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명승 정읍 내장산

2022. 10. 3. 06:50바롱이의 쪽지/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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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마스코트 단이와 풍이"


"사람의 뒤태를 닮은 나무, 엉덩이 나무"


"연리지"


"내장산 계곡물"


[신선폭포]

신선제는 내장산성에 있는 제방으로, 승군과 왜군이 싸웠던 역사적 장소이다. 제방이 오래되어 낡으면서 안전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주변경치를 해쳐, 자연석을 쌓아 폭포를 조성하였다. 예전 제방의 안정성 문제와 제방 근처의 경관을 개선한 후 '신선 폭포' 라고 이름을 붙였다.


[내장산 전망대와 우화정]

우화정은 내장산국립공원의 대표적인 명소로서 맑은 연못 가운데 솟아있는 우화정은 가을철 붉게 물든 단풍과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여, 매년 수많은 관람객이 아름다운 경관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방문한다. 지금의 우화정은 1965년에 지어진 기존의 우화정이 낡아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어 2016년 전통 한옥 양식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우화정"


"우화정"


"우화정"


"내장산 전망대"


"천연기념물 내장산 굴거리나무군락"

 

내장산 굴거리나무 군락&먹거리

"푸른 빛을 내뿜는 내장산 보석" [천연기념물 제91호 내장산 굴거리나무 군락 (內藏山 굴거리나무 群落)] 굴거리나무는 우리나라 및 중국,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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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대]

이곳은 불도들의 기도처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한 승려가 글씨를 잘쓰게 해달라고 기도한 끝에 소원대로 문필가가 되었다하여 문필대라고 전해오고 있다.


"내장산 전망대 연자정"


"전망대에서 바라본 내장산"

서래봉,벽련암, 월영봉, 우화루


"전망대에서 바라본 우화루 전경"


"전망대에서 바라본 내장산"

연지봉, 망해봉, 원적암, 불출봉, 서래봉, 벽련암, 월영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래봉과 벽련암"

서래봉은 농기구인 "써래"를 닮았다 하여 "써래봉"으로 불리다 후에 서래봉으로 바불려졌다.


"월영봉"

옛 조상들이 추령에서 떠오르는 달을 맞이했던 봉우리이다.


"천연기념물 정읍 내장산 단풍나무"

 

천연기념물 정읍 내장산 단풍나무&먹거리

"우리나라 유일 천연기념물 단풍나무 단목" [천연기념물 정읍 내장산 단풍나무 (井邑 內藏山 丹楓나무)] Ο 본 나무에 내무에 특정한 유래는 없으나 내장산 단풍나무 경관은 예로부터 신중동국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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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내장산 내장사]

763m의 신선봉을 주봉으로 서래봉, 연지봉, 까치봉, 장군봉 등 높이 650m 이상의 연봉들을 거느린 내장산은 남원의 지리산, 영암의 월출산, 장흥의 천관산, 부안의 변산과 함께 예로부터 호남의 5대 명산으로 꼽혀왔다. 무엇보다도 단풍이 유명하지만 그 밖에도 비자나무 숲과 굴거리나무 군락 등을 포함하여 숲이 매우 아름다운 산이다.

연꽃잎처럼 벌어진 내장산 연봉의 한가운데에 폭 안겨, 내장산이 철철이 주는 자연경관을 마음껏 누리는 자리에 내장사가 있다. 사지가 없어서 창건 연대 등을 정확히 알기가 어렵지만, 전해오는 데 따르면 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636)에 영은(靈隱)조사가 영은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그후 고려 숙종 3년(1097)에 행안(幸安)선사가 당우와 전각을 중수했고, 조선 명종 22년(1566)에 희묵(希默)대사가 법당과 요사채를 중수하면서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인조 17년(1639)에 부용(芙蓉)대사가 재건한 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며 이어져왔으나 한국전쟁 때 완전히 불타버렸다. 내장산을 품은 노령산맥이 전투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영은사의 명칭이 내장사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영은사터에 내장사가 들어앉은 것이라 하기도 한다. 옛 내장사는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유해(幼海)선사가 초창한 절이며, 지금의 내장사가 있는 곳은 본래 영은사 자리라는 것이다.

