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리움미술관(고미술 상설관 M1, 1층)

2023. 1. 9. 05:58바롱이의 쪽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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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미술관]

리움은 문화창조에 기여하고, 소통하는 21세기 융합미술관을 지향합니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 설립 이후 소중한 문화 유산을 보전하고 대중에게 알리고자 노력해온 삼성미술관은 2004년 서울 한남동에 미술관 건물을 신축하면서 리움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수준 높은 소장품 전시 및 기획전시 개최 등 그간의 괄목할만한 활동과 성과로 지금 리움은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미션

리움미술관은 한국 고유의 미를 담고 있는 전통미술과 생동하는 현대미술, 시대적 가치를 반영한 국 제미술이 함께 공존하는 세계를 향한 열린 미술관입니다. 리움은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함께 모색하고, 시대와 장르를 초월한 융합미술관으로 관객과 함께 향유하고 소통하는 문화적 공간이 되고자 합니다.

리움은 관객과 소통하는 미술관으로서 예술과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문화를 선도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것은 미술관으로서 리움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이를 위해 리움은 전시와 교육, 미술품 보존 등 각 분야의 전문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시의성 있는 주제와 중요 작가를 조명하는 기획전, 심도 있는 학술 행사와 교육 프로그램 등을 선보여 왔습니다. 앞으로도 리움은 우리 시대 예술의 지평을 넓히고 미래의 문화를 선도하는 미술관의 역할을 더욱 충실히 할 것입니다.

출처:리움미술관


[고미술 상설관 M1]

고미술 상설관인 M1에는 4층부터 1층까지 각 층별 주제에 맞춰 엄선한 12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4층에는 ‘푸른빛 문양 한 점’이라는 주제로 고려시대 청자의 세계가 펼쳐진다. '흰빛의 여정'을 주제로 꾸민 3층은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2층 '감상과 취향'에서는 다양한 기법과 주제의 고서화를 볼 수 있다. '권위와 신앙, 화려함의 세계'를 주제로 한 1층에서는 불교미술, 금속공예, 나전칠기 등에 구현된 선조들의 정신세계와 미감을 느낄 수 있다. 더불어 각 층마다 고미술 작품과 함께 전시된 현대미술 작품들 사이를 거닐며 시대를 초월한 예술의 교감을 확인할 수 있다.


[권위와 신앙, 화려함의 세계(1층)]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는 삼국시대인 4세기에 중국을 거쳐 이 땅에 처음 전래되었다.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오랫동안 한국 문화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 신앙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불상에서는 인체를 통해 신성(神性)을 표현해낸 뛰어난 예술성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불화는 동시기 중국이나 일본의 불화와 뚜렷이 구별되는데, 섬세한 표현과 독자적인 미감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공덕을 쌓기
위해 불교 경전을 손으로 베껴 쓴 사경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간절한 발원과 깊은 신앙심을 느낄 수 있다. 함께 전시된 현대 조각은 인간 세계의 번민에서 벗어나 숭고함에 도달하고자 하는 불교미술의 주제와 어우러진다.

불교미술이 화려하게 꽃필 수 있었던 배경으로, 불교 전래 이전부터 발전했던 쇠를 다루는 야금(金)의 전통이 있었다.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현세의 삶이 내세로 이어진다고 믿었기에, 무기와 금관을 비롯해 각종 금속제 장식품과 토기들을 무덤 속에 함께 묻었다. 화려하게 장식한 큰 칼과 금으로 만든 다양한 장신구들은 당시 지배 세력의 미적 취향과 권위를 잘 보여준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일상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공예품에서는 다채로운 장식 기법과 정성이 돋보이는 세밀한 표현을 만나볼 수 있다.


[국보 아미타여래삼존도 고려, 14세기]

불교에서는 서방에 극락이란 이름의 청정한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극락은 고통이 전혀 없고 지극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이상적인 세계이다. 무량한 수명 혹은 한량없는 광명을 가졌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미타여래가 이 곳에 머무르며 늘 불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 누구나 극락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하여, 삼국시대 이래로 많은 이들이 아미타여래에 귀의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아미타여래가 임종의 순간에 강림하여 죽은 자를 극락으로 맞이해간다는 신앙이 크게 유행했다. 이 작품에는 아미타여래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대동하여 죽은 이를 마중하러 오는 장면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출처:리움미술관


[약사여래삼존도 조선, 15세기]

