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

2023. 2. 22. 06:03바롱이의 쪽지/서울

반응형

"조선왕실 500년, 그 삶과 마주하다"

[국립고궁박물관]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5년 8월 15일 경복궁 내에 있는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조선왕실의 보물을 한데 모아 전시해 놓은 국립고궁박물관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개관했다. 

문화재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고, 일제에 의해 헐린 경복궁 전각들을 복원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1992년에는 4대궁궐과 종묘, 능원 등에 흩어져 있던 궁중문화재를 모아 덕수궁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덕수궁 내 석조전은 전시공간과 수장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규모조차 너무 작아 왕실문화를 홍보하고 연구 보존하는데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쳤고 이에 문화재청은 1993년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왕궁박물관을 개관하기로 결정하고 철저한 준비 끝에, 이번에 화려하게 개관을 하게 됐다. 

이처럼 10년간의 긴 덕수궁 시대를 마치게 된 국립고궁박물관의 새 보금자리는 덕수궁 시대보다 전시공간은 3배, 수장 공간은 30배가 넓은 초대형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이에 따라 4만여 점에 달하는 왕실문화재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보존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서울문화포털


[1층 전시안내]

1층에는 황제국의 선포와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살펴볼 수 있는 ‘대한제국’실이 있으며, 전시실 로비에서는 순종 황제와 황후가 타던 자동차 [어차]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

정조 사후 세도정치로 사회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즉위한 고종은 1875년의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개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880년 외교·통상 업무를 강화하고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여 개화를 주도하였다. 

고종은 대내외에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을 알리고 대제국의 건설을 이룩하기 위하여, 1897년 연호年號를 ‘광무光武’,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정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하여 정치 · 외교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전면에서 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노력이 있었다. 일본 · 미국 · 유럽을 통해 전기 · 철도 · 우편 등의 신기술과 문화가 유입되었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으나 대한제국기의 이러한 경험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적 자긍심을 유지하고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의 변화상]

대한제국을 선포(1897년)한 이후 고종은 각종 국가 의례와 상징물을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정비하였다. 어보와 궁궐처럼 황제를 상징하는 물건과 공간에는 거북이나 봉황대신 용 문양을 더욱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의복과 의례용품으로는 황색이 많이 사용되었다. 한편 국기로 제정된 태극기를 각종 행사 때 황실의 상징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의 황도, 한성"


[조선을 이어 대한제국으로]

19세기 세계는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격변하고 있었다. 쇄국정책을 취했던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세계 외교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개항 이후 조선정부는 국외 사절단을 파견하고, 박람회를 통해 서양에 조선을 알리려 노력하였다. 더불어 외국 선진제도와 문물을 배우고 도입하여 교통, 통신, 금융, 의료, 교육 등 사회 전반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비록 서구 근대 문물의 도입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지만 대한제국은 점점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국가운영체제의 정비]

고종은 부국강병한 근대국가를 위해 국가운영체제 정비에 힘썼다. 특히 왕실 사무기구인 궁내부를 국가개혁을 이끌어갈 핵심 조직으로 삼아기능과 권한을 강화하였다. 국방력강화를 위해 군의 근대화를 꾀하고, 근대적 토지조사사업을 벌여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또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국제」를 공포하고, 「형법대전』을 반포하여 근대적인 법체계를 수립하는 등 국가운영에 필요한 각종 근대적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취해진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한다.


[고종과 순종]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한 고종(재위 1863~1907년)은 황실의 권위를 높여 황제권을 확립하려고 했다. 근대적인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으나 을사늑약 반대(1905년), 헤이그 특사 사건 (1907년)* 등을 구실로 일체에 의해 강제퇴위 당했다. 

순종(재위 1907~1910년)은 일체의 간첩이 심해진 시기에 즉위하여 황제의 권한을 충분히 행사할 수 없었다. 일체가 계획한 순종의 전국 순행은 거꾸로 백성들이 애국심을 표출하고 단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고종과 순종의 죽음은 각기 3.1 운동(1919년)과 6.10만세운동(1926년)의 기폭체가 되었다.

*헤이그특사사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 호소한 사건


[호조태환권을 찍은 틀 戶曹兌換券原版]

조선, 1893년

호조태환권은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이자 신·구 화폐를 교환할 수 있는 화폐 교환 증서이다. 근대적 화폐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신·구 화폐의 교환업무를 담당했던 태환서兌換署에서 발행하였다. 5냥권, 10냥권, 20냥권, 50냥권 등 총 4종의 태환권兌換券을 구 화폐(엽전)와 교환하고, 이를 다시 신화폐(은화 또는 동화)와 교환하고자 하였으나 운영상의 문제로 실제 발행되지는 못하였다.

