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립고궁박물관, 궁중서화

2023. 2. 24. 07:00바롱이의 쪽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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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500년, 그 삶과 마주하다"

[국립고궁박물관]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5년 8월 15일 경복궁 내에 있는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조선왕실의 보물을 한데 모아 전시해 놓은 국립고궁박물관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개관했다. 

문화재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고, 일제에 의해 헐린 경복궁 전각들을 복원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1992년에는 4대궁궐과 종묘, 능원 등에 흩어져 있던 궁중문화재를 모아 덕수궁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덕수궁 내 석조전은 전시공간과 수장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규모조차 너무 작아 왕실문화를 홍보하고 연구 보존하는데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쳤고 이에 문화재청은 1993년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왕궁박물관을 개관하기로 결정하고 철저한 준비 끝에, 이번에 화려하게 개관을 하게 됐다. 

이처럼 10년간의 긴 덕수궁 시대를 마치게 된 국립고궁박물관의 새 보금자리는 덕수궁 시대보다 전시공간은 3배, 수장 공간은 30배가 넓은 초대형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이에 따라 4만여 점에 달하는 왕실문화재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보존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서울문화포털


[지하1층 전시안내]

지하에는 조선 왕실의 예술을 감상할 있는궁중서화, 왕실의 의례를 살펴볼 있는왕실의례 그리고 조선의 수준 높은 과학 문화의 역사를 있는과학문화실이 있습니다.

[궁중서화]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궁중회화가 국가 통치에 활용되었다. 궁중회화는 주로 국가의 예를 담당했던 예조禮曹의 감독에 따라 회화 전담부서였던 도화서圖畫署 화원畫員들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궁중회화는 특정한 쓰임새와 형식을 가졌으며, 창조적 예술성보다는 사실성·기록성·상징성·장식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은 유교 정치에 입각한 문화적인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학문을 숭상하고 배움을 글로 풀어내고자 하였다. 왕이나 종친은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글짓기와 서예를 수련하였으며 서화의 제작과 감상을 통해 인격을 수양하였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문방도 2폭 병풍]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궁중의 실내 공간을 장식하는 동시에 좁은 공간의 시야를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병풍이다. 쌓아올려진 책들 사이로 벼루, 붓, 필통과 같은 문방구들과 골동품, 도자기, 화초, 과일 등의 다양한 소재들이 그려졌다. 

책과 문방구류는 학문과 배움에 대한 열망, 그리고 좋은 문방구를 수집하고 감상하는 취향을 나타낸다. 불수감, 수선화 등은 부귀와 다산의 소망을 담은 것이다. 진귀한 물건들, 경사스러운 의미를 갖는 소재들을 망라하여 지적이고 문화적인 취향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열망까지 표현하였다. 

이러한 그림은 책 선반(책가) 위에 각종 소재를 배치한 책가도 형식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19세기 후반 이후 이와 같이책선반을 생략한 채
여러 소재들을 짜임새 있게 구성한 그림들이 많이 그려졌다.


[문방도 4폭 병풍]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

서책과 문방구류를 비롯하여 도자기, 골동품 등의 진귀한 물건과 여러 화초들을 그린 4폭의 병풍이다. 다른 문방도 병풍들과 달리 걷어 올려진 휘장 안에 물건들이 가득 들어차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마치 휘장 안쪽에 입체적인 공간이 존재하는 듯한 착시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휘장 속 기물들은 화려한 채색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어 이러한 그림의 구성방식과 더불어 장식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다. 경사스러운 의미를 갖는 소재들이 다양하게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휘장에도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의 '목숨 수(壽)'자가 동그란 문양으로 그려져 있다.

좋은 의미와 함께 궁중의 실내 공간을 장식했던 병풍으로 궁중장식화의 높은 품격과 화려한 기법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산수일출도 2폭 병풍]

양기훈 楊基薰, 1843-1911 20세기 초
gogung.go.kr

<산수도>와 <일출도>로 구성된 2폭 병풍으로 궁중의 실내 공간을 장식하면서 좁은 공간의 시야를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1폭은 깊은 산중을 배경으로 물가에 자리 잡은 오두막을 그린 문인화풍의 산수도이다. 2폭은 바다 한가운데 뾰족하게 솟은 바위와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그렸다. 