약사여래(藥師如來)는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부처이다. 그림 하단에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이 작품은 1477년에 왕실에서 성종(成宗)의 수명장수를 위하여 조성한 다섯 폭의 불화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 중앙에 자리한 약사여래와 두 보살을 사천왕(四天王)과 신장(神將)이 에워싼 구도이다. 위아래가 명확하게 나뉘는 구도와 부처가 걸친 가사에 보이는 당초원문(唐草圓文), 금가루를 사용한 호화로운 표현, 아름다운 색감의 조화는 고려불화를 연상케 하는 반면, 얼굴의 형태나 세부 묘사는 조선 초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출처:리움미술관


[국보 감지금은니 대방광불화엄경 권31 고려, 1337년]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후 안락(安樂)을 빌고, 부부 자신은 재앙 없이 복락(福樂)을 누리면서 오래 살다가 죽은 뒤에 연화세계(蓮花世界)에 태어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담고 있는 사경(寫經)이다. 전체적으로 두루마리 사경의 일반적인 체계를 따르고 있으나, 변상도(變相圖) 앞에 위패형(位牌形)의 발원문을 두었다는 특징이 있다. 굵기의 변화가 없는 철선묘(鐵線描)를 주로 사용하면서도, 바위나 땅의 표면에 수묵화의 선염(渲染)과 비슷한 기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전면을 빽빽하게 묘사하였으면서도 흐트러짐 없이 치밀하고 섬세한 필치를 구사하고 있다.

출처:리움미술관


[금동 탑형 사리기 일괄 고려, 14세기]

사리기는 보통 금과 은, 수정 등의 귀한 재료로 만들어지며, 서로 겹쳐지는 여러 겹의 그릇들로 구성된다. 이 사리기는 티베트식 불탑 모양을 본떠 만든 외부 용기와 수정 뚜껑을 지닌 내부 용기가 한 세트를 이룬다. 외부 용기는 원형의 받침, 항아리처럼 부풀어 오른 몸체, 여러 겹의 고리를 겹쳐놓은 듯한 상륜부(相輪部)로 구성되었다. 특히 받침은 연꽃잎을 위아래로 겹쳐놓은 문양으로 장식하고, 몸체는 목걸이를 연상시키는 구슬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 장식적인 효과를 높였다. 연꽃잎과 구슬 장식 일부는 원래 보석을 박아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리움미술관


[은제 사리기 고려, 11-12세기]

사리(舍利)는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귀한 재료와 최고의 솜씨를 동원하여 만든 그릇 속에 보관되었다. 이 사리기는 은으로 만들어진 외합, 내합, 병의 삼중으로 구성되었다. 외합과 내합은 원통형 몸체와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내합의 뚜껑에는 아무 무늬가 없으나, 외합의 뚜껑은 여덟 장의 연꽃잎모양으로 장식되었다. 외합에는 갑옷을 입고 합장한 인물, 창을 든 인물, 피리를 부는 인물, 양손을 가슴에서 아래 위로 올린 인물의 모습으로 장식하였다. 사리가 들어 있었던 가장 안쪽의 은제 사리병 표면에는 선명한 녹색의 유리가 씌워져 있다.

출처:리움미술관


[금동 금강저ㆍ청동 오고령 고려, 10-14세기]

금강저는 고대 인도의 무기인 저(杵)에서 유래하였다. 불교미술에서는 신들이 든 무기로 묘사되며, 승려의 수행과 불교 의례에 사용됐던 도구이기도 하다. 좌우대칭형의 이 금강저는 중앙의 손잡이에 세 개의 둥근 고리[?]가 있는 삼고저(三?杵)이다. 금강령은 종과 금강저를 결합해 만든 것으로 불교의식에서 소리를 내어 불보살을 찬탄하고 중생을 깨우치는 데 사용되었다. 금강령 중 손잡이를 오고저(五?杵) 모양으로 만든 것을 특별히 오고령이라 부른다. 이 오고령의 몸체에는 삿된 것을 제압하기 위해 분노한 표정을 지은 다섯 명의 명왕(明王)이 새겨져 있다.

출처:리움미술관


[보물 청동은입사 포류수금문 향완 고려, 12세기]

향완은 향을 살라 불보살에게 향기를 공양하는데 사용됐던 향로의 한 종류이다. 이 향완은 청동의 표면에 홈을 판 후 가느다란 은선을 넣어 만든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몸체에는 따뜻한 봄 햇살을 받아 피어난 버드나무 아래에 물오리가 한가로이 헤엄치는 물가의 풍경을 묘사하였고, 연꽃으로 장식한 위패(位牌) 모양 안에는 임금의 만수무강과 모든 중생이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비는 바람을 새겼다. 몸체에서 다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윤곽선과 서정적인 물가 풍경에서 고려 장인이 도달한 빼어난 예술적 경지를 엿볼 수 있다.