출처:국립고궁박물관


[황제의 황색 상징물]

대한제국 선포 이후 의례와 제도가 조정되었다. 기존 조선의 국왕과 궁중에서 사용하던 각종 의례 용품도 붉은색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으로 바꿨다. 대한제국 시기 궁중 잔치를 기록한 그림에서 황색 의자와 각종 의례용품을 올려놓는 탁자, 황색 부채 등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일월오봉도/술병과 술잔을 올려놓는 탁자, 은제일월병과 잔, 잔받침/ 황제가 앉는 의자/향꽃이를 올려놓는 탁자


"술병과 술잔을 올려놓는 탁자, 은제일월병과 잔, 잔받침"


[황제국의 상징, 환구단과 환구제]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제단이다. 고종은 중국 사신의 숙소였던 남별궁에 환구단을 건립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중국의 제후국으로서 천제를 지내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여겨 세조 대 이후 중단되었던 환구제도 대한제국기에 다시 시행되었다. 

이곳에서 황제는 동지와 정월 첫 신일에 황태자와 문무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하늘 신(황천상제), 땅 신(황지기), 그리고 왕조의 시조인 태조고황제 등을 비롯한 다양한 신들에게 제사를 올렸다.

환구단 건설과 환구제의 시행은 독립된 황제국의 수립을 상징했다. 그러나 1913년 일본이 환구단 자리에 호텔을 지으면서, 현재는 신위를 보관하던 건물인 황궁우 등 일부 시설만 남아 있다.


[환구제 때 축문을 올려두는 판]

대한제국

환구제를 행할 때 기원 내용을 담은 측문을 올려두는 데 사용한 판이다. '환구축판'이라는 글씨를 새기고 붉은색으로 칠했다.


[용머리 장식 국자]

대한제국

술을 뜨는 데 사용한 제로 손잡이 부분에 용머리를 장식하였다. 몸체는 표주박 모양을 하고 있으며 붉은색으로 환구단을 의미하는 '구丘'자를 적었다.


[놋쇠 주걱]

대한제국

곡식을 푸는 데 사용된 쇠주걱이다. 윗면에 환구단을 의미하는 '구丘'자가 붉은색으로 적혀있다.


국을 담는 제기

대한제국

간을 하지 않은 고깃국인 대갱을 담는 데 사용한 제기祭器다. 윗면에 환구단을 의미하는 '구丘'자가 붉은색으로 적혀있다.


[환구단 건립 역사와 공간 배치]

환구단 영역은 크게 환구단,황궁우, 서쪽 재실, 동쪽 행각 영역으로 구분된다. 환구단은 원형의 답장과 장방형 담장으로 둘러싸여 황궁우, 재심 영역과 구분되었다. 

장방형의 담장 남쪽에는 3칸의 황실문, 북쪽으로는 벽돌로 쌓은 아치형의 삼문이 자리 잡고 있었고, 동쪽과 서쪽에는 재심과 행각으로 향하는 1칸짜리 문이 있었다.

[환구단 건립 역사]

대한제국
1897년 10월 중국 사신들이 머물면 남별궁터에 환구단 신축
1899년 12월 황궁우 건립
1900년 11월 황궁우 동·서무 및 어재실 이하 행각 164칸 신축, 환구단 정문 앞 소공로 확장
1901년 12월 환구단의 박석을 새로 깔고, 난간과 황색 지붕 설치
1902년 11월 광선문 건립
1903년 석고각 건립, 환구단 주변의 외담을 신축
1907 황궁우에 감실을 설치해 신위를 모십

일제시대
1911년 2월 환구단의 건물과 부지를 총독부 소관으로 이전
1913년 3월 환구단을 허물고, 조선철도호텔 건립


[신위를 모시는 용무늬 장식 의자]

대한제국

환구단에서 제향을 지낼 때 신위를 모시는 데 사용한 의자이다. 각 모서리마다 도금한 용머리로 장식했으며, 의자의 등받이에도 용무늬를 장식하여 황제국의 위엄을 드러냈다.


