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방교육의 산실, 전주향교

2023. 1. 23. 06:32바롱이의 쪽지/전라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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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교육의 산실"

[사적 전주향교 (全州鄕校) Jeonju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향교는 유학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해 지방에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이 향교는 고려시대에 세웠다고 하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당시에는 조선 태조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사적) 근처에 있었으나, 향교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시끄럽다하여 전주성 서쪽 황화대 아래로 옮겼다 한다. 지금 위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뒤, 관찰사 장만이 옮긴 것이다.

현재 이 향교에는 여러 훌륭한 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전라북도유형문화재)을 비롯해 동무·서무, 계성사,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인 명륜당 등의 여러 건물이 있다. 대성전은 효종 4년(1653)이 고쳐 세웠는데, 이기발이 중건기를 남겼다. 이후 융희 원년(1907)에 군수 이중익이 다시 고쳤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다. 명륜당은 광무 8년(1904)에 군수 권직상이 고쳤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이다.

우리의 옛 교육시설을 둘러 볼 수 있는 이곳은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기능은 없어졌다. 그러나 봄·가을에 공자께 제사를 지내고 초하루·보름에는 향을 피우고 있다.

[영문 설명]

Hyanggyo was an educational institute established in the rural countryside to teach Confucianism and to train talents. This Hyanggyo is said to have opened in the age of the Goryeo Dynasty, but no definite record remains.

It was located near Gyeonggijeon Shrine (Historic Site No. 339) where the picture of the late King Taejo of the Goryeo Dynasty was at that time but was moved to another place down Hwanghwadae, west of Jeonjuseong Fortress due to the noise from the school. Provincial Governor Jang Man moved it again to the present location after two disasters stemming from the Japanese invasions.

Several buildings remain inside this complex today, including the Dongmu and Seomu shrines, Gyeseongsa Shrine, Myeongnyundang Lecture Hall where the students were taught, and Daeseongjeon Shrine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7 of Jeollabuk-do) where the memorial tablets of great national leaders were kept. Daeseongjeon Shrine was rebuilt in the 4th year of the reign of King Hyojong (1653), and Yi Gi-bal wrote a detailed record with regard to this construction work. Later, in the first year of the reign of Yunghui (1907), it was rebuilt by Yi Jung-ik, the county head, with three rooms in the main building and two rooms in the side building. The Myeongnyundang Lecture Hall was rebuilt by Gwon Jik-sang, the county head in the 8th year of the reign of King Gwangmu (1904), with five rooms in the main building and three in the side building. This school, from which the old educational facilities could be studied, lost its educational function due to the Government, which introduced the new school system after the Gabo Reform of 1894.

Nonetheless, the memorial ceremony for Confucius is still held every spring and fall, including the ritual of burning incense every 1st and 15th of the month.

출처:문화재청


[만화루]

만화루의 어원은, 공자지도 만물화생孔道 萬物化生 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인데, 뜻은 공자님의 도로 만물이 교화된다는 말이다. 

만화루의 건축되는 유래는, 왕비나 정승등 높은 사람이 출생한 곳에 세워졌으나, 본 건물은 전주향교의 정문에 세워진 2층 누각으로, 유생들의 여름철 강학과 향시장으로 사용되여 왔다.

건물은 전면3칸 측면2칸 2층이며, 건평은 73.4㎡로, 중층 팔작지붕에 이익공 구조이며, 2층은 우물마루로 깔리고 계자난간으로 둘러있다.


"일월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전주향교대성전 (全州鄕校大成殿)]

대성전은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향교에 공자를 모신 사당을 두고, 유학을 장려했다. 이 대성전은 효종 4년(1653)에 다시 세우고, 대한제국 융희 원년(1907)에 다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를 가운데 모시고, 동․서쪽으로 맹자 등 네 성인, 공자의 제자 열 사람, 주자 등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여섯 사람을 함께 모셨다. 동무․서무에는 신라시대 설총을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 나라 유학자 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향교에서는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사당에 향불을 피워 올리고, 매년 봄․가을에는 석전대제(釋典大祭)를 지냈다. 관청의 후원을 받아 향교의 선비들이 주관하여 치렀던 이 제사는, 공자의 뜻을 기리는 큰 행사이다.

출처:문화재청


"대성전 내부"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를 가운데 모시고, 동․서쪽으로 맹자 등 네 성인, 공자의 제자 열 사람, 주자 등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여섯 사람을 함께 모셨다.


"보호수 수령 350년 은행나무"


"보호수 수령 420년 은행나무"


"보호수 수령 380년 은행나무"


[동무(東廡)]

대성전 동쪽에 있는 행각으로 중국에서 유교를 발전시킨, 유가학파의 인물들의 위패를 모신 건물로, 공자님의 제자 10분중에 비공 민손, 설공 염웅, 려공 단목사, 위공 증유, 위공 북상등 5분과, 송조 6현중 도국공 주돈이, 낙국공 정이, 미백 장재등 3분과, 중국 7현 중 평음후 유약, 승민백 복숭, 창려백 한유, 문정공 이동등 4분, 총12분의 위패를 모신곳이다.

건물은 전면 9칸 측면 2칸 홋처마 맛배지붕으로 건평 170.6㎡이며, 서기 1603년에 건립되었다가, 서기1987년에 해체 복원된 건물이다.


[서무(西麻)]

대성전 서쪽의 편각으로 중국에서 유교를 발전시킨 유가학파의 중요한 인물들의 위패를 모신 건물로, 공자님의 제자 10철중 운공 염경, 제공 재여, 서공 염구, 오공 언언, 영천후 전손사등 5분과, 송조 6현중 예국공 정호, 신안백 소옹, 휘국공 주희등 3분과, 중국 7현중 선보후 복불제, 강도상 동중서, 온국공 사마광등 3분 총11분의 위패를 모셨다.

건물은 전면 9칸 측면 2칸 홋처마 맞배지붕으로 건평은 170.6㎡로 서기1603년에 건립 되었다가 서기1987년에 해체 복원된 건물이다.


"계성사"


"명륜당"


[박진효자비(晉 孝子碑)]

이 비석은 1398년(홍무 31)에 세워진 것을 1724년(경종 4)에 중각한 것이다. 비각 안에는 1805년(순조 5)에 후손 필성(必晟)이 지은 '전주부 효자박진정려기(全州府 孝子朴晉旌閭記)'가 걸려있다.

박진의 자(字)는 내신(乃臣)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완산지」에 박진은 아버지가 병환으로 눕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서 시중을 들면서, 낮에는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예법에 따라 장사(葬事)와 제사를 모셨으며, 3년 동안을 여묘(廬墓)살이 하여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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