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2023. 5. 6. 07:34바롱이의 쪽지/전라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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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보성읍에서 국도2호선을 따라 순천방면으로 가다보면 30㎞지점에 소설「태백산맥」의 주무대인 벌교읍에 도착한다.

「태백산맥」이라는 제목이 갖는 의미는 한반도의 척추로서 남북으로 잘린 허리를 말하며 곧 민족분단을 한마디로 상징하고 있다.

조정래 선생의 이 작품은 한의 모닥불, 민중의 불꽃, 분단과 전쟁, 전쟁과 분단 등 총 10권으로 이뤄진 책이다.

「태백산맥」은 벌교에서 시작하여 만주, 서울, 부산, 강원도까지 배경이 넓혀지지만 소설의 중심공간은 항상 제한된 공간에 두고 있고 결국 벌교라는 작은 공간에서 염상진, 김범우, 소화, 서민영, 외서댁, 안창민, 이지숙, 들몰댁 등 많은 등장인물들이 크고 작은 사건들을 걸죽한 육담과 전라도 방언으로 리얼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태백산맥」은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지만 작가가 생활했던 벌교를 소설속의 무대로 삼은 관계로 현실의 벌교에는 소설속의 사건들이 펼쳐졌던

이런 저런 장소들이 소설과 똑같은 위치에 있어 사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소설을 열어가는 현부자집,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엇간디라"로 방죽쌓던 일의 어렵고 힘들었음이 잘 묘사된 중도방죽, 포구의 양안을 이어주는 소화다리, 염상구가 희한한 결투를 벌였던 철다리, 벌교의 이름이 비롯된 홍교,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회정리 돌담교회, 좌우로 첩첩 산줄기들이 뻗어내려오다 문득 만들어낸 커다란 물사발같은 율어의 지세 등...

최근들어 소설을 읽고 소설무대를 체험하기 위해 벌교를 찾는 문학기행과 현장답사를 하는 관광객들이 날로 늘어나는 추세에 있으며, 벌교버스터미널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태백산맥문학관」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출처:보성군


[벌교역]

일본식의 소규모 역들이 으레 그렇듯 벌교역도 스무평 남짓한 대합실과 그만한 넓이의 사무실이 갖추어진 아담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건물의 노후로 1987년에 지금의 새 역사가 건립되었다. 벌교역은 유난히 시가지와 가깝고 시외버스 차부까지 인접해 있는데다 널찍한 마당까지 갖추고 있어서 그 주변은 상가들이 번창한 생활의 중심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소설에서도 벌교역은 여러 가지 행사와 사건들이 벌어진다. 국회의원 최익달을 전송하는 유지들의 도열, 후임 계엄사령관 백남식의 떠들썩하고 허풍스런 부임, 손승호가 이끄는 데모대의 항의 시위, 양효석의 금의환향, ‘악질 빨갱이 염상진 사살’ 이란 큼직한 글씨와 함께 그의 목을 역의 앞마당에 사흘간이나 내걸었던 일, 그리고 염상구가 삐딱하게 틀어돌린 어깨를 흔들며 건들대는 모습 등..

출처:보성군


[차부]

이곳은 시외버스로 고흥․순천․광주를 잇는 벌교 특유의 교통 요충지 역할을 해냈던 핵심이었다. 그래서 이 정류장은 아침 일찍 첫차가 뜰 무렵부터 밤늦게 차가 끊길 때까지 시끌벅적한 번잡이 넘치는 곳이다.

80년대 말에 시가지 교통체증 해소를 위해 외곽지역인 도래등 위의 현재 터미널 위치로 정류장을 이전하고 지금은 벌교우체국이 자리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많이 들끓는 교통 중심지에는 상인들이 번성하고, 거기에 기생하는 주먹패도 있게 마련이다. 소설에서는 그러한 삶의 구도를 정확하게 포착하여 이곳에 염상구를 배치했다. 정류장 양쪽 길가에 좌판을 벌린 떡장수며 고구마장수, 그리고 팥죽장수들. 그들에게 텃세를 받고 상권을 보호해주는 염상구가 뱀눈을 가늘게 뜨고 어깨를 휘저으며 가는 모습을 상상 할 수 있는 곳이다.

출처:보성군


[소화의 집]

「조그만 하고 예쁜 기와집. 방 셋에 부엌 하나인 집의 구조......부엌과 붙은 방은 안방이었고, 그 옆방은 신을 모시는 신당이었다. 부엌에서 꺾여 붙인 것은 헛간방이었다」 소설 태백산맥(1권 17쪽)에 나오는 무당 소화네 집의 모습이다. 당시의 무당집은 실제로 제각으로 들어서는 울 안의 앞터에 있었다. 집 둘레로는 낮춤한 토담이 둘러져 있었고, 뒤로는 풍성한 대나무 숲이 집을 보듬듯하고 있었다.