내장사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단풍을 연상하듯, 절 입구에서 뒤편의 서래봉에 이르는 대협곡에 단풍이 물들 때의 아름다움은 가히 일품이다. 단풍길은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는데, 천왕문과 문루를 지나면 오래 묵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절 마당 한귀를 지킨다. 이 절 일주문 기둥은 한아름이 넘을 듯한 통나무를 잔가지 치고 껍질만 벗겨서 그대로 써, 마치 장사의 다리처럼 튼튼하다. 천왕문, 문루, 대웅전, 극락전 등 지금의 절 건물들은 1950년대 이후에 하나하나 다시 지은 것들로 옛맛은 전혀 없지만 대체로 분위기가 조신하고 포근하다. 다만 근래에 큰 석등을 세웠고 커다란 삼층석탑을 조성하는 중인데, 부디 이 절이 가진 장점을 더욱 돋우는 방향으로 변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한 이 절에는 영조 44년(1768)에 조한보라는 사람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보림사에 시주했다는 명문을 지닌 조선 시대 동종이 있는데,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장산과 내장사를 자주 다닌 사람들은 단풍철보다도 오히려 초여름의 신록을 더 치기도 하고, 한겨울 눈에 덮여 더욱 돋보이는 비자나무 숲과 함께 고요한 그리움과 정감이 고이는 내장사를 더 사랑하기도 한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정읍 내장산 내장사]

백제무왕(百濟 武王) 37년(636년) 영은조사가 현재의 부도전 일대에 50여 동의 대가람을 세우고 영은사라 칭하였다. 고려 숙종 3년(1098년)에는 행안선사(幸安禪師)가 전각당우(殿閣 堂宇)를 새로 중창했고 조선에 와서 이곳 승려들이 작당하여 승적(僧賊)으로 변하여 민가에 행패가 심하여 날로 민심이 소란해지자 중종 34년(1539년) 조정에서는 이를 진압하고 폐찰령을 내려 소각하고 말았다.그 뒤 조선 명종22년(1557년) 희묵대사가 법당 및 요사를 수축하였으며, 선조 30년(1597년) 임진·정유(壬辰·丁酉)의난때 왜군에 의하여 병화로 소실되었는데, 인조 17년(1639년) 부용대사(芙容大師)가 사우(寺宇)를 개축하고 불상을 도금하였다.

그리고 정조3년(1779년) 영운대사(暎雲大師)가 대웅전·시왕전을 개수하고 요사를 개축하였는데 정조13년(1778년) 법당이 소실되어 고종9년(1878년) 유학(宥鶴), 익진(翼振) 두 선사가 중건하였으며 근래에 와서도 1938년 매곡선사(梅谷禪師)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명부전과 요사를 신축하였으나 6·25전쟁으로 1951년 1월 12일(陰 11월 24일) 대웅전이 그리고 1월 18일(陰 12월 10일)에는 6개 암자가 소실되고, 1957년 주지 야은(野隱)이 요사를 1958년에 대웅전 중건에 착수 하였는바 1959년 주지 다천(茶泉)이 완공했다.1964년에는 무량수전을 세우고 1965년 대웅전 불상가 정화(幀畵)를 조성 봉안했다. 그리고 정부의 국립공원 개발계획에 따라 1973년에 일주문(一柱門), 1975년에 명부전(冥府殿) 1978년에 정혜루(定慧樓)를 복원하고 1978년에는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새로 세웠다. 1979년에는 인도(印度)로부터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奉安)하기도 했다.

성임(成任)의 정혜루기에 의하면 영은사는 고려 말엽 지엄선사(智嚴禪師)의 개산(開山)에서 비롯된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영은사의 개산 연혁을 밝히는데 고증자료의 연구가 더욱 요청된다. 현재 내장사는 1888년(高宗 25년) 간행된 정읍현지에도 영은사(靈隱寺)로 일컬어 왔으나 내장사란 최근 내장산의 산이름을 따서 내장사(內藏寺)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출처:정읍시청

내장사, 헌식대와 소전대 


"내장사와 서래봉"

화재로 소실된 전각들 새로 지어졌다.


"대웅보전과 서래봉"


"석탑과 돌부처"

화재로 전각들이 소실되어 임시 천막 법당이 있었던 자리로 보인다.