각 폭마다 제시를 적고 있으며 2폭의 제시 끝에는 '신(臣) 양기훈'이라는 관지가 남아있다. 이름 앞의 '臣(신하 신)'자는 왕에게 글이나 그림을 올릴 때 쓰는 표현이므로 이러한 관지 표기는 그림이 궁중에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군안도 병풍]

양기훈 楊基薰, 1843-1911|1905년

갈대밭 사이의 기러기 무리를 그린 10폭 병풍이다. 갈대와 기러기를 함께 그린 노안도(蘆雁圖 )는 ‘老安(노안)'과 발음이 같아서 노년의 평안과 장수를 기원하는는 뜻을 담고 있다. 

마지막 폭에는 기러기에 대한 시를 적으면서 '광무 9년 신(臣) 양기훈이 공경히 그리다'라는 관지를 남겼다. 이를 통해 궁중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1905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1905년 당시 고종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에서 '노안'을 주제로 한 대작 병풍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궁중에서 필요한 그림의 제작을 담당했던 도화서가 1895년에 폐지되면서 이 무렵에는 궁궐 외부에서 그려진 그림들이 유입되어 궁중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매화도 병풍]

양기훈 楊基薰, 1843-1911 | 19세기 말 ~ 20세기 초

꽃이 가득 핀 매화나무를 그린 6폭 병풍이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해강(海崗)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양기훈을 추억하며 1926년에 쓴 제시가 있어 이 매화도가 양기훈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양기훈은 매화도를 잘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매화도를 밑그림으로 해서 제작된 자수병풍이 궁중에서 사용되었다. 이 매화도 병풍은 궁중에서 직접 사용된 그림은 아니지만 자수 병풍으로 알려져 있던 양기훈의 매화도 화풍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의 문예취미]

문방文房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색하는 공간인 서재를 말하며, 문방에 갖추어 놓는 종이·붓·먹· 벼루 등 필기구를 '문방구'라 한다. 과거에는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종이에 쓰는 방법이 문자를 기록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기에, 학문을 숭상하고 글짓기가 중시된 유교사회에서 이들 문방구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왕실에서도 아름답고 품격 있는 문방구를 사용하여 다양한 문예활동을 하였다. 화합과 소통을 위해 왕과 신하들이 함께 시를 짓고, 궁궐의 건물과 경치 등을 소재로 일상의 이야기나 감상, 회고 등의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조선 왕실의 사인私印]

조선 왕실의 인장에는 왕과 왕비의 존엄을 상징하는 어보, 국가업무에 쓰는 국새나 관인 외에 개인적으로 사용한 사인私印이 있다. 사인은 다양한 크기와 재질, 독특한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인장에 관심이 컸던 헌종(생몰1827~1849, 재위 1834~1849)은 선대先代왕들의 인장과 자신이 수집한 인장의 정보를 모아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을 간행하였다. 보소당은 헌종의 당호堂號로서, 이에 따라 현종이 직접 수집했던 인장은 '보소당 인장'이라 부른다. 

보소당인장은 1900년 덕수궁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고종高宗(생몰 1852~1919, 재위 1863~1907)대에 이를 모각한 인장이 전하고 있어  『보소당인존』과 함께 왕실 사인의 면모를 보여준다.

장서각 소장 『보소당인존』 한 권에는 인장 67점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단순한 직뉴를 비롯하여 상서로운 동물을 조각한 다양한 인뉴印鈕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고궁박물관 소장 현종의 인장인 만기여가와 2014년 환수된 왕실 사인등총 6점이 『보소당인존』의 그림과 일치한다.


[연잎 모양 큰 벼루]

조선

평안북도 압록강변에 위치한 위원 지방에서 나는 징니석으로 만든 벼루이다. 몸체는 연잎 모양으로 조각했고, 벼루함 뚜껑은 나무로 제작한 뒤 윗면에 자개를 붙여 용무늬와 구름무늬를 표현하였다. 연잎 형태의 벼루는 중국 송나라에서 유행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다수 제작되었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의두합 심경 현판]

조선, 19세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는 의두합을 짓고 신하들에게 의두합 주변 풍경을 주제로 시를 짓게 하였다.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우빈객이었던 김노경(1766~1837년)이 효명세자가 지은 의두합십경」의 동영월월, 북란의두 등을 따라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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