뒤란으로 도는 길목의 장독대 옆에는 감나무도 한 그루 서있는, 소설에서 그려진 소화의 모습처럼 정갈하고 아담한 그런 집이었다. 그런데1988년 무렵 태풍에 집이 쓰러졌고, 토담의 일부와 장독대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밭으로 변했다.

그 후 주차장으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소화의 집은 아예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을 2008년에 보성군이 복원하였다.

소설 태백산맥은 이 집의 신당에서 정참봉의 손자 정하섭과 무당 월녀의 딸 소화가 애틋한 사랑을 시작하는 것으로 길고도 아픈 이야기를 시작한다.

출처:보성군


[현부자네집]

중도 들녘이 질펀하게 내려다보이는 제석산 자락에 우뚝 세워진 이 집과 제각은 본래 박씨 문중의 소유이다. 이 집의 대문과 안채를 보면 한옥을 기본 틀로 삼았으되 곳곳에 일본식을 가미한 색다른 양식의 건물로, 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꽤 흥미로운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현부자네 집으로 묘사되었다. 「그 자리는 더 이를 데 없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태백산맥 1권 14쪽)」

소설 「태백산맥」이 문을 여는 첫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는 집이다. 조직의 밀명을 받은 정하섭이 활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새끼무당 소화의 집을 찾아가고, 이곳을 은신처로 사용하게 되면서 현부자와 이 집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펼쳐지게 된다. 소화와 정하섭의 애틋한 사랑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벚꽃과 화이트하우스"


"벌교천과 부용교"


[미리내 다리]

꼬막과 소설 태백산맥의 고장인 보성군 벌교읍의 중심부를 가르는 벌교천에 홍교․소화다리의 뒤를 이어 또 하나의 인도교 “미리내 다리”가 2009년 9월 29일 개통했다.

 군에 따르면 소도읍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12월부터 총사업비 23억원을 투입하여 총연장 110m, 폭 4m 규모의 아치형 인도교인 “미리내 다리”를 준공하고, 관내 기관단체장, 주민 등 5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개통식과 화려한 경관 조명 점등식을 가졌다. 

이번 공사는 벌교읍민의 오랜 숙원사업으로 벌교리와 회정리를 오가는 많은 주민들의 통행 불편을 해소하고, 밤에는 화려한 경관 조명으로 벌교천 강물과 여자만의 밀물이 만나는 아름다운 볼거리를 관광객들에게 선사하게 된다. 특히 한적하고 적막했던 벌교 하천변이 미리내 다리의 화려한 경관조명으로 눈길을 사로잡으면서 시험가동을 하던 9월초부터 야경을 보려는 주민들과 관광객이 북새통을 이루며 태백산맥 문학관과 벌교 꼬막 등과 함께 벌교 지역의 또 하나의 명물로 급부상하고 있다. 

츨처:보성군


[소화다리]

1931년 6월(단기 4264년)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써 원래 부용교(芙蓉橋)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였던 그때가 소화 6년이기도 해서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게 소화다리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지금도 대부분 소화다리라고 부른다. 이 다리는 여순사건의 회오리로부터 시작해서 6ㆍ25의 대 격랑이 요동치면서 남긴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양쪽에서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 위에서 총살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소설에서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사람쥑이는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태백산맥 1권 66쪽)」라는 표현과 포구의 갈대밭에 마구 버려진 시체들을 찾아가는 장면의 묘사 등으로 그때의 처참상을 상상하면 다리가 달리 보일 것이다.

출처:보성군


[술도가]

일제 강점기부터 벌교 일원에 막걸리를 공급해오던 도가집은 소설 태백산맥의 도입부 부터 등장하는 정하섭의 본가이며 하섭과 소화 간의 애절한 인연의 배경이다.

소설에서 지식인 청년 정하섭과 지역유지인 아버지 정현동 사이의 갈등은 해방정국에 벌교에서 벌어졌던 이념갈등의 전형적인 예로 묘사되어있다.


[구 보성여관]

1935년에 지어진 일본식 2층 목조건물로 당시에는 5성급 호텔을 방불케 할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20여 년 전부터 살림집과 상가로 쓰였다. 또한 소설 태백산맥 속 ‘남도여관’이라는 명칭으로 배경이 되었다.