"웃어라 쉬어라"


"서래봉과 극락전"


"서래봉과 관음전"


"관음전 천수천안관자재보살상"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내장사조선동종 (內藏寺朝鮮銅鐘)]

총 높이 80㎝, 몸체 길이 60㎝, 입 지름 50㎝로, 소형이나 명문이 확실한 조선 후기 범종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입 주변에는 한개의 덩굴무늬 띠를 둘렀으며, 어깨 부위에는 덩굴무늬 띠와 물결무늬 띠가 잇대어 배열되어 있다. 어깨 아래로는 2줄로 만든 작은 원 안에 범자를 도들새김 하였으며, 24개의 원을 배열하여 문양을 만들었다. 몸체 중앙에는 정사각형의 유곽을 4개 두고 안에는 9개의 유두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유곽을 만든 띠는 덩굴무늬로 채웠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보살상을 양각하였다. 몸체의 맨 윗부분에는 꽃을 세워 장식한 듯한 문양이 있다.

이 동종은 내장사가 중건되자 전남 보림사에서 옮겨 왔는데, 일제시대 후기에 원적암에 은닉하였고, 한국전쟁 때 정읍시내 포교당에 피난시켜 보전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정혜루]

정혜루는 내장사의 문루로 사세가 한창 번영할 때인 1468년(세조 13년)에 세워졌는데, 성임(, 1421~1484)의 정혜루기에는 이렇게 전한다. 누의 처마와 기둥은 날아갈 듯하고 창과 난간은 성글어 시원하여 그 규모가 장엄하고 아름다움이 견줄 데 없으니 그 이름을 '정혜 라 하였다. 불경에 이르기를 비리를 막고 악을 그치게 하는 것은 계라 하고, 생각을 편히 하고 연을 고요히 하는 것은 정이라 하며, 미혹을 깨고 진을 보는 것을 혜라 하였다. 이 누에 오르는 자는 아마 생각함이 있을 것이다. 만일 계를 인연하여 정을 내어 번뇌를 해탈케 하고, 정을 인연하여 혜를 내어 정신을 소통하고 생각을 통달하게 한다면 곧 보고 듣는 것이 청정하지 않은 것이 없고, 행하고 그치는 바가 낙토 아님이 없을 것이다. 고을은 이 산이 있어 더욱 유명하고 이 산은 절을 얻어 더욱 아름다우며 절은 누각을 얻어 더욱 드러나고 누각은 '정혜 라는 이름을 얻어 더욱 빛나리니, 이로 인해 소인묵객들이 더욱 노닐고자 하는 곳으로 유명할 것이다. 현재의 정혜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2층 누각으로 1978년에 복원하였다.


"천하명승내장산"

정혜루 편액


"진신사리탑"


"내장사 석축"


"내장사 연못"


"연못과 천왕문"


"천왕문 옆 낮은 문"


"부모님 은혜"


"정읍1경, 108그루 단풍터널길"


[내장산단풍터널]

내장산은 조선8경의 하나로 197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며 예로부터 조선8경의 하나로 이름나 있다. 내장산은 봄 신록, 여름 녹음, 가을 만산홍엽, 겨울 설경으로 유명한 사계절 아름다운 명소로 년간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특히 내장산의 대표 명소인 단풍터널은 일주문에서 내장사까지 108주의 단풍나무로 우거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출처:정읍시청

정읍9경 정읍1경 내장산단풍터널


[정읍 내장산 내장사 일주문]

일주문은 산문이니 여기서부터는 절 안이다. 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상징물로 일주문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온갖 번뇌와 망상, 혼란한 생각을 여의고 깨달음의 일념으로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입차문내 박존지해(이 문 안에 들어서면 밖에서의 알음알이에 의한 분별심에 의지하지 말라!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반야와 번뇌가 둘이 아니다. 재가와 출가가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일주문을 넘어 108그루의 단풍 숲을 거닐며 백팔번뇌를 말끔히 씻어 고운 염주알로 굴리며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라.) 1973년에 세워진 내장사 일주문은 두 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맞배지붕을 올렸으며, 서예가 강암 송성용 선생이 쓴 '내장산내장사' 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내장사 일주문]

이 절 일주문 기둥은 한아름이 넘을 듯한 통나무를 잔가지 치고 껍질만 벗겨서 그대로 써, 마치 장사의 다리처럼 튼튼하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벽련암 가는 길 바위에 자라는 나무"


"한국 100대 명수 백년약수"

벽련암 오르는길 초입에 있는 약수다. 2010년 음용불가로 패쇄되었다.


