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8경 제3경, 천안삼거리공원

2023. 9. 6. 06:38바롱이의 쪽지/충청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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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대로의 분기점"

[천안삼거리공원]

천안삼거리는 예로부터 북쪽으로는 서울, 남쪽으로는 경상도인 대구ㆍ경주 방향과 서쪽으로는 전라도인 논산ㆍ광주ㆍ목포 방향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삼남대로의 분기점으로 알려진 곳이다.

1970년대부터 조성한 면적 20만 7,000m²의 공원에는 곳곳에 능수버들이 있고, 연못가에는 조선시대 화축관(華祝館)의 문루(門縷)로 추정되는 영남루(永南縷,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2호)가 있다.

그 밖에 삼룡동 삼층석탑(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1호), 독립투쟁의사광복회원기념비ㆍ천안노래비 등이 있다.

출처:천안시청


"석탑과 흥타령 조형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삼룡동 삼층석탑 (三龍洞 三層石塔)]

삼거리 공원안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지금은 밭으로 변해 버린 안서동의 유려왕사(留麗王寺)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형태는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쌓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한면에 2개씩 안상(眼象)을 옅게 새겨 놓았고, 탑신의 세 지붕돌은 밑면에 2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측되나, 탑신의 2층 몸돌 이상이 원래의 것이 아닌 후대에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어서 아쉬움을 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흥타령 조형물과 영남루"


"2.19 의거 기념탑"


[천안삼거리]

예나 지금이나 천안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고 그 상징이 바로 천안삼거리이다. 북쪽 길은 서울로 향하고, 서울에서 내려오며 오른편 길은 도리티 고개 너머 공주와 호남으로 향하며, 왼편 길은 납안들고개 너머 병천을 거쳐 문경새재로 이어져 경상도를 향하기 때문에 온 나라에서 으뜸가는 삼거리였다.

천안삼거리는 능수버들 가락이 늘어지는 「흥타령」이 유명하여 한편으로는 매우 풍류 어린 곳으로 여겨질 법도 하지만, 사람들이 교차하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스쳐가는 만남과 이별이 애달프게 서려 있기 마련이니 천안삼거리에 얽힌 이야기들도 예외가 아니다. 오고가는 사람과 장사치와 그들을 받아 주던 주막과 흥성하던 역말은 근대에 들어와 철도가 개통되면서 제 기능을 잃고 말았지만 천안에서는 삼거리를 기리는 공원을 1974년에 만들어 시민들의 쉼터로 삼고 있다.

공원은 정작 삼거리보다는 다소 병천 쪽에 치우쳐 입구가 나 있는데 인공 연못을 파고 못 가에는 버들을 휘늘어지게 심고 정자도 세워 놓았다. 여러 비 중에서도 천안의 인물인 실학자 홍대용을 기리는 시비가 볼 만하다. 본디 역원이 있던 주막거리는 공원보다 북쪽의 공주와 병천으로 갈라지는 천안시 삼룡동 325번지 부근이나 지금은 기찻길과 국도에 밀려, 알아보는 이 없는 오롯한 오솔길로 남아 있다.

출처:한국문화유산답사회

천안삼거리공원 전경과 일몰


"그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영남루 (永南樓)]

조선 선조 35년(1602)에 세운 화축관의 문루로 추정되며, 당시 임금이 온천에 갈 때 머물던 별궁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본래 중앙초등학교 정문에 있던 것을 1959년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 중앙에 층계가 있으며 4면에 난간을 설치했다. 건물 안에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글(記文)이 남아 있다. 

출처:문화재청


"영남루"


 "흥타령 비"


"용 조형물과 누각"


[능소와 박현수 이야기]

헤어짐 

옛부터 삼남(三南:충청, 전라, 경상)의 길목이었던 천안삼거리는 민요 '흥타령'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전라도 고부 고을 선비 박현수와 여인 능소(綾紹)와의 애틋한 사랑의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초 경상도 함양에 사는 유봉서는 능소라는 어린 딸과 가난하게 살다가 적을 물리치라는 어명을 받고 변방으로 올라가던중 천안삼거리에 이르러 더 이상 어린 딸을 데리고 갈 수 없어 주막에 딸을 맡겨 놓고 딸능소에게 '이 나무가 무성히 자라면 다시 너와 내가 이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라며 버들 지팡이를 땅에 꽂은 뒤 눈물을 흘리며 홀로 떠났다.

기다림 

어린 능소는 곱게 자라 미모가 뛰어나고 행실이 얌전해 인근에 널리 알려졌다. 이때 마침 과거를 보러 가던 박현수가 주막에 들려 능소와 인연을 맺게 되어 혼인을 약속하고 한양 과거길에 오른다.

님과의 만남 

박현수는 여러 해 열심히 공부해 장원급제하여 삼남어사를 제수받고 행차하여 약속한대로 이곳에서 능소와 다시 상봉하자 흥이 난 능소가 '천안삼거리 흥~ 능소야 버들은 흥~' 하고 춤을 추며 기뻐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만남 

변방의 군사로 나갔던 능소 아버지도 별탈없이 돌아와 곱게 성장한 딸을 다시 만나게 되니 경사가 아닐 수 없어 잔치가 벌어지고 이곳에서 천안삼거리 흥타령 민요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단오절이 오면 "능소" 를 생각하는 시민들이 춤과 노래를 즐기고 있으며 흥타령춤축제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천안삼거리에 유달리 버드나무가 많은 것은 능소와 헤어질 때 능소의 아비가 꽂았던 지팡이가 자라서 퍼진 것으로 능소버들 또는 능수버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안박물관 가는 길 육교 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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