출처:리움미술관


[청동 정병 고려, 12세기]

정병(淨甁)은 원래 승려들이 갖고 다니는 일상 용구였는데, 후에는 불전(佛前)에 물을 올리는 용기나 생활용구로도 사용되었다. 정병은 고려불화 중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속에 관음보살을 상징하는 여러 물건 중 하나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 정병은 풍만한 몸체와 가늘고 긴 목, 환대(環帶)위로 긴 출수구, 그리고 따로 뚜껑이 달린 입수구(入水口) 등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정병의 모습을 하고 있다.

출처:리움미술관


[청동 범종 고려, 13세기]

범종은 불교에서 소리로서 중생을 구제하고 주변을 청정하게 하는 의식용으로 사용된 종을 일컫는 말이다. 범종은 그 사용처에 따라 다양한 크기로 제작되었는데 이처럼 작은 종들은 주로 실내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종의 윗부분에는 종을 걸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용모양 고리와 종의 소리와 연관된 원통형 관이 있다. 몸체에는 불교적 의미를 담은 다채로운 문양이 곳곳에 표현되어 있다. 동서남북 네 방향에 종을 치는 위치를 표시한 연꽃 형상의 당좌가 그 좋은 예다.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범종의 구성 요소들을 짜임새 있게 갖춘 수작이다.

출처:리움미술관


[금동 소탑 고려, 13-14세기]

고려시대에는 부처를 모신 법당의 내부를 장엄하고, 공덕을 쌓기 위한 목적에서 불탑을 작은 크기로 만드는 일이 유행하였다. 이와 같은 소형 탑들은 평면이 사각형이며, 여러 층을 지닌 목조 누각과 같은 모습이 많다. 이 탑은 기단(基壇)과 5층의 몸체, 상부를 마감한 상륜(相輪)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데군데에 금빛이 남아 있어서 본래는 금동탑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탑신 1층의 네 면에는 난간이 돌려져 있고, 귀퉁이마다 밖을 향해 합장한 인물이 배치되어 있다. 탑신과 지붕의 세부 묘사에서 당시 목조 건축의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출처:리움미술관


[국보 금동 대탑 고려, 10-11세기]

불교가 크게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불탑을 조성하여 공덕을 쌓는 일이 널리 행해졌다. 하지만 모든 이가 많은 재화와 인력이 필요한 큰 탑을 만들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그 대신 단단한 금속으로 작은 탑들을 많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유물은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탑 모형 중 가장 크기가 크다. 탑의 표면에는 나무로 지은 탑의 구조를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부처의 모습을 촘촘히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이 탑은 고려시대 사람들의 깊은 신앙심을 전해주는 동시에, 지금은 사라진 당시 목탑의 모습을 복원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출처:리움미술관


[청동 세형 검 삼한시대, 기원전 2세기-기원후 1세기]

이 동검은 그 형태로 보아 청동기의 시대가 저물고 철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던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청동 검은 칼의 몸체[檢身]와 칼자루[劍把]를 따로 주조하여 만들어진다. 칼 전체가 가늘고 길며 양쪽에 날이 선 형태를 취한다. 칼 몸체의 중앙은 등골뼈처럼 튀어나와 있어서 특색이 있다.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세형동검이라고 불리며,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불린다. 이 시기 동검은 무기 보다는 최고의 실력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신분의 상징물로서 사용되었다.

출처:리움미술관


[청동 호형 대구 삼한시대, 2-3세기]

호랑이 모양의 이 청동제 고리는 허리띠를 고정하는 데 썼던 장식품이다. 주조해서 만들어진 이 띠고리[帶鉤]의 한쪽 면은 목을 바짝 치켜 들고 웅크리고 앉은 호랑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얼굴과 몸통 부분에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 생동감이 느껴진다. 띠고리의 뒷면에는 띠와 연결시킬 수 있도록 단추 모양의 꼭지가 붙여져 있다. 호랑이나 말과 같은 동물 형상의 띠고리는 청동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배층의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입체감이 느껴지는 호랑이의 모습이나 섬세한 문양에서 당시의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출처:리움미술관


[금동투조 용문 재갈 삼국시대, 5-6세기]

고대 우리 조상들은 자신의 신분과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많은 장신구로 몸을 꾸몄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이 타고 다닌 말과 마차 등에도 화려한 장식을 하였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한 장식의 유행을 따른 것으로 말의 입에 물리던 재갈과 관련된 것이다. 그 세부를 보면 금동으로 금빛을 바탕으로 경쾌한 용 문양을 표면을 뚫어 만드는 투조 기법으로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으로 몸을 치장 하듯 자주 애용한 말에도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던 당시 지배층의 호화로운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작품이다.