문화재청에서 토지 및 건물을 매입하여 민간 기금으로 문화유산을 보존 관리하는 법인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이 2008년부터 관리를 맡아왔고 2009년 12월 문화재청과 보성군의 재원으로 보성여관 건물로 복원하기 시작하였다.

2012년 6월 7일 보성여관이 복원이 완료되어 새로 문을 열었다. 이 날 개관식에는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도 참석하였다. 1층에는 벌교와 건물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장과 카페, 소극장, 2층 다다미방은 세미나와 발표장으로 활용될 예정이며, 1층 안쪽의 한옥 부분에 있는 온돌방 7개는 2012년 7월부터 손님을 받아 숙박시설로 쓰이고 있다.

- 명 칭 : 구 보성여관

-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132호

- 지 정 일 : 2004.12.31.

- 소 재 지 : 전남 보성군 벌교읍 태백산맥길 19

- 수 량 : 1동 2층, 연면적 368.26㎡

- 시 대 : 일제강점기

- 소 유 자 : 문화재청

- 관 리 자 : 문화유산국민신탁

출처:보성군


"소설 태백산맥 문학거리"


[보성 구 벌교금융조합]

1919년에 금융 시설로 지은 2층의 붉은색 벽돌 건물로 그 사이사이 돌을 깎아 넣어 건물의 견고함과 장식적 효과를 동시에 노린 일본인들이 관광서 건물로 즐겨 지었던 모습이다. 중앙에 출입문이 있고 전면에 크게 창이 나 있으며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의 균형미를 이룬다.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당시 유행하던 절충주의 양식을 따른 건축물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금융조합장 송기묵이 일제강점기부터 금융조합에 근무해온 이력을 지닌 것으로 나온다. 일제강점기에는 금융조합 건물로 사용하다가 최근까지 벌교 농민상담소로 사용하였따. 현재는 전시시설을 설치, 운영중이다.

- 명 칭 : 보성 구 벌교금융조합

-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226호

- 지 정 일 : 2005.12.09.

- 소 재 지 : 전남 보성군 벌교읍 태백산맥길 39-1

- 수 량 : 1동 1층, 연면적 104.13㎡

- 시 대 : 일제강점기

- 소 유 자 : 보성군

출처:보성군


[소설 태백산맥 문학공원]

태백산맥 문학공원 기념조형물은 서울대학교 이용덕교수의 작품으로 일반적인 양각이 아닌 음각으로 입체감을 살리는 역상조각기법을 이용해 제작한 가로 23m, 높이 3m크기의 원호형태의 조형물이다. 

왼편에는 소설 탈고 후 작가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느껴지도록 했으며, 오른편에는 소설 태백산맥의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용덕 교수는 “조정래 선생을 태백산맥에 박힌 커다란 바위로 형상화하고 싶었고 태백산맥의 역사와 시간 모두를 새겨넣고자 했다”고 소개했으며, 작품에 대해 “보는 방향에 따라 인자하게 보이기도 하고 강인해 보이기도 하는 움직이는 조각”이라 설명했다.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으로 고발을 당했을 때는 이런 조형물이 들어설 거라 상상도 못했다”며 “민주화가 오고 지자체가 발전하면서 문학비와 문학관, 문학공원을 만들어 준 고향과 고향 사람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편 보성군은 지난 2008년 태백산맥문학관을 개관한 이래 태백산맥 문학거리를 조성하여 보성여관 복원과 금융조합의 보수를 완료했으며, 2014년 태백산맥 문학공원 기념조형물 설치를 시작으로 하반기에는 태백산맥 문학거리 특화사업을 추진하는 등 지속적인 문학테마사업 전개로 벌교읍을 거대한 문학관광도시로 조성해 명실상부 대한민국 문학기행 1번지의 위상을 정립해나갈 계획이다.  

출처:보성군


[채동선생가]

민족음악가 채동선(1901~1953) 선생은 이곳 벌교에서 태어나 순천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이때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에 매료되어 1년동안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던 중 1919년 3·1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가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이를 피해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1924년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할 때까지 바이올린 수업을 계속하였고, 1926년 독일 슈테르센 음악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1929년 귀국하여 4차례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1932년에 가곡 '고향'을 발표ㅏ였고 1937년 일제의 감시와 제재가 더욱 심해지자 서울 근교에서 은둥생활을 하면서 주로 민요 등 민족음악의 채보에 힘썼다. 

1953년 부산 피난생활 중에 신병을 얻어 53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채동선 선생이 남긴 주옥같은 작품으로는 '고향(그리워, 망향)', '조국', '독립축전곡', '개천절', '한글날', '3·1절' 노래 이외에도 '진도아리랑', '도라지타령' 등 수 많은 곡이 있다.