[신좌 뒤에 설치하는 병풍]

대한제국

황궁우에서 주요 신위를 봉안하는 신좌 뒤에 설치하는 병풍이다. 나무에 붉은 칠을 하였고, 구획된 칸마다 용, 봉황, 모란 등의 무늬를 새겼다. 각 모서리에 용머리장식을 도금하여 품격을 높였다.


[대한제국의 황궁, 경운궁]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법궁이자 도시 근대화 사업의 중심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궁역을 확장하고 전각을 신축하였으며 궐내에 서양식 건축물을 지어 근대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삼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된 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김에 따라 경운궁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궐이 되었고, 이름도 고종의 궁호에 따라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경운궁의 역사
1593년 선조가 정릉동 행궁에 임시 거처 마련
1611년 광해군,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으로 명명
1897년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옴, 10월 태극전(즉조당)에서 대한제국과 황제 즉위를 선포
1898년 브라운J. M. Brown의 발의로 석조전 설계
1902년 즉조당 앞에 정전 중화전 건축
1904년 경운궁 대화재
1905년 11월 수옥헌(중명전)에서 을사늑약 체결
1906년 대안문을 대한문으오 개칭, 중화전 중건
1907년 순종이 돈덕전에서 황제 즉위, 고종이 강제 퇴위 후 경운궁에 머물면서 궁호를 '덕수'로 개칭
1910년 석조전 완공


[근대기 황실 궁궐 내부 모습]

대한제국 시기를 전후하여 궁궐에는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 등에서 수입한 서양식 가구와 장식용품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가구와 생활용품 대부분은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자두꽃)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샹들리에와 같은 전기 시설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덕수궁, 창덕궁의 생활공간은 점차 서양식으로 변모해 갔다.


"경운궁 중건, 중화전 영건 내용을 기록한 의궤"


[중화전 현판]

대한제국, 190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의 즉조당을 중화전으로 개칭하고 정전으로 사용했을 때 걸었던 현판이다.


[궁궐 내 근대시설의 도입]

서양문물이 수용되면서 궁궐은 전통적인 모습과 함께 서양식이 결합된 형태로 변모하였다. 특히 궁궐 내 근대시설의 도입은 궁궐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87년(고종 24) 경복궁 건청궁에 최초로 전등이 켜지며 전기시설이 궁궐에 도입되었으며, 침대와 의자가 배치되거나 샹들리에와 커튼 박스 등의 시설이 설치되었다. 궁궐에 근대 수도시설이 갖추어진 다음에는 서양식 요리를 만드는 서양식 주방에 수도를 연결하고 실내에 수세식 화장실도 설치하였다.


[대한제국 상징 문양]

대한제국 시기 주로 쓰였던 상징 문양은 태극, 오얏꽃 무궁화, 매 등 네 가지였다. 국가 상징은 개항 이후 국제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한 상황에서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물이 필요해지면서 제정 되었다. 

국가상징은 황실을 중심으로 민간까지 널리 사용되었고, 의복·공예품·국기 등을 통해 사회 전반에 보급됨으로써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인식 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여러 근대적인 제도들과 함께 활용됨으로써 대한제국이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던 노력을 보여준다.


[궁내부 출입표]

대한제국

대한제국 시기에 궁내부에서 출입 인원을 제한하고 신분 확인을 위해서 만든 출입표이다. 오른쪽 상단에는 발행 번호를 기재하고, 중간에는 태극기와 함께 '궁내부출입표宮內府出入票'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황실에서 사용한 여러 생활용품]

개항과 함께 각종 서양 물품들이 대한제국에 소개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에서도 프랑스·영국·독일 등지에서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의 자기를 수입하여 화병이나 세면기 등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사용하였다. 또 서구식 식생활의 유입으로 서양식 식기류와 조리 용구를 이용하였다. 이들 생활용품의 대부분에는 이를 생산한 외국 회사 명칭이 찍혀있거나 오얏꽃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침 뱉는 그릇]

20세기 초

백자로 만든 침 뱉는 그곳으로 중앙에 적색의 오얏꽃 무늬가 있다. 입 부분에는 세척 시 분리할 수 있도록 깔때기를 씌웠다.


[파도 무늬 욕실용품]

독일, 20세기 초

황실에서 사용하였던 욕실용품 세트로 발을 씻는 욕조, 세수용 물병과 대야, 오수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면에 푸른 파도 무늬를 두르고 가장자리에 금색 안료를 뿌려 장식하였다. 

