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송정동 철기시대유적

2022. 8. 9. 05:41바롱이의 쪽지/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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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기념물 동해 송정동 철기시대유적 (東海 松亭洞 鐵器時代遺跡)

송정동 초기철기시대유적은 동해시의 중심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전천(箭川)하류의 북쪽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은 1996년 관동대학교 박물관이 유적의 남쪽 부분인 동해항만 확장지역에서 발굴을 실시하여 주거지 4기와 민무늬토기, 두드림무늬토기, 대롱옥, 곱은옥, 유리구슬, 은제귀걸이 등을 수습하였다. 1999년과 2000년에는 강릉대학교 박물관이 송정동 중심도로 건설지역과 인근지역에서 초기철기시대 주거지 45기와 9기를 각각 발굴하여 송정동 일대가 당시 대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었던 곳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주거지는 대부부 철(凸)자형인 움집이었으며, 벽은 판자를 이용하였고 화덕자리는 점토띠식, 아궁이식, 무시설식 등 다양하였다. 특히 2호 집자리에서는 송풍관, 철기, 쇠찌거기 등이 발견되어 철기제조공방으로 추정되었다. 9호 집자리에서 나온 판자벽은 폭이 넓고 각재(角材)기둥을 사용한 점과 집자리의 장축에 비하여 단폭이 넓어지는 등 철기문화에 들어서면서 건축기술이 이전 시대 보다 한층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2004년에도 강원문화재연구소가 시굴조사를 하여 주거지 약 40여기와 원형유구, 적석유구 등을 확인하였다. 이때 조사된 철자형 집자리는 움집으로 남북6.4m, 동서 4.9m, 깊이 0.6m로서 바닥에 진흙을 깔고 다진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집자리는 화재를 입어서 벽체와 지붕구조를 알 수 있는 숯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내부에서 발견된 탄 흙덩어리에 판자벽의 흔적이 남아 있어 집둘레에 판자벽을 세운 뒤 진흙을 발라 방풍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집바닥의 북쪽 부분에 화덕자리가 있었는데 남북 85㎝, 동서 50㎝ 크기로 타원형이었다.

유물로는 북벽을 따라 가면서 나란히 시루 1점을 포함하여 10여개의 토기와 쇠도끼 1점, 쇠화살촉 2점, 쇠작살 1점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을 발굴조사한 결과, 현재의 지표 아래 약 35㎝, 약 80㎝, 약 150㎝ 깊이에서 시기를 달리하는 3개의 문화층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초기철기시대로 밝혀졌다.

이러한 발굴 결과로 보아 송정동유적의 범위는 약 416,000㎡ 정도의 규모이며 1,600호의 집이 이는 대규모의 마을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큰 규모의 사회구조가 있었음은 이 지역 일대가 실직국이나 아니면 연맹왕국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홍양해 효자각]

충과 효는 백가지 행실의 근원이다. 

이 충효문은 충절과 효덕으로 삶을 빛내신 홍양해(남양흥씨)의 여각이다. 홍양해는 선조때 중추부사 휘광의 차자로 송정에서 태어나 광해군 임자년(1612)에 증광시 무과에 오르고 병진년(1616) 에 중시에 급제하여 벼슬은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나라의 흥망이 다급한 병자호란(1636)에 출진하여 구국의 충절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부모가 별세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시묘3 년을 심혈을 기울려 다하니 백조가 효심에 감복하여 묘역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인조때 나랏님의 뜻으로 공의 정려를 송라촌 송단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1660) 에는 삼척 부사 허목이 공의 충효에 경모하여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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