출처:리움미술관


[은제 과대 삼국시대, 5-6세기]

직물이나 가죽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여 만든 허리띠를 과대라고 부른다. 이 과대는 사각형의 금속판인 과판 34점와 띠고리 1점, 과대에 늘어뜨린 장식품[腰佩] 1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과대는 그 형태가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것과 거의 유사하다. 백제나 신라에서는 관직이나 신분에 따라 과대에 매다는 장식품의 재료, 색, 수량에 차이를 두었다. 이에 따라 과대는 옷을 여미기 위한 실용적 기능 보다는 지배계급의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장신구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출처:리움미술관


[보물 신발모양 토기가야, 4-5세기]

이 흙신은 무덤에 부장할 목적으로 당시에 사용하던 가죽 신발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앞부분의 코는 두툼하고, 측면 둘레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어 끈으로 조일 수 있게 만들어졌다. 발등이 닿는 중간에도 구멍이 하나 뚫려 있고, 뒤꿈치는 마치 가죽을 덧댄 형태로 약간 솟아 있어, 지금의 신발처럼 손으로 잡고 신을 수 있도록 하였다. 전체의 크기나 세부의 형태, 장식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매우 보기 드문 작품이다. 당시 실제로 사용한 신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어서 생활사(生活史)를 재조명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높다.

출처:리움미술관


[집모양 토기 가야, 4-5세기]

오래전 우리 조상들은 죽은 후에도 생전과 같은 생활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죽은 이의 무덤에 생전에 쓰던 귀중품이나 다양한 모형 등을 함께 묻는 풍습이 유행했는데 이러한 물건을 명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작품 역시 토기로 만든 집 형태의 모형으로 죽은 이를 위한 명기라 할 수 있다. 무덤 속에서 나온 이러한 모형들은 당시의 집과 건축물이 남아 있지 않은 오늘날 오래 전 조상들의 삶을 엿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출처:리움미술관


[보물 배모양 토기 가야, 4-5세기]

강에서 가까운 거리를 이동할 때 사용하던 나룻배의 형태의 흙으로 만든 토기이다. 죽은 이와 함께 묻은 모형으로 죽어서도 영원히 살아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용기로 추정된다. 물살을 잘 헤쳐 나가도록 유연한 곡선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노를 젓기 위한 장치도 보인다. 모형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실제 배의 모습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조상들의 지혜와 삶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출처:리움미술관


[공예 지금 정구호 백골동 2022 白骨銅]

패션을 넘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폭넓게 활동해온 정구호 디자이너가 목가구에 부착하는 금속 장석(裝錫)을 만드는 장인(匠人)들과 협업한 반닫이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정구호는 계층의 구분 없이 오랫동안 널리 사용된 반닫이에 착안하여, 그 몸체를 나무가 아닌 아크릴의 일종인 플렉시글라스로 대체하고, 투명한 표면은 전통적인 디자인을 그대로 살린 금속의 장석으로 장식했다. 

한국 반닫이는 지역별로 특징을 달리 하며 전래됐는데, 이 작품에 영감을 준 것은 그 중에서도 전면에 달린 커다란 문짝과 화려한 장식이 특징적인 평양 반닫이다. 이 작품은 현대 사회에서 너무나 흔한 투명 플라스틱 소재의 몸체에 과거와 달리 요즘은 찾는 이가 적은 전통 장석을 장식한 새로운 반닫이들의 결합체다. 투명한 몸체와 반짝이는 장석들의 규칙적인 전개는 전통과 현재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두터운 벽을 경쾌한 빛깔로 관통하는 듯하다. 이를 통해 <백골동>은 오랜 시간의 흔적을 품은 고대 금속기들 사이에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 수 있는 통로의 큰 문(門)처럼 당당히 자리해 시간을 초월한 예술 감성을 전한다.


[나전 국화당초문 팔각합 고려 말-조선 초, 14-15세기]

전체적으로 고려시대 나전칠기(螺鈿漆器)의 세밀함과 특유의 문양 구성을 보이는 동시에 조선시대 나전칠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서 고려 말 혹은 조선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제작된 팔각합으로서는 현재까지 전하는 유일한 사례로서 희소성이 크다. 문양은 나전 조각을 세밀하게 잘라 국화와 모란 꽃을 중심으로 당초로 연결해 구성하였다. 고려시대 나전은 기물의 모서리를 꼬은 철선으로 보강한데 반해, 이 팔각합의 경우 모서리에 일자의 철선을 넣어 보강하였다.

