이다. 육향산은 산이랄 것도 없이 낮은 언덕인데, 정상에 서 있는 높이 170.5㎝, 너비 76㎝, 두께 23㎝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눈길을 끈다. 화강석 기단 위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에 새겨진 전서체의 글씨가 첫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다. 

조선 현종 2년(1661) 미수 허목의 글씨이다. 허목이 삼척 부사로 재임하고 있을 당시 심한 폭풍이 일어 바닷물이 고을까지 들어와 난리가 났다. 이에 허목이 동해를 예찬하는 노래를 지어 비를 세웠더니 물난리가 잠잠해지고, 바닷물이 심술을 부리더라도 이 비를 넘지는 못했다고 한다. 조수를 물리치는 영험한 비이기에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부른다.

본래 정라항(삼척항의 옛 이름)의 만리도에 있었는데, 풍랑으로 마멸이 심해 세운 지 48년 만인 숙종 34년(1708)에 허목의 글씨를 본따 다시 새기고 숙종 36년(1710) 2월에 육향산 동쪽에 옮긴 것을, 196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글씨가 뛰어나고 조수를 물리치는 신묘한 힘까지 지녔기에 집에 간직하면 화재가 없고 잡귀가 없어진다 하여 사람들이 탁본을 많이 해갔다고 한다. 탁본을 섣불리 하면 석질이 상하게 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보호각을 세워놓았는데, 그 보호각 때문에 비문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은 물론 비를 감상하는 데도 방해를 받고 있다. 비문 내용이라도 쉽게 풀이하여 보호각 근처에 세워두었더라면 좋았을 일이다.

일설에 의하면 허목이 비석의 분실을 예견하고 두 개의 비를 써놓았다고 한다. 그의 예언대로, 10년 뒤 허목과는 반대편 정파의 사람이 삼척 부사로 새로 부임하여 허목의 업적비나 다름없는 척주동해비를 깨어버렸다. 그러자 당장에 바닷물이 동헌 밑까지 밀려들었다. 백성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아래 관리 한 사람이 대청마루 밑에 묻어두었던 또 하나의 비를 꺼내도록 귀띔해주었다. 그 뒤 물 난리가 잠잠해진 것은 물론이다. 지금 서 있는 비는 그 두번째 비라고 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뛰어난 전서체 필치의 척주동해비는 밀려오는 바닷물을 물리치는 신묘한 힘을 지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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