바닥에는 독일 도자기 회사의 상표(VILLEROY&BOCH METTLACH)가 녹색으로 찍혀있어 제작사를 알 수 있다.


[오얏꽃무늬 합]

20세기 초

황실에서 사용한 비자 대접과 뚜껑이다. 뚜껑의 가장자리에는 굵고 가는 선을 두르고, 뚜껑과 대접의 측면에 오얏꽃을 새겨 넣었다.


[전선사가 새겨진 접시]

1911년 이전

접시 상단에 금색의 오얏꽃과 '전선사'를 새긴 둥근 백자 접시이다. 접시 가장자리를 두껍고 가는 금색의 이중선으로 장식했다. 전선사는 궁중의 연회·음식 등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1895년에 설치되었다가 1911년에 해체되었다.


[은제 오얏꽃 장식 잔]

20세기 초

왼쪽 잔은 안쪽 바닥에 오얏꽃 무늬로 장식했고, 바깥쪽 바닥에는 '미美'가 각인되어있다. 오른쪽 꽃 모양 잔은 바깥면에 오얏꽃과 다른 꽃무늬를 음각하였고 바닥에는 '미'와 '순은純銀'을 새겨 재질과 제작소를 나타냈다.

[은제 숟가락]

20세기 초

숟가락의 음식을 담는 부분에 원수문(수자를 넣어 장수를 기원하는 무늬)으로 장식했다. 자루의 앞면에는 오얏꽃, 뒷면에는 제작소와 재질을 알려주는 '미'와 '순은純銀'을 새겨 재질과 제작소를 나타냈다.


[철제로 만든 제과형틀]

20세기 초

와플, 젤리, 케이크 등 서양식 다과를 만드는 데 사용한 형틀이다. 하단에 원형의 십자가가 그려진 마크가 찍혀있는데 이는 '벤헴 앤 프루드Benham&Froud'라는 영국 회사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만 사용했던 마크이다.


[유리병과 유리컵]

20세기 초

무늬를 넣어 장식한 유리병과 유리컵이다. 유리병 상단에 꽃과 식물 무늬가 둘러져 있으며, 유리컵 중앙에는 오얏꽃 무늬를 미세한 음각선으로 그려 넣고 기하학적 무늬 띠를 둘렀다.


[전선사가 새겨진 식기 상자]

1910년 이전

음식을 담아 옮길 수 있게 만든 상자이다. 상자 내부에는 흑칠을 한 식기 두 개기 들어 있으며, 상자를 여는 문에는 '궁내부전선사'라고 적혀 있다.


[근대식 연회와 황실 식기]

개항 이후 세계 각국과 근대적인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서양의 외교관등과 교류하기 위한 서양식 궁정연회가 도입되었다. 식탁과 의자 같은 서양식 가구들이 식당에 갖춰졌고 양식기가 유입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근대기 수입 도자기들은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미국, 일본 자기 회사의 제품으로 확인되고 있다. 금색 오얏꽃무늬로 장식한 것들이 많아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주문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찬장에는 주로 서양식 요리가 준비되었고 조선음식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트뤼플Truffle, 조선의 애저탕 요리가 나오는 등 동서양의 진미를 맛볼 수 있는 성대한 만찬이었으며 전통술, 샴페인, 맥주 등의 주류와 담배 같은 기호식품도 마련되었다.


[황실의 군예복 착용 모습]

대한제국기 군복은 지위에 따라 계급을 나타내기 위한 부착물의 형태가 달랐다. 옷소매에 부착한 '인'자형 계급장(수장)의 경우, 원수부의 대원수인 황제는 11줄, 원수인 황태자는 10줄이었고, 대장은 9줄, 부장은 8줄, 참위는 1줄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진 속에서도 고종, 순종, 영친왕 등이 황실의 예복을 차려입고 위엄을 갖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1907년경
1899-1904
대원수복 차림의 고종과
원수복 차림의 황태자 순종
태황제 복장의 고종
육군대장 복장의 순종
한국풍속·풍경사진첩, 1910 한국풍속·풍경사진첩 1910
참위 예복을 입은
영친왕


"대한제국 황실가족"


[황칠어좌]

대한제국

어좌는 황제 또는 왕이 앉는 의자다. 옥좌 또는 보좌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어좌가 붉은색이었던 것과 달리 대한제국기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으로 칠했다. 몸체 전면을 용무늬로 장식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금색 용머리를 끼웠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