출처:리움미술관

[나전 국화당초문 화형반 고려 말-조선 초, 14-15세기]

유례가 많지 않은 조선 초기의 나전칠기로서 이 시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특히 오엽의 화형반은 매우 드문 예이다. 중앙에는 끝이 둥근 꽃잎을 가진 2중의 국화문을 배치하고, 그 주변에는 꽃잎 끝이 뾰족한 3중의 국화문이 둘러싸고 있다. 테두리에는 자개로 경계선을 두고 별 모양 꽃술과 둥근 꽃잎으로 구성된 국화문 한 줄을 두었다. 국화문의 흐름은 일정한 규칙이 보이지 않고 넝쿨이 서로 꼬인 듯한 특이한 표현이 나타난다.

출처:리움미술관

[나전 국화당초문 붓 고려 말, 14세기]

흑칠 바탕을 배경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전복패와 금속선을 이용한 치밀한 장식이 펼쳐지는 수작이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나전은 20여점 밖에 안 될뿐더러, 그 종류도 경함(經函), 염주합(念珠盒), 향갑(香匣), 불자(拂子), 모자합(母子盒) 등 대부분 불교와 관련이 있다. 이 붓은 기존에 알려진 것 보다 훨씬 다양한 종류의 물건이 나전으로 장식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기에 더더욱 귀중한 유물이다. 붓 몸통과 뚜껑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몸통의 윗부분에는 붓털이 달려 있다. 전체적으로 흑칠을 한 바탕 위에 손끝으로 집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작게 오려낸 나전을 빈틈 없이 빼곡하게 배치하여 국화와 넝쿨 문양을 유려하게 표현하였다.

출처:리움미술관


[은제 삼엽문 환두대도 삼국시대, 5세기]

삼국시대의 큰 칼은 손잡이 끝이 둥근 고리로 장식된 예가 많아 환두대도(環頭大刀)라 불린다. 환두대도는 원래는 실용 무기였으나 4세기 후반부터는 위세품(威勢品)로서 널리 제작되고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손잡이 고리는 철로 만든 후 은으로 장식하였으며, 손잡이는 물고기 비늘 무늬를 촘촘하게 타출(打出)한 얇은 은판으로 감싸 마감하였다. 이 은판의 상단에는 새김눈 문양으로 장식한 은띠로 감았는데, 본래는 하단 끝도 동일하게 장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자루와 칼집은 결실되고 철로 제작된 도신(刀身)만이 남아 있다.

출처:리움미술관


[환두대도 편 삼국시대, 5세기]

칼의 몸체가 손상된 유물로 은제의 삼엽문 환두와 금제의 손잡이 장식을 가지고 있다. 환두 장식은 철로 만든 후 은판을 감싸 만들어졌다. 환두 아래쪽으로는 환두를 손잡이 부분에 꼽을 수 있도록 은판을 감아 붙인 병두금구(柄頭金具)가 하나 있다. 병두금구의 상단에는 짧은 선을 빗금처럼 반복적으로 새긴 좁은 테가 돌려져 있다. 현존하는 환두대도의 환두와 손잡이 부분은 대부분 동일한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출처:리움미술관


[청동 풍탁 고려, 12-13세기]

풍탁은 사찰의 법당 추녀 밑이나 불탑의 옥개(屋蓋)에 거는 종의 일종이다. 바람에 흔들리면 안에 달린 물고기 모양의 얇은 금속판이 움직이며 청정한 소리를 낸다. 이 유물은 크기와 모양이 거의 동일한 1쌍의 풍탁이다. 어깨 부분에는 큼직한 연꽃잎을 위를 향하게 빙 둘렀고, 하단은 능형으로 마무리하였다. 몸체의 위아래와 모서리에는 문양대를 마련하고 당초문으로 꾸몄다. 몸체의 사면은 모두 사다리꼴로 같은 무늬로 꾸며졌다. 각 면은 가운데 연화문을 중심으로 작은 구슬로 이어진 장식이 달려 있고, 그 위로 초승달 모양의 소리 구멍이 한 개씩 뚫려 있다. 

출처:리움미술관


[청동 동자유희문 거울 고려, 12-13세기]

청동 거울은 고대에는 제사를 지내는 데 사용되는 용품이었으나 점차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고 화장할 때 사용하는 실용품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다른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량의 청동 거울이 제작되었다. 이 거울의 뒷면 중앙에는 뉴라고 불리는 꼭지가 있는데, 여기에 막대나 끈 등을 끼워 넣어 받침대에 연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뉴를 제외한 나머지 면에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정원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5명의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거울 가장자리에는 새와 꽃으로 장식해 화려함을 더했다.