출처:보성군


[벌교 홍교]

홍교는 벌교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세 칸의 무지개형 돌다리다.

원래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다리가 있었는데, 조선 영조 5년(서기 1729년)에 순천 선암사의 승려인 초아노가 습성 두 선사가 지금의 홍교를 건립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에 지정되어 있다.

벌교(뗏목으로 잇달아 놓은 다리, 우리말 큰사전·한글학회 지음) 라는 지명은 다름이 아닌 '뗏목다리'로써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보통명사다.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어 지명이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뗏목다리를 대신하고 있는 이 홍교는 벌교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도 이 근원성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 구체성을 은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범우는 홍교를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니까 낙안벌을 보듬듯이 하고 있는 징광산이나 금산은 태백산맥이란 거대한 나무의 맨 끝 가지에 붙어 있는 하나씩의 잎사귀인 셈이었다.(태백산맥 1권 257쪽)」

3간(間)의 홍예(虹霓)를 연결축조하고 석교로서 외벽과 난간에 변모가 적지않게 나타나 있다. 궁융형(穹隆形)으로 된 이 석교는 각처에 있으며 또한 선암사(仙岩寺) 승선교(昇仙橋)와 함께 구조형식이 아주 뚜렷한 예이다.

궁륭형 교량은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부터 있어온 터이며 국내의 유례로서도 불국사의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등이 있다.또 각지의 조선시대 석빙고(石氷庫) 등에서도 천정가구(天井架構)에서는 이러한 홍예와 동류의 기법을 보이는 유구(遺構)들이 있다.한편 이러한 축조형식은 성문등에서도 흔히 이용되어 온 것이다.

이 홍교는 원래 숙종(肅宗) 44년(1718)에 당시 낙안현(樂安縣)의 주민들에 의해 현지에 떼다리(강과 해류가 교차하는 곳에 원목을 엮어 놓은 다리)를 놓았는데 영조 4년(1728년) 에 전남도 지방에 내린 대홍수로 이 다리가 유실되자 그 이듬해 선암사 주지 호암화상 (護岩和尙(약휴:若休))이 제자인 초안선사(楚安禪師)를 화주(化主)로, 습성대사(習性大師) 를 공사감독으로 천거 착공하였으며, 이 공사는 6년후인 영조10년(1734)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위 내용은 선암사 승선교 근처에 홍교비에 승선교 조성내용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이 홍교는 1981∼1984년까지 4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호예의 밑부분과 석교 외벽의 시멘트를 제거하고 모두 화강암으로 교체하여 원형을 되찾았다.

◈ 문화재 정보

명 칭 : 벌교홍교

지정번호 : 보물 제304호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벌교읍 벌교리 154-1

규 모 : 길이 32m, 홍예고 4m

재 료 : 화강암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보성군

관리자(관리단체) : 보성군

출처:보성군


[철다리]

1930년 경전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놓인 이 철다리는 소설의 배경이었던 시절은 물론 1970년대 후반 국도2호선 도로가 선형을 바꾸기 이전까지만 해도 홍교, 소화다리(부용교)와 함께 벌교포구의 양안을 연결하는 세 개의 교량 가운데 하나였다.

소설에서 염상구를 가장 인상적으로 부각시켜 주는 곳이 이 철다리다.「세상이 다 알게 친일을 했던 자들이 무슨 명목을 붙여서든지 애국의 탈을 만들어 쓰려고 급급한 판에 염상구 정도의 이력 변조는 아주 양심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태백산맥 1권 189쪽)」 철교 아래 선창에서 물건을 훔쳐내다 들켜 일본 선원을 찔러 죽이고 도망쳤다가 해방과 함께 벌교로 돌아와서는 용감하게 일본놈을 처치한 독립투사로 변신한 염상구. 그는 장터거리 주먹패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땅벌이라는 깡패 왕초의 제의에 희한한 결투를 벌인다. 철교의 중앙에 서서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누가 더 오래 버티다가 바다로 뛰어내리는지 담력을 겨루어 여기서 지는 자는 영원히 벌교바닥을 뜨기로 하고. 「철교의 교각은 모두 아홉 개였는데, 그들은 중앙 교각 위에 서 있었다. 기차가 “뙈액~” 기적을 울리며 검은 괴물처럼 철교로 진입했다. 그 순간 기차와 그들과의 거리는 교각 네 개의 간격으로 좁혀졌다...... (태백산맥 1권 188쪽)」

출처:보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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