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천연기념물센터(전시관 명승Zone)

2023. 9. 15. 04:35바롱이의 쪽지/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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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센터]

천연기념물센터는 자연유산인 천연기념물과 명승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연구와 전시·교육을 통하여 그 가치와 중요성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설립된 국가연구기관입니다.

천연기념물센터 전시관에는 자연유산에 대한 연구 결과물인 공룡알·발자국 등의 화석, 반달가슴곰, 수달, 독수리 등의 동물 박제 표본, 존도리 소나무 등의 식물 표본 등을 전시하여 전문연구자와 청소년의 학습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체험 공간, 검색 키오스크, 영상실 등을 통하여 독창적인 체험학습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네스코와 세계 여러나라의 자연유산 전문기관 및 자연사박물관과의 학술교류를 통하여 명실상부한 자연유산 전문연구기관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출처:천연기념물센터


[명승 전시Zone]

또 다른 자연유산을 살펴볼 수 있는 명승 전시존

‘천연보호구역’을 지나면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과거 명승의 유래부터 오늘날 자연유산으로서의 명승까지 더욱 쉽게 명승을 이해할 수 있는 전시존이 펼쳐진다.

이곳에는 명승 관련 문헌의 영인본과 옛 그림, 우리 선조들이 명승을 유람할 때 소지했던 실물을 전시하고 있다.


아름다운 금수강산, 명승의 나라
Land of Breathtaking Scenic Site

한국은 예로부터 산과 구릉지가 많은 지형 덕에 수려한 경승지가 도처에 펼쳐져 있어 금수강산이라 불려왔으며,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擇里志, 1751) 에는 '백사천천평강록'이라 하여 한국의 경치를 표현하였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만남, 명승
Scenic Site, Encounter Between Nature and Man

명승은 '경치가 좋은 곳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크고 경관이 뛰어난 것'으로 우리 조상들은 명승 유람을 통해 자연과 가까이함으로써 산수지락(山水之)의 감흥과 인지지락(仁智之樂)의 경지를 이룰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명승에는 자연명승, 역사문화명승, 복합명승이 있으며,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을 찾아 시문이나 실경산수화로 남겼고 지리지에도 지역별 명승들을 선별하여 주요 항목으로 기록하였습니다때로는 명승을 여생을 위한 은둔의 장소로 만들어 동학들과 학문을 나누고 후학을 양성하는 공간으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명승은 자연과 인문의 복합체로써 생태적으로 보존 가치가 뛰어난 자연경관이었고,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미학경관이었으며, 당대의 문화와 역사성이 스며 있는 문화경관이었습니다.


"명승의 시작, 유행, 근대기의 명승 계승"


명승의 시작
Beginning of Scenic Sites

명승의 시작은 팔경문화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나라 팔경문화의 뿌리는 중국 소상팔경을 기원으로 명승의 대표적인 경치 여덟 개(八景)를 모은 것으로서 소상팔경시와 그림이 대표적입니다.

우리나라의 팔경은 고려 후기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명승을 향유하고 신선세계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고려 시대부터 ‘송도팔경’과 ‘신도팔경' 등이 유행하면서 승경(勝景)을 팔경화하는 고유 팔경의 전통이 확립되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명승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이구곡을 본보기로 구곡시가를 짓고 구곡을 경영하는 문화는 동아시아 삼국 중에 한국에서만 오랫동안 유행하였습니다.


명승의 유행
Scenic Sites in Fashion

유교적 자연관과 수련문화가 지배한 조선 시대에는 고려 시대 팔경문화를 바탕으로 명승문화가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명승을 향유하기 위해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을 찾아 그곳의 경치를 시와 글, 그림으로 남겼으며, 여러 관찬지리지에도 지역별 명승을 선별하여 주요 항목으로 기록했습니다.

명승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임원경제지』,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중 『임원경제지』,  『이운서편에는 명승을 여행할 때 갖추어야 할 행장과 재료, 용도, 제조법, 가치, 사용법, 효과 등 명승의 여행법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채제공의 번암집에 의하면 “여러 유명한 노선생들은 거의 모두 몸소 경치 좋은 곳을 점령하여 살면서 글 읽고 학문하는 곳으로 삼고 사후에는 제사하는 곳이 된다. 그러한 땅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바둑을 벌여 놓은 것처럼 많다. 그러나 그 사람이 거기에 가지 않으면 명승이 또한 스스로 나타나지 못한다. 이것은 서로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이치이다." 라고 명승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명승 문화의 유행은 '청구남승도' 놀이에도 응용되어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아녀자나 유생들에게 전국 각지의 명승 120곳을 놀이판에 담아 곳곳을 누비면서 그곳의 정취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근대기의 명승 계승
Succeed to Scenic Sites in the Modern era

명승에 대한 보호가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 문화재 관련 법령과 정책이 도입되면서부터입니다. 먼저 일본은 사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법(1919) 기준으로 1922년에 11개소의 명승을 일본지역에 지정하였습니다.

이후 한반도에서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1933)」을 통해 '고적 및 명승' 5건과 '명승 및 천연기념물 2건이 지정되었으나, 당시 지정되었던 명승은 현재 사용하는 명승 문화재와는 개념이 달랐습니다.

분단 이후 북한은 1946년에 명승 문화재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였고, 남한은 16년 뒤인 1962년에 법률을 마련하여 1970년 '명주 청학동 소금강' 이 최초로 지정되었습니다.

오늘날 역사와 문화를 포함하는 '명승' 의 개념과 지정·관리에 대한 논의는 1984년에 실시된 「자연자원 및 기타자원의 연구대상」을 주제로 한 연구에 의해 그 중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명승 분야의 범위가 확장되고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북한의 명승지 제도
Scenic Sites System in North Korea

북한의 명승지, 천연기념물보호법에서 정의하는 명승지는 '아름다운 경치로 이름이 났거나 희귀하고 독특하며 학술교양적 의의로 국가가 특별히 지정하고 보호하는 지역' 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승지는 자연현상으로서의 명승과 문화경관으로서의 명승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북한 자연현상으로서의 명승에는 산악경관 26개소, 계곡 및 폭포경관 10개소, 호수 1개소, 해안경관 14개소이고, 문화경관으로서의 명승은 115개소이며, 기타 37개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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