출처:리움미술관


[금동 손잡이향로 통일신라, 8-10세기]

향을 살라 불보살에게 아름다운 향기를 바치는 일은 지금까지도 널리 행해진다. 긴 손잡이가 달린 이 향로는 움직이면서 불보살을 예배할 때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유물은 향을 담는 화로, 그 밑의 연꽃 모양 받침대, 길게 뻗은 손잡이로 이루어졌다. 화로 부분은 나팔처럼 위로 올라가면서 넓게 벌어지며, 그 밑의 받침대는 두툼하게 만들어져 안정감을 준다. 뒤로 길게 뻗은 손잡이와 화로의 연결 부위에는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도구인 여의두(如意頭) 모양 금동판을 붙여 장식하였다. 손잡이의 반대편 끝에는 무게를 고르게 하기 위하여 사자 모양 추를 놓았다.

출처:리움미술관


[보물 금동 빗장 일괄 통일신라, 8-10세기]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금동제 자물쇠와 문이나 가구 등을 표면에 달아 자물쇠를 걸었던 고리로이뤄진 세트이다. 전체적으로 자물쇠의 기본적인 기능에 충실한 튼튼한 형태이며, 양 끝은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표면에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자물쇠가 조각된 사례들이 있어 흥미롭다. 이로 미뤄볼 때 이 자물쇠는 불교 건축물이나 조형물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괄품인 고리에는 자물쇠와 달리 화려한 문양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어 기능성과 장식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출처:리움미술관


[금동 용두장식 자물쇠 고려, 14세기]

자물쇠와 열쇠, 그리고 자물쇠를 문이나 가구 등에 부착하는데 사용되는 배목이 함께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유물이다. 자물쇠의 양 옆은 앞을 향해 고개를 든 용의 머리로 장식되었다. 갈기를 날리며 눈을 부릅뜨고 혀를 내민 용의 형상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자물통의 표면은 넝쿨 무늬를 음각하여 장식하였다. 자물통 양 옆, 즉 용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비늘을 촘촘하게 음각하였다. 오른쪽 뒤에 있는 구멍에 열쇠를 넣어 밀면 왼쪽의 용머리 부분만이 분리된다. 기능과 장식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빼어난 고려시대의 실용 공예품이다.

출처:리움미술관


[금은장 쌍록문 장식조개 통일신라, 8-10세기]

특이하게 고대의 일반적인 금속 혹은 나무를 이용한 공예품이 아닌 조개를 바탕 재료로 사용한 유물이다. 그 용도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으나 향을 담아 몸에 소지하고 다니던 용도로 추정되기도 한다. 표면엔 금과 은판을 이용해 두 마리의 사슴이 풀숲에서 노니는 모습을 섬세하게 조각해서 장식하였다. 암놈은 목을 길게 빼 풀을 뜯어먹고 있고, 수놈은 암놈의 등 뒤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는 정감 있는 모습을 담았다. 이러한 사슴 문양은 통일신라시대 유행한 문양으로 당시 전래되는 공예품과 기와 등에서 다채롭게 사용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출처:리움미술관


[대모 감장 화문 빗 통일신라, 8-10세기]

바다거북의 일종인 대모(玳瑁)의 등껍질로 만든 머리 장식용 빗이다. 손잡이는 금과 청옥(靑玉) 등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일반 빗과 다르게 손잡이와 빗살 부분이 직각으로 꺾여 있고 손잡이와 빗살의 경계면에 작은 구멍을 뚫어 꽃 모양의 장식을 매달았다. 손잡이에는 금실을 둘러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꽃 모양을 줄지어 돌려서 장식하였다. 꽃 모양 안쪽에 박힌 청옥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색의 대비를 이뤘을 것이다. 통일신라 여인들의 화려한 머리 꾸밈새를 전해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출처:리움미술관


[금제 팔찌 가야, 5-6세기]

귀걸이와 함께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장신구로 팔찌가 있다. 삼국시대에는 각 나라마다 독특한 특징의 팔찌가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유물들은 주로 고분 안에서 발견된다. 망자의 자취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금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들은 변함 없이 보존되어 지금까지도 화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이 유물들은 삼국시대의 일반적인 팔찌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고, 고리의 크기가 상당히 작아서 손목에 착용하기가 쉽지 않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실제 사용한 것이라기 보다는 부장용으로 특수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리움미술관

[금제 반지 가야, 5-6세기]

이 금제 반지는 죽은 후에도 삶이 이어진다고 생각했던 당대 지배계층의 내세관을 드러낸다. 또한 이 장신구들에서 화려함과 장식미는 물론 고대의 금속 세공기술을 엿볼 수 있다. 이 가락지들은 얇은 금판을 둥글게 말아 만들어졌다. 같은 모양의 세 점은 위가 폭넓은 마름모이고 접합부로 가면서 점차 폭이 줄어드는 형태를 띤다. 다른 한 점은 이 세 점보다 크기가 약간 크며 일정한 폭으로 제작되었다. 금판의 양 끝은 안쪽으로 접어 마무리하였다.