"벽련암 느티나무"


"벽련선원"


[전라북도 기념물 내장사지 (內藏寺址)]

내장산에 있는 옛 내장사터로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련사는 내장사라고도 이르며 내장산에 있다.’라고 하였다.

백련사는 언제 세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백제 의자왕20년(660)에 유해선사가 세웠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가 ‘백련(白蓮)’을 ‘벽련사(碧蓮寺)’로 개칭하고, 현판을 써서 걸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1925년 학명선사가 아미타불을 봉안한 극락보전을 고쳐짓고, 스님들이 생활하던 요사채와, 도량건물인 선원을 세웠으나 역시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연대를 알 수 없는 탑식으로 된 부도가 남아 있으며, 뒷쪽 암벽에 몽련당 김진민의 석란정(石蘭亭)이라는 글자가 새겨 있다.

출처:문화재청


[벽련암]

기록(記錄)에 의하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정읍조(井邑條)에 의하면 "백련사 혹은 내장사 재내장산(白蓮寺 或云 內藏寺 在內藏山)" 이는 "백련사(白蓮寺)는 혹은 내장사(內藏寺)라고도 말하며 내장산(內藏山)에 있다"고 하엿다.

원래는 백련사(白蓮寺)였으니,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20년인 서기 66년에 유해선사 (幼海禪師)가 세웠다 하였는데 언제부터 백련사라 하였는지는 알수 없다. 근래에 와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백련(白蓮)을 벽련사(碧蓮寺)로 바꾸어 불러 절의 액자를 써 걸었는데 6.25 사변으로 타 버렸다.

1925년에 학명선사(鶴鳴禪師)가 본전(本殿)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새로 고쳐 짓고 (改築), 요사(寮舍: 僧侶등의 宿所)를 고치는 동시에 선원(禪院) 한 동(一棟)을 세웠으나, 6.25사변으로 1951년 1월 25일인 음력 12월 10일에 전부 타 버렸다. 서쪽에는 해 수를 알수 없는 탑식(塔式)으로 만들어진 부도(浮屠: 高僧의 사리나 遺骨을 넣고 쌓은 둥근 돌탑)가 남아 있다. 뒤에 있는 암벽(岩壁)에는 이 고장 태인(泰仁) 출신인 여류(女流) 몽련당(夢蓮堂) 김진민 (金 珉)이 쓴 석란정(石蘭亭)이라는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다.

출처:정읍시청


[벽련암]

서래봉 아래에 위치하며 원래 내장사란 이름으로 일컬었는데 근세에 와서 영은암(현 내장사)을 내장사로 개창하고 이곳은 백련암으로 이름하였고 나중에 벽련암으로 고쳐쓰게 되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환해선사가 창건하고 1925년 백학명선사가 본전인 극락보전과 요사를 중건하였으나, 6.25 전란으로 소실되어 항봉스님과 진공스님이 복원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벽련암 석축대를 쌓을때 희묵대사가 서래봉 정상에서 돌을 던지면 수제자 회천스님이 이를 받아 쌓아올렸다 한다. 이 벽련선원은 삼대적전의 선근 인연공덕이 있는 이가 참배하는 복전의 기도도량이라고 한다.


"거북이와 잉어가 그려진 수조"


"불상(복중의 복은 인연복)"


[벽련암 단풍나무]

2012년 한국임업진흥원 조사 결과 수고 15m, 근원직경 105cm, 흉고직경 48cm, 수령 310년으로 검증되었다. 다섯가지로 뻗은 수관이 매우 아름답고, 사찰의 소실과 한국전쟁 등 벽련암 고난의 역사를 함께 하였으며, 여름철 단풍나무 그늘은 스님들의 포행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석탑 안 작은 불상과 내장산 전망대"


"내장산 전망대"


"벽련암 늙은 개와 젊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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