출처:리움미술관


[유리 주옥 삼국시대, 5-6세기]

대형 구슬 16개, 소형 구슬 32개, 종형(鐘形) 구슬 1개, 관옥(管玉) 1개, 상감유리구슬 2개로 이루어진 삼국시대의 목걸이다. 소형 구슬 2개 사이에 대형 구슬 1개를 끼워 전체적인 형태를 만들고, 중앙의 종형 구슬에는 구멍을 내어 끝이 밖으로 벌어진 종형의 금제 드리개를 달았다.  종형 구슬과 드리개 사이는 용수철 형태의 금구(金具)로 감싸져 있고, 상하에 금제 화판(花板)을 씌운 남색 상감 유리구슬 2개 사이에는 관옥이 끼워져 있다. 보기에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귀중한 재료와 고도의 세공 기술을 결합하여 만들어진 귀한 유물이다.

출처:리움미술관


[금제 귀걸이 삼국시대, 5-6세기]

삼국시대 귀걸이는 귀에 거는 부분인 주환(主環)의 굵기에 따라 굵은 고리 귀걸이[太環耳飾]와 가는 고리 귀걸이[細環耳飾]로 구분된다. 굵은 고리 귀걸이의 용도와 사용방법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이를 통해 고도로 발달했던 삼국시대의 금속공예 기법과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가는 고리 귀걸이는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고분에서 모두 출토되며,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화려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포도송이, 산치자 열매와 하트 같은 드리개의 개성적인 형태가 돋보이는 유물들이다.

출처:리움미술관


[보물 금제 귀걸이 삼국시대, 5-6세기]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에 우리 조상들이 착용한 금으로 만든 귀걸이 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금은 귀한 보물로 당시에도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값비싼 재료였기 때문에 왕실이나 높은 지위의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귀걸이는 금판을 둥글게 말아서 형태를 만든 후 그 표면에 눈으로 확인하기도 어려운 작은 금 알갱이들을 섬세하게 용접하는 방식으로 문양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금 알갱이를 이용한 정교한 장식을 누금 기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둥근 몸체 아래로는 금으로 만든 하트, 나뭇잎, 열매, 공 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장식들을 가는 금실로 연결해서 달아 화려함을 더하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출처:리움미술관


[은제 아미타여래삼존 좌상 고려, 1383년]

고려후기에는 이 삼존상처럼 서방 극락세계의 부처인 아미타여래와 고난에 처한 중생을 구제하고인도하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로 구성된 불상이 상당수 만들어졌다. 불교 경전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이와 같은 구성에서 내세에서 구원받기를 원했던 당시 사람들의 염원을 읽을 수 있다. 관음보살상 내부에서는 불상 조성에 참여한 시주자의 명단 등을 기록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에 의하면 1383년에 500명이 넘는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 이 삼존상을 제작하여 모셨다고 한다. 시주자 중에는 몇 년 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도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출처:리움미술관


[금동 탄생불 입상 삼국시대, 7세기]

석가모니는 기원전 6세기경 네팔과 인도의 국경 부근에서 번성했던 샤캬국의 태자로 태어났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오른손으로 위를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가장 높네. 삼계의 모든 고통, 내가 마땅히 편안히 하리(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선언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탄생 설화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한 구의 불상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 이 탄생불은 자연스러운 인체의 양감, 날씬한 신체의 비율, 섬세한 옷주름의 표현이 돋보인다.

출처:리움미술관


[금동 여래 입상 통일신라, 8세기]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중국의 당과 활발히 교류했던 8세기에는 국제적으로 유행했던 불상의 양식이 우리나라에 전해져 수용되었다. 이 불상은 여래의 신체 표현에 보이는 자연스러운 양감이나 광배와 대좌의 형태 등으로 미뤄보아 8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본존은 오른손을 들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의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지었고, 왼손은 아래쪽으로 내려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켜준다는 뜻의 여원인(與願印)을 지었다. 우수한 제작기술을 활용해 균형과 조화가 잘 어우러진 불상을 만들어낸 통일신라 장인의 미감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출처:리움미술관


[금동 관음보살 입상 통일신라, 8세기]

이 상은 대좌와 보살을 한꺼번에 주조하여 만들어졌다. 보살은 왼쪽 무릎을 굽혀 앞으로 내밀고 상반신은 좌측으로 약간 튼 자세로 묘사되었다. 앞으로 내밀은 오른손에 수병(水甁)을 든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觀音菩薩)로 생각된다. 관음보살은 대승불교의 수많은 보살 중에서도 자비의 상징이자 중생을 재난에서 구해주는 존재로서 널리 믿어졌고 상으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양 옆으로 벌어진 가슴과 두 다리에서 입체감이 강하게 느껴지며, 살이 살짝 오른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다. 사실적인 신체 묘사가 빚어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보살상이다.

출처:리움미술관


[은제 관음보살 좌상 고려, 14세기]

고려후기에 조성된 이 상은 결가부좌한 채 깊은 생각에 잠긴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소형이긴 하나 이처럼 단독으로 조성된 상은 고려후기에 자비의 상징이자 중생을 고난에서 구제해주는 관음보살에 대한 신앙이 매우 널리 유행했음을 알려준다. 다소 기름한 얼굴에는 뺨과 턱의 양감이 강조되었고, 눈과 윗눈썹은 얇게 음각하여 묘사되었다. 보관(寶冠) 중앙에는 아미타여래를 상징하는 작은 부처가 표현되어 있고, 외곽에 있는 다섯 개의 모서리는 꽃 모양으로 장식되었다. 보관의 하단에는 바깥으로 향해 뻗은 5개의 장식이 달려 있어 이채롭다.

출처:리움미술관


[금동 아미타여래삼존 좌상 고려 말-조선 초, 14-15세기]

고려후기부터 나타나는 아미타여래, 그리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로 구성된 삼존상이다. 부처가 앉은 대좌 중간의 양쪽에서 연꽃 줄기가 뻗어 나와 두 보살의 대좌와 연결된 형상은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중엽에 걸쳐 조성된 소형 삼존불상에서도 종종 보인다. 부처는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도록 옷을 입었고, 드러난 가슴의 중앙에는 만자(卍字)가 보인다. 부처의 얼굴은 역삼각형에 가까우며, 뾰족하게 솟아오른 정수리 위에는 구슬이 올려져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중국의 원나라와 명나라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티베트 계통의 불교미술을 수용한 결과로 생각된다. 여래의 대좌 앞쪽에는 통상 관음보살과 함께 묘사되는 정병(淨甁)이 놓여 있어서 특이하다.

출처:리움미술관


[금동 여래삼존 좌상 조선, 15세기]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는 이 작품처럼 중앙의 부처와 좌우의 보살로 구성된 소형의 삼존불상이 상당수 제작되었다. 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로 부처가 앉은 대좌에서 연꽃 줄기가 뻗어 나와 두 보살의 대좌로 연결되는 독특한 표현을 들 수 있다. 중앙의 부처는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도록 옷을 입었고, 오른손은 무릎 부근으로 내려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지었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부처의 정수리에는 연꽃 봉우리 모양의 구슬이 올려져 있다. 두 보살은 불교 경전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잡고 있다.

출처:리움미술관


[금동 관음ㆍ지장보살 좌상 조선, 15세기]

거의 동일한 크기에, 표현 방식도 유사하여 세트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보살상이다. 우리나라에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은 각각 내세와 현세의 괴로움에서 중생을 구제해주는 보살로서 시대를 막론하고 널리 믿어졌다. 지장보살은 다른 보살들과 달리 머리를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관음보살은 중앙에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작은 부처가 표현된 보관을 쓰고 있다. 두 보살은 모두 고개를 약간 숙여 아래를 바라보고 있으며, 커다란 귀고리와 목걸이를 착용하였다. 몸의 크기에 비해 두 손이 매우 크게 표현되어 특징적이다.

출처:리움미술관


[국보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통일신라, 754-755년]

 

예로부터 불교경전을 베껴 쓰는 일은 신앙심을 두텁게 하고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여겨졌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인 754년에서 755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 『화엄경(華嚴經)』 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寫經)이자 통일신라시대 불교회화의 면모를 전하는 유일한 유물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화엄경』 1-10권과 44-50권이 담긴 두루마리 2개와 1-10권의 서두를 장식했던 그림의 조각이 2장이 전해진다. 두 두루마리의 끝부분에는 사경을 만든 시기와 사람, 사경의 목적과 과정 등에 대한 간략하게 적은 글이 실려 있다. 이를 통해 통일신라시대의 사경 문화에 대해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다.

출처:리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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